식당에서 입이 호강해야 하는데 귀가 호강하는 일이 있었다. 식당 홀에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이 아니라 같이 식사하는 일행 때문이었다. 와이프 친구로부터 초대받은 식사였다. 와이프 친구의 목소리는 성우와 같이 맑고 명랑하지도 않았고 섹시한 허스키도 아니었다. 나지막하고 솜사탕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내게 속삭여 주는 듯했다. 마음속으로만
"친구 남편은 좋겠다!
같이 살면서 속삭이듯 저리도 다정한 목소리에 귀가 호강 하다니------
부럽다"
식사를 마치고 귀갓길에 와이프에게
친구 남편은 좋겠어?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리를 갖고 있는 와이프와 함께 살고 있으니
친구는 딸딸이(딸이 두 명) 엄마잖아. 아들 둘만 길러봐 다 나같이 돼버려
여보야 미안해 당신이 아들 둘을 기르느라 고생했던 것을 내가 잊고 있었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요즈음에는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기. 딸, 아들 상관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둘을 낳아야 하는 시대도 있었다. 그 조합은 아들 하나, 딸 하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들이 필수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1남 6여나 만들었을까? 딸을 내리 6명 낳고 마지막에 아들 하나를 건진 집안 얘기다. 이름도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쉽도록 세 번째부터는 마치 우주선 발사 카운터다운 하듯 삼순, 사순, 오순 그러다 이제 딸은 네가 마지막이라는 소원으로 6번째 딸 이름은 종순(끝순)이. 삼신 할머니가 이를 듣기라도 했는지 7번째는 득남하여 과업을 완수하신 7남매 어머니도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이를 낳은 당사자는 시집 눈치 보느라, 아니 시어머니께서 집안에 대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해서 애를 그렇게 낳았다고 (변명) 하시지만 지금 생각 같아서는 아무리 시어머니의 엄중한 명령이었다 할지라도 어떻게 6명이나 뽕뽕 낳을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본인이 어느 정도는 아들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둘만 낳아서 잘 기르자"라는 세대다. 아들만 둘이다. 둘째가 이 세상에 나오던 날 분만실 밖에서 기다리다 간호사께서 "축하해요 아들입니다" 소리에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어퍼컷을 날렸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도 아들 이라는데에도 좋아서 어퍼컷을 날렸다.
남들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원한다는데 둘째가 아들 이라는데도 좋아했냐고요? 첫째가 아들이다 보니 아들을 하나 더 낳아 두 마리 호랑이 새끼를 만들고 싶었다. 첫째가 딸이고 둘째가 아들이면 둘째가 누나의 치마폭에 갇혀 여자 같은 남자가 돼버릴까 염려했고 반대로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면 억센 사내아이 밑에서 생존하려고 남자 같은 여자가 될까 염려했던 것이다.
아들 둘을 기르면서 내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 했던 것 같다. 두 사내가 자라는 과정은 영락없는 wild animal documentary였다. 둘째가 형을 이기지 못하고 분을 삭이지 못하면 팔을 물어뜯어서라도 보복한다. 그러면 첫째는 2년 더 컸다고 부모님을 힐긋 쳐다보며 이 자식을 어떻게 요리해 버릴까를 궁리하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동생이니까 네가 참아라"라고 말리지 않는다. "다시는 물어뜯지 못하도록 혼내 줘야 해" 하고 두 호랑이 새끼들의 결투를 부추긴다. 얼굴이 벌겋토록 두들겨 맞은 둘째가 엄마에게 다가와 고자질을 한다.
"형아가 때렸어
그러니까 왜 물어뜯어? 비겁하지 않아? “
우리 두 부부는 어린 호랑이 새끼들에게 공정한 결투를 주문한다. 체격이나 힘으로 이겨낼 수 없으면 순종해야 한다. 그게 동물의 왕국이다. 그게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요령이다.
약자는 강자에 순종해야 하고 이를 수용할 수 없다면 힘을 길러야 한다. 동생이니까 형이 참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논리로도 설득력이 없다. 참는다는 것과 배려는 다르다. 그리고 반칙이 통용되는 것을 용납해서도 안된다. 비록 5살, 7살 어린애를 상대로 내뱉는 얘기도 논리적 이어야 한다. 그들이 커서 생활전선에 뛰어들더라도 반칙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 새끼 때부터 몸에 배어야 한다.
엄마의 따뜻한 가슴은 형을 물어뜯다 얻어맞고 찾아온 둘째의 고자질을 받아주고 너 곁에는 항상 이런 원군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다. 힘이 없고 체력이 달려 형을 이길 수 없는데도 도전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곳이어야 한다. 엄마의 가슴은 절망하거나 좌절할 때 재기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그런 곳 이어야 한다.
이런 호랑이 새끼들은 자라는 동안 내내 치고박고 싸운다. 그러다 보면 어미 또한 이들을 건트롤 하느라 말투가 거칠어질 수밖에.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고, 그래도 어찌할 방도가 없으면 호랑이 새끼들의 아비인 나에게 와서 "당신이 어떻게 해봐" 하고 도움을 청한다. 5살 된 사내아이를 감당치 못하고 속이 상하여 혼자서 조용히 울고 있는 엄마도 봤다.
아비 호랑이는 집안에서 새끼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도 모른척하고 지나친다. 엄마가 소리 지르는 것도 모른 척한다. 그들만의 교통정리가 되기를 기다려 준다. 아비는 자기가 나서야 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집안에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것에 참견하다 보면 말빨이 안 서기 때문이다. 수컷 아비 호랑이는 이런 것 말고도 해야 할 본연의 막중한 임무들이 차고 넘친다. 직장에서 잘 적응하고 승승장구하여 돈도 많이 벌어오는 것. 집안에 우환이 생겨 식구들이 당황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아빠만 쳐다볼 때 "가족전체를 진두지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추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제를 수습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되면 아빠는 가족회의를 소집한다. 목소리도 한 자락 깔고 눈에는 힘을 넣고서 최대한 위엄을 갖추려고 나름 애를 쓴다. 목소리만 크고 힘으로 휘두르는 아빠 여서도 안된다. 문제아의 변(명)을 들어주는 회의, 무엇이 잘못 됐는지 가족 모두가 수긍하는 회의가 될 수 있도록 논리가 필요하고 감정조절이 요구된다. 그리고 본인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를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온 가족 앞에서 하는 회의여야 한다.
가족들 앞에서 다짐했던 것들을 지키지 못하면 공동체를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르도록 해줘야 한다. 문제의 새끼 호랑이는 벌을 받는 동안 동정을 기대하고 측은해 보이려고 애를 쓴다 해도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를 극복치 못한다면 호랑이 새끼가 아니라 고양이 새끼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잘못 길들여 놓으면 커서도 다 늙은 어미 곁으로 찾아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민다. 늙은 어미들이 그들의 눈에는 불쌍해 보이지도 않는다. 어미이니까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들을 불효새끼 또는 은혜를 모르는 새끼라고 비웃는다.
살면서 자식들이 나를 크게 실망시키면 "저 새끼가 내 뱃속에서 나온 새끼가 맞아" 하고 탄식한다. 분명코 맞다. 내 새끼다. 모르면 몰라도 약육강식의 세계에 야생시키지 않고 온실처럼 감싸고돌지는 않았는지를 돌이켜봐야 한다. 경쟁력이 떨어지고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반칙으로 임시변통을 해 보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어미들의 책임이다. 동물원에서 낳아 자란 곰을 방생했더니 사냥을 못하여 다시금 동물원으로 돌아왔다는 유명한 얘기도 있다. 이 험악한 세상은 투쟁의 연속이고 승자독식이고 자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새끼 호랑이들도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그들도 자식을 낳을 텐데 그러면 나와 똑같이 동물의 왕국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리킬 것이다. 살아가는 데에 별다른 묘수가 없다. 약자는 강자에 순종해야 하고 이를 극복키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지금은 그 새끼들이 둥지를 박차고 내 곁을 떠났다. 그들도 아비 호랑이가 됐다. 가끔씩 들여다보면 영락없는 그 옛날의 나를 보는듯하다.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