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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내열 Apr 23. 2024

미안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시간에 맞춰 회사나 사업장에 출근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됐다. 회사에서 쫓겨난 것도 아니고 사업이 잘 안돼 문을 닫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는 좀 쉬어도 되겠다 싶어서다.   여태까지는 종착지가 없는 욕망의 열차처럼 달리고 또 달리기만 했다. 그렇게 영원할 줄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가 저 멀리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석양을 보면서, 내 나이를 짚어 보면서 혹여 나라는 사람이 저 노을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날 내가 본 석양은 현란한 빛으로 참으로 아름 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손에 카메라를 들고 피어(pier) 끝까지 걸어 나와 아름다운 그 순간을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저 바다 밑으로 떨어지는 석양이 5분, 10분간 계속될 줄 알았는데 채 1분도 되지 않아 붉은빛만 남긴 채 숨어 버렸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 길지가 않구나!

그렇지만 지는 해는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여라!

나만 모르고 있었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은 그렇게 시작됐다.


돈 버는 일도 필요 없어졌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연방 공무원처럼 매달 12일이 되면 정부에서 연금을 주기 때문이다. 무노동 유임금인가?  아니면 인생 제2막으로 연방정부에 취직이라도 한 건가? 아무튼 돈벌지 않아도 걱정이 없는 인생은 어떤 것인지 기대된다. 열심히 일 하시는 분들에게는 좀 미안한 얘기지만.


두 번째는 누구로부터 평가를 받으면서 살아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학창 시절에는 시험의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직장에서는 승진의 초조함에 피가 마르고, 사업할 시에는 자격증 갱신이라는 시험의 연속이 나를 힘들게 했는데 이제는 그따위 것들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지금부터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시간뿐이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메이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됐다


이제는 브런치에 매일 쏟아져 나오는 글들도 차분히 읽어보고 지난날들을 뒤돌아 보며 글도 써보고 싶다.

주말이면 성당 갈랴, 친구들 만나 아점(아침 겸 점심) 먹을랴, 골프칠랴 허둥 대기만 했는데 이제는 주중에 골프도 실컷 칠 수 있게 됐다. 친구들은 일 년 동안 세계 6 대륙을 섭렵했다느니,  한 달 동안 북유럽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느니 뽐내던데 나도 이제부터는 발길 닿는 대로 어디론가 여행도 맘대로 갈 수 있게 됐다.


나의 첫 행선지가 한국이었다. 몇십 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나는 이곳에 이방인이 돼 있었다. 모든게 서툴고, 낯설고,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이 아니었다. 고국은 변하지 않았는데 나라는 사람이 아메리칸이 되어 돌아왔다.


고등학교 와 대학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어떤 이는 한나절이나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도 고등학교동창이라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세월의 야속함을 느끼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치고받고 싸우다 정학이라는 처벌을 함께 받았던 절친 봉구는 이 세상에 없었다. 하숙집에서 룸메이트 했던 수철이는 결혼 후 와이프가 돌아가시고 재혼했는데 두 번째 와이프 또한 뇌출혈로 저 세상으로 보내고 그들이 남기고 간 자식들 4명을 혼자서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서로 어설프게 좋아했던 여자친구 화영이는 시한부라는 의사 진단을 받고서는 투병 중에 있었다. 그녀에 대한 얘기다.


화영이는 머리를 뒤로 길게 늘어뜨린 긴 머리 여학생이었다. 훤칠한 키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 와도 같이 천진난만해 보인 눈동자가 매력적이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우리는 건물 앞 벤치로 나와 때로는 잔뒤밭에 앉아서 얘기를 하며 다음 수업을 기다리곤 했다. 화영이는 나에게 언제나 상냥한 미소로 다가오며 나를 "형"(당시에는 여학생들이 군복무 마치고 복학한 남학생들을 형 이라고 불렀음) 이라고 부르곤 했다. 나는 화영이에 대해 이성적인 감정이 있었다기보다는 나와 대화를 하는 게 좋은가보다 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술자리에서 "화영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하고 그녀를 끄집어내곤 했다. 다섯 명이 모여서 공부하는 그룹스터디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가보면 그 자리에 화영이도 와 있었다. 영문 소설을 읽고 번역하며 토론을 할 때면 화영이의 출중한 실력이 나를 놀래케하곤했다. 간밤에 술 마시다 리포트를 작성하지 못하고 학교에 가면 화영이는 "형, 리포트 작성 했어?" 물으며 그녀가 작성한 리포트를 보여주며 자기 것을 읽어보고 서둘러 만들어 보라고 반칙도 가르쳐 주곤 했다.  화영이와 시간을 함께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화영이는 내 가슴속에 조그마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졸업 쫑파티를(종강파티) 마치고 화영이와 커피를 마시면서 "너희 집에 초대한번 해주렴" 하고 툭 던졌다. 그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매우 엄격하시다면서 곤란하다는 반응이다. 당시에는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기준이 지금과 같이 케미가 맞다거나, 티키타카가 잘되어 텐션이 올라온다거나, MBTI를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집안, 성실성, 숙녀다움이었다. 거기에다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었다  


나는 화영이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매우 어설프게, 서투르게 확인하고서는 더 이상 만날 기회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지금의 와이프와 결혼을 했고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 버렸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나서 한참 후에 화영이가 우리 결혼식에 다녀 갔다는 것을 와이프를 통하여 알게 됐다.  결혼식날 신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키가 훤칠하고 긴 머리를 한 낯선 여자분이 들어와 자기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나갔다고 한다.


아--- 화영이가 다녀 갔구나  

내가 좋아했던 "형"이 선택한 여자를 확인하고 싶었구나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을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화영이는 행정고시를 합격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살면서 외롭다 싶으면 가끔 화영이 생각이 나곤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수 십 년이 지난 후 한국으로 돌아와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술 마시면서 함께 놀았던 그 옛날 친구들과 와이프를 대동하고 식사를 하게 됐다.   와이프들과 함께한 자리임에도 우리는 너무너무 오랜만에 만났던 터라 대화의 상당 부분이 그 옛날 대학 캠퍼스 시절의 얘기였다. 친구가


너 화영이 투병 중인걸 알아? 의사로부터 시한부 진단을 받았대. 내가 전화번호를 갖고 있는데 줄까?

그래 통화 한 번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와이프 얼굴을 쳐다보니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당신 이 자리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해?"의미였다.  당황한 나머지 옆자리에 친구를 쳐다보니 눈을 깜박 거리며 "너 지금 조심해야 해, 지금은 아니야" 한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했다.


찐친(찐한 친구) 부부와 식사를 하면서 화영이 때문에 내가 당황했었던 얘기를 했다.


내가 몇 살 입니까? 어디 사랑의 불장난이라도 칠 수 있는 나이입니까? 나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그 옛날의 "형" 전화를 받고 힘내라는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친구 와이프) 그건 아니지요. 여자의 자존심 문제입니다.

(친구) 이 친구야, 와이프 모르게 전화해야지 그 자리에서 전화번호를 달라니 그건 아니지


와이프 모르게 전화한다는 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그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통화하고 싶지는 않아


(친구) 그건 떳떳하고 않고의 문제가 아니냐 와이프에 대한 배려지

(와이프) 맞아요. 동감입니다


여보,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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