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북 스페셜 버전 (외전 포함) 통합본
“어둠 속에서 빛을 보려는 자만이 길을 찾는다.”
– 파스칼
[로드시커 외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마치 고치에서 나비가 나오듯 새로운 존재로 변화한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첨벙!
차가운 강물이 마치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그의 몸을 받아치는 듯했다.
주위는 칠흑 같았고 물속에서 나온 검은손들이 그의 온몸을 잡아당겼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결국 힘이 빠지고 몸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코와 입을 향해 물이 거칠게 밀려들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지만, 들이마신 건 죽음을 재촉하는 검은 물이었다.
빛도, 소리도, 감각도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점점 더 검은 물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아직 조금은 남아있던 의식이 느끼던 최후의 강렬한 느낌,
그것은 원초적인 죽음의 두려움이었다.
자살을 결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그는 잠시 죽음의 공포에 맞서보려 애썼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놓아버렸다.
그러자 의외의 평온이 찾아왔다.
고통마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고, 어둠은 어릴 때의 담요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깊은 잠에 빠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듯이,
욕망으로 타오르던 의식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 여기까지 로드시커 1부 라스트씬 -
그리고...
"익수자 발견! 남성 1명! 추락 지점 확보, 지금 바로 구조 들어갑니다!"
한강 구조대가 빠르게 출동했다.
구조된 남자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다.
"맥박 없음! 호흡 없음! 심정지 상태!"
"CPR 바로 시작!"
119 구조대원이 가슴을 눌렀다.
탁탁! 산소가 공급되고, 기도 확보가 이어졌다.
그의 입에서는 검푸른 물거품이 새어 나왔다.
"자동제세동기 준비!"
기계음이 차갑게 울렸다.
“리듬 감지 중... 심실세동입니다. 충격을 준비하세요.”
"Clear!"
순간, 젖은 몸이 크게 움찔했다.
"맥박 약하게 돌아옵니다!"
"자, 바로 이송합니다! 구급차 대기 중!"
서울시내 종합병원 응급실.
23:47, 의식 없는 남성 익수 환자 접수.
"신원 미상, 남성. 20대 후반 추정. 한강 투신 후 심정지 상태에서 구조됨. 제세동 1회, CPR 약 6분. ROSC 확인 후 이송."
담당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고개를 들었다.
"의식은?"
"자발호흡 없습니다. 동공반사 sluggish. 중심체온 34도 미만. 심한 저체온."
"기관삽관 진행하세요. 백마스크 제거하고 ET 튜브로 교체."
"튜브 인, 커프 인플레이트. 산소 100% 투여 중입니다."
"동시 수액 라인 확보. 노르에피네프린 준비. 혈압 유지 안 되면 도파민 추가."
"심전도 리듬 정상이지만, 의식 없음. 뇌손상 우려 큽니다."
담당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목표체온조절 들어갑니다. 목표 체온 33도!"
"체온을 왜 내립니까?"
응급실로 새로 투입된 인턴이 물었다.
담당의는 짧게 대답했다.
“심장이 멈췄던 시간 동안 뇌가 많이 손상됐을 가능성이 커. 체온을 낮추면 뇌가 덜 망가져.”
그는 차트를 보며 이어 말했다.
“살려내도, 뇌사상태가 될 가능성이 있어.”
간호사가 묻는다.
"환자 신원 확인됐나요?"
"신분증 없어요. 휴대폰도 물에 젖어 망가졌고."
"기적이 필요하겠네요."
그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심장은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아니 영혼은......
*
어둠이었다.
완전한 어둠.
깊고, 고요하고, 차가운 어둠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소리도 시간도 없었다.
몸은 없지만 감각 같은 것이 존재했다.
아니, 몸이 있을 때의 감각보다 몇 백배 더 선명한 감각이었다.
의식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둠의 튜브, 암흑의 터널을 빛의 속도로 지나는 듯했다.
그 순간—
희미한 빛의 점(點) 하나가 나타났다.
정확한 거리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그건 그저 존재했다.
내가 그것으로 날아가는지 그것이 내게 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점은 서서히 커져갔다.
그리고 갑자기, 이번에는 빛의 터널이 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부신 빛의 터널을 지나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확!
나는 거대한 빛과 하나가 되었다.
그 세상은 전부 빛으로 가득했다.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없었다.
오직 의식만이 빛 속에 녹아있을 뿐.
너무나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천국이라는 곳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지상에서의 삶이 자동으로 떠올라 스르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났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한 이후의 일들......
돈, 여자, 성공, 자신을 천사라고 속였던 악마......
돌아보니 모든 것이 부질없었다.
이렇게 빛과 하나 될 것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평온한 곳이 있을 줄 미리 알았다면...
지난 생의 모든 일들이 타인의 마음으로도 그대로 전해졌다.
그 사람이 되어 그대로 느꼈다.
상대방의 모든 상처를 느끼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빈아...”
목소리는 친절하고 자상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익숙한 목소리.
"아직은 올 때가 아니야.
너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단다.
배울 것들이 더 있을 거야."
“아… 이대로 머물고 싶어요…”
“아직, 너의 길은 끝나지 않았어.”
그는 다시 무한한 빛의 세계와 분리되었다.
그리고 빛의 터널과 어둠의 터널을 거슬러 깊은 꿈같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1장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 엘라 휠러 윌콕스, 「Solitude」
현빈이 눈을 떴을 때, 시야를 흐리게 감싸는 안개 너머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흰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티 없이 맑은 얼굴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정교하게 깎아낸 조각상처럼,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부셨고 천사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네... 분명히 다시 되돌려 보낸다고 했었는데. 여기가 혹시… 천국인가요?”
“깨어나셨네요? 그런데 정신이 아직 흐릿하신가 봐요. 일단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 그대로 누워 계세요. 이제 링거도 갈아야 하거든요.”
현빈은 뿌연 시야를 되찾으려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여긴 병원이군요.”
“기억나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럼요. 다 기억나요. 전부 다요. 너무나 또렷하게요.”
“다행이에요. 뇌 손상은 없었나 보네요. 그렇게 또렷하게 기억하시는 걸 보면.”
“물론이죠. 삶과 죽음 사이에 있었던 순간들까지, 전부 다 기억나요.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봤어요. 삶도, 죽음도 아닌 곳이었어요.”
“삶과 죽음 사이의 세계라뇨? 정신이 조금 혼미하신 건가요? 아니면 이상한 꿈이라도 꾸셨나… 아무튼 정신은 드신 것 같으니 담당 선생님 모셔올게요.”
링거를 갈고 병실을 나서려는 그녀를, 현빈이 갑자기 불러 세웠다.
천사와의 만남, 기적 같은 성공, 그리고 추락… 천사의 탈을 쓴 악마까지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육신은 가까스로 구조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물속에 잠긴 듯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걸… 간호사님께 여쭤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말 끝을 흐린 그의 목소리는 절박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죠?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 몸뚱아리 하나뿐이라고요.”
간호사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그런 건… 아무래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정신과는 싫어요. 정신이 이상한 환자 취급 받는 느낌이라서.”
“글쎄요. 사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완전히 멀쩡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조금씩은 다, 치유가 필요한 거 아닐까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정신과가 부담스러우시다면… 나중에 제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해드릴게요. 의사는 아니지만, 제 인생에도 큰 힘이 되어주신 분이에요. 환자분께도 도움이 될지 몰라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서둘러 병실을 떠났다.
현빈은 혼자 남은 병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3인실이었지만, 다른 환자가 없어 독실처럼 느껴졌다. 시트가 가지런히 개어진 빈 침대들, 전원이 꺼진 채 천장에 매달린 TV, 호흡 곤란 환자용인 듯한 산소통, 흰 벽과 회색 문, 무미건조한 병실의 사물들이 이상하리만치 정겹게 느껴졌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 살아 있구나. 나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마치 병실 안의 사물들이 그에게 잔잔히 속삭이는 듯했다.
현빈은 조용히,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래. 나, 살아 있어. 그런데 너희도... 왜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 마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떠올릴 때마다, 그를 둘러싼 공간 안에서 잔잔한 파동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마침, 오후의 햇살이 병실 가득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그 따뜻한 빛을 느끼며 팔을 만져보았다. 자신의 몸의 온기가 새삼스레 따뜻하게 느껴졌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콩콩콩. 심장이 뛰는 느낌과 함께, 힘찬 생명력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 또한 전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한켠에는, 여전히 캄캄한 물속의 감각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잔상처럼 스쳐간 그 어둠과 냉기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했다. 그는 곧장 그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한 햇살과 심장의 울림으로, 생명의 방향으로 마음을 되돌렸다.
그래, 이게 바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구나.
아무것도 가진 건 없지만,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이렇게 따뜻할 수 있는 거였구나.
왜,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그는 난생처음,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혼자서도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걸, 그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온 세상이 따뜻한 숨결로 가득한 듯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잔잔히 번져나갔다.
현빈은 퇴원 직전, 간호사에게서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가 적힌 메모 한 장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메모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귀띔해 주었다.
“연세도 많으시고, 성격이 꽤 괴팍하신 분이에요. 처음 뵐 땐 특히 예의를 지켜서 조심스럽게 대하세요.”
현빈은 퇴원하자마자 간호사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 나섰다. 도심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낡았지만 깔끔하게 칠해진 초록색 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문틈 너머로 정성스레 가꾼 나무들과 꽃들이 보였다. 고요한 정원은 말없이, 그러나 따뜻하게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원 한쪽에서 오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활짝 만개한 국화를 돌보고 있었다. 꽃을 다듬는 남자의 손놀림은 차분하고 정갈했다.
“아저씨, 여기가 혹시 우향 선생님 댁 맞습니까?”
“맞는데. 무슨 일이신가?”
“선생님을 좀 뵈러 왔습니다.”
“누가 찾아온다고는 들었네. 자네였군. 안으로 들어가지.”
현빈은 바짝 긴장한 채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루가 깔린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하면서, 발소리조차 나지 않게 하려고 본능적으로 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간호사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향 선생님은 연세도 많고, 성격도 꽤 괴팍하신 분이에요.”
노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현빈은 마치 나이든 은사님 댁에 방문한 학생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잠깐 기다리게.”
현빈은 이 남자가 우향 선생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 나이가 너무 젊어 보였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레 우향 선생의 제자일 거라 여겼다.
그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 보이는 정원은 소박했지만 정갈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리고 약간의 인간의 손길을 도움으로 치장하며 나무와 꽃들은 그저 고요히, 있는 그대로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문득, 현빈의 마음에 그림 같은 한 장면이 스쳐지났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박한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자, 그 꿈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현빈은 조용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번잡한 장식 하나 없이, 서예 작품과 동양화 몇 점만이 텅 빈 공간을 단아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 여백의 미를 살린 공간은 마치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우리네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잠시 후, 제자인 듯한 남자가 다기를 내와 차를 우렸다. 찻상 위에는 찻잔이 세 개 놓여있었다. 하나는 현빈 앞에, 다른 하나는 그의 맞은편 빈자리에, 나머지 하나는 현빈의 오른편에 앉은 그 남자의 것이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한적한 시골집의 오후, 고요는 정적으로 바뀌며 점점 더 깊어만 갔다. 가끔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의 짹짹거림만이 겨우 정적의 장막을 걷어내고 있었다.
식어가는 차를 바라보던 현빈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집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지만,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다른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참다 못해, 그는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언제쯤 나오십니까?”
“왜, 바쁘신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차가 다 식을 정도인데 나오시지 않기에...”
“지금, 앞에 계시지 않은가?”
“네?”
현빈은 깜짝 놀라 비어 있는 앞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우향 선생이라는 사람도 전에 겪었던 그 '악마'처럼 기괴한 존재는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기는 은둔술의 고수? 아니면, 죽지 않고 천 년을 산다는 신선이거나, 죽은 혼령을 부르는 사자(使者)? 온갖 상상이 연기처럼 피어나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란다는 말처럼,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미리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자네 눈에는 정말로 보이지 않는가?”
남자가 다그치듯 물었다. 목소리는 너무도 크고, 너무도 또렷했다.
현빈은 그 순간, 남자의 말보다 자신의 눈을 먼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익수 사고 후유증의 가장 큰 위험은 폐가 아니라 뇌에 있다고 했다. 호흡이 멈추고 산소 공급이 끊기면, 뇌세포는 순식간에 손상된다고. 그게 가장 치명적일 수 있다고 담당 의사는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그의 뇌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대체 뭐지? 혹시...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닐까?
“정말로 보이지 않는가?”
남자의 불호령이 다시금 번개처럼 떨어졌다.
현빈은 갑작스레 현기증을 느꼈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눈앞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희끄무레한 형상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다. 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진 백발의 노인. 간호사가 말했던 노인, 우향 선생이 틀림없었다.
“보입니다!”
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치자 형상은 더욱 또렷해졌다. 현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었다.
‘여기 계셨던 거잖아. 계속, 처음부터. 왜 지금에서야 보인 거지?’
“에라이! 이 정신 나간 친구야!”
딱!
갑작스레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현빈은 너무 놀라 아픈 줄도 몰랐다. 눈앞이 멍해졌다. 그저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방금 전까지 어렴풋이 보였던 백발 노인의 형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우향이야, 내가! 허허허허!”
남자는 배꼽을 잡고 크게 웃었다. 그리고 여전히 얼떨떨해 있는 현빈에게 말을 이었다.
“자네가 분명 날 찾아온 게 맞는데도 날 아저씨라고 부르길래, 장난 좀 쳐본 거라네.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나. 허허허.”
우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넨 아마, 내가 꽤 나이가 많을 거라고 들었겠지. 그리고 그 상(像)을 마음속에 그려두고선, 열심히 ‘노인’의 모습만 찾으려 했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현빈은 머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 앞에 있으면서도, 정작 날 알아보지는 못한 게지. 허허.”
우향은 장난기 어린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내 나이가 일흔을 넘겼지만... 뭐, 조금 젊어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 허허허.”
“그러면... 백발이 성성하고 긴 수염을 기른 그 노인은 누구였던 거죠?”
우향 선생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게 바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야. 아니, 사람들이 우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랄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래부터 사람이 우매한 건 아니지.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사실과는 다른, 자기만의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 틀대로만 세상을 보려 해. 그러니 결국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자기가 지어낸 세상만을 보게 되는 거야. 문제는 그 단순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이 보는 것이 진실이라 굳게 믿고 살아간다는 데 있지. 자기가 만든 그 세계가 아름답고 평화롭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현실은 어떤가? 세상의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마음속에 가득 품고, 그 어두운 틀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결국 삶이 더욱 괴롭고 불행해지는 거지.”
우향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조용히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본 그 노인? 그건 허깨비였네. 환영, 자네 마음이 그려낸 그림이지.”
우향은 담담하게 말했다. 현빈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찻잔 속 찻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마치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듯한 표정으로 보였다.
“인간의 뇌와 마음엔 자신의 자각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힘이 있어. 그래서 평소에 우리가 보고 듣는 감각 따위의 한계는 쉽게 넘어서 버리기도 하지. 지금 자네가 ‘실재’라 믿고 있는 모든 것조차, 사실은 자네의 뇌에 비친 ‘실상의 거울’일 뿐이야. 그 거울에 뭐가 비치느냐는 결국 자네 마음이 무엇을 믿느냐에 달려 있지. 만약 자네가 어떤 형상을 강하게 믿어버리면, 그건 곧 자네 뇌에 그려지게 되고, 결국 자네는 그것을 눈으로 ‘보게’ 되는 거야.”
우향의 말들은 현빈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낯섦조차도 밀어내지 않을 만큼 마음이 열려 있었다. 한때는 세상의 정점에 섰다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에게 속아 가장 낮은 곳까지 추락한 그였다.
삶의 극과 극을 경험한 끝에 비로소 그의 마음은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겉모습은 여전히 성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욕망의 그림자를 내려놓고 그 어떤 지혜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맑고도 유연해져 있었다.
“그거, 심리학에서도 그런 실험을 하지 않는가. 세 사람을 모아놓고, 두 사람이 짜고서 이것이 그렇다고 우기면, 나머지 한 사람은 아무리 그 말이 거짓이라 해도 결국 믿게 된다는.”
현빈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전히 이해된 건 아니지만, 문득 민석의 말이 떠올랐다. 호수에 비친 달의 모습이 우리의 본질은 아니라고 했던 그 말. 그는 마침내 자신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선생님. 저는...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네.”
“네?”
“자네가 이 세상에 올 때, 스스로 오기로 결심했던가? 태어나야겠다고 마음먹어서 태어난 게 아니지 않은가. 그저 온 거야. 그리고 세상에 나왔으니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이지.”
우향의 대답은 너무나 단순해서 오히려 현빈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무언가 더 깊은 해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이 무척 대단한 줄 알고 우쭐대지만, 생각만으로 삶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라네. 왜냐하면 생각은 강력한 힘을 지니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삶의 일부일 뿐이지.”
우향은 눈을 감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듯하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이란 머리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야. 가슴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법이지.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머리만 써. 생각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지. 삶을 느끼고 체험해야 할 때조차, 머릿속 계산만으로 살아가려 드는 게야.”
현빈은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선생님 말씀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우향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우연한 일은 없다네. 자네가 태어난 것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이 세상에 태어난 누구든... 모두 깊은 의도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야. 그 의도는 우리가 평소에 쓰는 생각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깊고 고요한 곳, 바로 ‘영혼’에서 비롯된 것이지.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은 바로, 그 영혼의 의도와 자네의 생각이 하나로 합쳐질 때라네.”
우향은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듯 고요히 머물렀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열매가 익으려면,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되는 법이지. 모든 일엔 다 그럴 만한 때가 있는 법이야. 자네는…… 음……”
삶의 비밀을 당장이라도 풀어내고 싶어 조급해진 현빈에게, 우향의 그 짧은 침묵조차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네는 계절로 치면, 이제 막 시작된 봄이라네. 지금 열매 맺기를 바라면 일을 그르치고 말 거야. 그러니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에 충실하게 살아가게. 매 순간, 눈앞의 현실에 마음을 두게나. 설령 그 현실이 지극히 단조롭다 해도 성급히 무엇을 하려 해서는 안 되네. ‘나 죽었다’는 심정으로 인내하며 견뎌내는 거야. ‘내가 왜 살아야 하지?’ 같은 질문은 자네를 더 깊은 늪으로 끌고 들어갈 뿐이라네. 그 대신 더 나은 질문을 하게.”
“더 나은 질문이요?”
“그래. 쓸데없는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마음을 흐릴 때면, 그 모든 걸 다 지우고 이 하나의 질문만 붙들게. 자네가 정말로,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생각 하나에만 집중하라는 말이지.”
우향은 이어지는 말들 속에서도 유독 그 대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질문이 현빈의 가슴에 작은 돌멩이처럼 툭 하고 떨어졌다. 작은 파문이었지만 그것은 가슴속 깊이 번져나갔다.
“오직 이 질문 하나에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하네.”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 같은 건가요?”
“뭐라 부르든 상관없네. 본질은 그게 아니니 말일세.”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빈은 마음속에서 그 말을 또렷이 되뇌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동굴 속의 메아리처럼 공허하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마치 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기라도 한 듯, 우향이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루 이틀, 한두 달 질문한다고 해서 금세 답이 나올 거라 기대하지는 말게. 너무 성급하게 실망할 필요도 없고.”
우향의 말은 현빈의 가슴에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현빈은 그 말을 따라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부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어쩌면, 단지 편하게 살고 싶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었을 뿐이었다. 그저 세상이 말하는 성공, 그 표면만을 좇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향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낮은 저음이 현빈의 가슴을 울리듯 했지만 맑고 청명함이 함께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자네는 이제 막 겨울을 지나 새로운 봄으로 접어드는 중이야. 하지만 봄이라 해도 아직은 좀 춥지. 꽃샘추위가 찾아오지 않은가. 그 추위를 견뎌야 진짜 꽃이 피기 시작하는 법이지. 자네 인생에도 곧 꽃이 피게 될 걸세. 그리고 여름이 오면 뜨거운 햇살과 함께 태풍도 찾아올 거야. 비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며 열매를 준비하는 씨앗은 더 단단해지지. 그렇게 견뎌낸 후, 가을이 오면 마침내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될 거야.”
“그럼, 다시 찾아오는 겨울에는요?”
우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 순간, 정원 너머에서 작은 새 두 마리가 날아들었다. 짹짹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깨웠다. 새들은 서로를 향해 정답게 노래하듯 울었고, 그 모습은 사랑과 평온, 그리고 삶의 자연스러운 순환 그 자체를 드러내는 듯 보였다.
그때 우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인생이 오로지 좋은 일로만 채워지길 바라는 것,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는 마음이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이고 환상일 뿐이야. 좋은 일이 반드시 좋게만 이어진다는 보장도, 나쁜 일이 꼭 나쁘게만 흘러가리란 법도 없네. 자네도, 이미 겪어보아서 알고 있지 않나?”
현빈은 깜짝 놀라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악마를 통해 겪은 일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기 때문이다.
‘설마, 우향 선생님은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스치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말. 그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삶의 진실이었다. 생각해보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전하려는 뜻도 결국 그 한 가지 아니던가.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우향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 만물은 겉으로 보기엔 서로 나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근원의 차원에서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는 법이라네. 그래서 눈을 틔우고 마음을 밝히다 보면, 이것을 보고도 저것을 알게 되는 일이 생기지. 전통적인 표현으로는, 이를 격물치지(格物致知)라 부른다네.”
말을 마친 우향은 껄껄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현빈은 문득 절친 민석의 미래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빈의 인생에 처음으로 맑고 청량한 지혜의 가르침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듯한 시간이었다.
2장
“부(富)도 행복도, 그것을 직접 찾으려 하면 얻기 힘들다.
유용한 일을 할 때 따라온다.”
- 헨리 포드
현빈은 이번에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성공해보리라 결심했다. 더 이상 악마와 같은 존재, 특별한 힘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악마와의 계약, 그 극적인 경험을 통해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행복을 위한 충분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다. 돈만으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그런 착각은 모두 그의 결핍된 마음과 집착에서 비롯되었음을 철저히 깨달았다. 비록 일 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망하는 것들을 대부분 손에 넣어본 뒤였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말하는 성공이 아닌, 자신의 길을 가는 ‘아주 특별한 성공’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터였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는 것,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현실적인 문제들과 부닥치게 되었다. 그는 가진 돈을 몽땅 끌어 모아 반지하 월세방에 입주했다. 예전에 살던 집, 그러니까 천사의 탈을 쓴 그 자와 만나기 전보다도 훨씬 못한 곳이었다.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가방 몇 개 옮기고 낯선 방에 몸을 눕혔다.
천장 구석엔 거미줄, 벽지엔 누런 얼룩. 곰팡이 냄새가 벽에서 스며나왔다. 깨진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얼마 전까지 살았던 최고급 오피스텔의 광택을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참 밝고 깨끗한, 고급스러운 곳이었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목 놓아 울었다.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지만 연락할 수 없었다.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며 거짓말까지 해놓고, 모든 걸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말할 용기가 없었다. 당분간 고향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기분이 가라앉으니, 다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곧 이어 떠오른 건, 그가 직접 겪었던 삶과 죽음 사이의 경험이었다. 그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죽는 일은 사는 일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는 것을. 태어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듯, 죽는 일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 그래서는 절대 안되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우향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태어남이 영혼의 선택이라면, 죽음 또한 영혼의 선택일까.’
문득, 돈 없이도 행복해 보이던 유민이 떠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현빈은 급히 집을 나섰다. 그가 강남의 바 ‘아리엘’을 다시 찾았을 때, 유민은 몇 달 전 모습 그대로 바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현빈을 보고 반가운 듯 처음에는 밝게 미소 지었지만, 이내 살짝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현빈이 유민에게 행패를 부리던 남자의 팔을 부러뜨린 이후의 첫 방문이었다. 유민은 잠시 후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몇 달 만이죠? 그런데… 전에 뵀을 때와는 뭔가 많이 달라 보이세요.”
“옷차림이 초라해져서 그런가요? 사실 값나가는 옷들은 모두 처분했거든요.”
현빈은 멋쩍게 웃으며 솔직히 말했다. 유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은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세요.”
현빈은 의아했다.
“정말요? 어떻게요?”
유민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기분 나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말씀드릴게요.”
유민의 모습이 만화 속 귀여운 소녀처럼 느껴졌기에 현빈은 크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전에 오셨을 땐, 금방이라도 목이 부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네?”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셨거든요.”
둘은 함께 깔깔대며 웃었다. 유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치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느낌이었어요. 본래의 모습은 꽁꽁 감춘 채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며 자신을 과시하는 가면이요. 지금은 그런 가면을 벗은 모습 같아요. 제가 하루에도 수십 명의 손님을 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죠.”
유민은 현빈의 눈을 맑게 응시했다. 그 시선이 현빈의 내면까지 꿰뚫어보는 듯했다.
“가면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요. 늘 피해자인 척 슬픔을 연기하는 가면, 세상에 분노하며 혁명을 외치는 가면, 잘난 척하거나 못난 척하는 가면까지 굉장히 다양한 모습들이죠. 그런데 가면을 쓴 분들은 대부분 불행해 보여요. 재력이나 지위와는 상관없이요.”
현빈은 그녀의 지혜로운 통찰에 놀랐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토록 깊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현빈은 지혜의 샘물을 퍼내려는 듯 조급히 물었다.
“가면을 벗은 것 같은데, 왜 나는 아직 행복하지 않은 거죠?”
유민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가면을 벗는 건 중요하지만, 가면을 벗었다고 해서 금세 행복해지는 건 아니에요. 진짜 자기 얼굴을 찾아야만 하거든요.”
“진짜 자기 얼굴이요?”
“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진정한 얼굴을 찾아야 한대요. 혹시 천국의 문에 걸려 있다는 거울 이야기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현빈은 ‘천국’이라는 말에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자신의 기묘한 경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아니 죽음과 삶 사이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유민은 마치 태고적 신비가 가득한, 비밀의 문을 여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유명한 무속인이셨던 저희 할머니께 자주 들었던 이야기예요. 사후세계에 관한 거예요.”
기묘한 이야기의 시작에 현빈이 침을 꿀꺽 삼키며 집중했다.
“죽으면 살아서 지은 업에 따라 빛과 어둠으로 가득한 터널을 지난대요. 터널이 끝나면 길게 뻗은 길이 나오죠. 길은 지옥으로 이어지고요. 그런데 그 길 중간에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있대요. 문에는 거울이 하나 걸려 있는데 자신의 얼굴을 비춰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요?”
“거울은 영혼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인데, 거기에 비친 영혼의 얼굴과 실제 자신의 얼굴이 같으면, 문이 열리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대요. 만약 다르면…”
“다르면요?”
“지옥으로 향할 수밖에 없죠. 재밌는 이야기죠?”
유민은 활짝 웃었지만 현빈은 웃을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자, 유민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니에요.”
천국과 지옥 이전의 세상… 현빈은 혼수상태에 겪었던 신비한 경험이 떠올랐다. 우향 선생의 말도 생각났다.
‘영혼의 의도와 생각의 방향이 일치될 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곤 하지.’
“유민 씨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유민은 밝게 웃었다.
“글쎄요. 저는 죽은 뒤까지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제 영혼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을까요? 아, 참.”
유민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테이블 아래를 뒤져 작은 선물을 꺼내 건넸다.
“이거 제가 미리 준비한 선물이에요. 저 실은 얼마 전에 약혼했어요. 그날 안 좋은 일 있었던 사람이랑요. 선생님이 팔을 부러뜨린 덕분에, 하하…”
그녀는 쑥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때 일, 다 저 때문인 것 같아서 병문안을 가다 보니 정이 들었나봐요. 알고 보니 참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다 선생님이 이어주신 인연 덕분이죠.”
선물은 두 남녀가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 조각된 양초였다. 아래에는 작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둘이지만 하나인 영혼, 그들은 세상의 빛이 되리라.’
그 날따라 아리엘의 실내가 유난히 밝아 보였던 건, 그저 현빈의 착각 때문이었을까.
바를 나선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상쾌한 봄날의 밤, 어둡고 짙은 매연을 뚫고 어둠을 걷어 내기라도 하듯이, 샛별이 유난히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찬란한 별빛 아래, 현빈은 마음을 굳혔다. 과거의 모든 것을, 그 거짓으로 빛나던 껍데기를 스스로 완전히 부숴버리기로. 더 이상 허상에 기대지 않고, 가장 낮은 곳조차 마다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행복은 천천히 찾아도 좋을 것 같았다. 당장은 현실에 집중해야만 했다.
현빈은 당장 돈이 되는 일부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배달 아르바이트였다. 일을 시작하기 전엔 낯설고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생각보다 금세 적응이 되었다. 오히려 몸이 바쁘고 생각할 틈이 별로 없는 덕분에 과거의 화려하고 풍족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한결 편했다.
처음 며칠은 정말 쉽지 않았다. 배달지 주소를 찾느라 낯선 골목을 몇 바퀴나 맴돌기도 했고, 스쿠터 운전에 익숙하지 않아 빗길에 미끄러질 뻔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배달이 조금 늦어지기라도 하면 “뭐 하는 놈이야, 지금 시간 몇 신데!” 하고 윽박지르는 손님도 있었다. 억울했지만, 따질 여유도 없었다.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간혹, 같은 배달원들끼리 건물 현관에서 눈인사라도 나누는 날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서로 말은 안 해도, 다들 비슷한 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느낌이 위로가 되었다.
그는 낮엔 배달일, 밤에는 편의점, 주말에는 물류센터에서, 그렇게 세 건의 일을 동시에 뛰었다. 악마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인생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그가 가장 크게 느낀 건 냉정한 현실 감각이었다. 예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며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공상에 허비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삶이라는 건 때로 석양을 감상하는 감수성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빈 틈 없이 냉정한 이성도 갖추어야 한다. 폭넓은 의식의 스펙트럼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사유와 현실.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껴안을 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 현빈은 과거의 사치를 버리고 근면함과 절약정신으로 다시 무장했다. 세 건의 일을 하며 지출은 별로 없었고, 돈은 예상보다 빨리 쌓여갔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엔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그는 우향의 말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여전히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일을 하면서도, 쉬는 시간에도 계속 생각했다. 일터 동료들이 슬쩍 미친놈 보듯 쳐다본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그 질문을 꿈에서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돈은 여전히 필요했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행복일까?’
행복이라는 말은 너무 막연했다. 무엇이 되어야 행복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무언가를 떠올리려 해도 머릿속은 뿌연 안개로 가득하기만 했다. 생각만으로는 도저히 답에 다다를 수 없었다. 진흙탕에 빠진 자동차 바퀴처럼 제자리를 맴돌 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인 법. 흐름을 따라 어떤 일은 스스로 최선의 답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현빈은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여러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 달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마친 어느 날, 한 중소기업의 사무직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3장
“당신이 찾고 있는 것도, 당신을 찾고 있다.”
- 잘랄루딘 루미
현빈의 삶은 단조로웠다. 집과 회사, 회사와 집.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회사가 바빠진 덕분에 그의 일상엔 야근이 더해졌고, 그는 그 흐름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이 번잡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기대가 없었기에 오히려 고요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저녁이었다. 야근을 마친 늦은 귀갓길, 지하철에 앉아 습관처럼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꾸벅거리며 졸거나 스마트폰에 몰두해 있었다. 현빈 역시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던 때, 문득 옆자리의 여자가 펼쳐 든 책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 순간, 책에 쓰인 한 문장이 현빈의 가슴 깊숙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간절한 소망은 온 우주가 이루어 주기 위해 돕는다.’
그 한 문장으로 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가슴 깊이 잠겨 있던 감정의 문이 순식간에 열린 듯했다.
‘왜 이렇게 설레는 걸까…’
그 구절은 우향이 던져준 질문과도 맞닿아 있었다. 우향이 준 화두인 '정말로 원하는 것'이란 책 속의 구절인 '간절한 소망'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으로 시선을 옮겼고, 또 한 번 숨이 멈추는 듯했다. 바로 그녀였다. 한강에 투신 후 깨어났던 날, 병원에서 만났던 간호사. 우향 선생의 연락처를 건네주었던 그녀. 병원에서 간호사복을 입었을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 눈빛과 분위기는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아니,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현빈은 우주의 모든 순간이 지금 여기 모여든 것 같은, 운명의 중심을 느꼈다. 그녀는 서서히, 하지만 갑작스레, 빛처럼, 바람처럼 향기처럼 그의 존재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가슴 안쪽의 어떤 경계가 무너져 내렸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끌림이 함께했다. 그동안 겪어왔던 모든 감정들이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해온 것처럼 느껴졌다.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녀는 천천히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 역시 그를 알아보았고, 잠시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는 듯했다.
“아… 당신은…”
눈빛으로 두 영혼이 교감하는 듯했다. 그녀의 긴 생머리가 불빛 아래 후광처럼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현빈의 마음은 그녀의 눈동자 속 깊은 호수에 가라앉았다. 그녀 역시도 현빈과 마찬가지였을까? 그녀의 얼굴에도 이내 따뜻하고 온화한 미소가 피어났다.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현빈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고 그녀는 아무 말없이 책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어떤 내용이에요?”
"너무 좋아해서 서른 번도 넘게 읽었어요."
현빈은 화학을 공부하며 현대판 연금술사를 꿈꾸던 친구 민석을 떠올렸다. 그리고 우향 선생의 이야기도. 우주가 반복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고 있는 듯했다.
"어떤 이야기이길래 그렇게 좋아하세요?"
"양치기 소년이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예요."
그녀는 현빈에게 책을 불쑥 내밀었다.
"받아요. 선물이예요."
"네?"
"서른 번 넘게 읽었고, 그때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했어요. 꿈을 나눠주는 기분으로요. 안 받을 거예요? 사람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되죠."
현빈은 얼떨결에 책을 받아 들었다. 바로 그때 지하철이 멈추고 출입문이 열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안녕! 또 만날 수 있겠죠?"
"어어..."
전화번호를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물을 새도 없었다.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그녀를 보내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남은 건 그녀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듯한 책 한 권과 설명하기 힘든 벅찬 감정뿐.
그녀가 내린 역이 그가 입원했던 병원 근처라는 것을 깨달았다. 간호사이니 밤 근무를 하러 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현빈은 그녀가 준 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떤 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네.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마음은 본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야.”
현빈은 우향에게 받은 질문을 조심스레 다시 떠올려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으로, 깊은 내면에서 그가 원하는 명확한 답이 떠올랐다. 그의 영혼이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간절한 소망의 불꽃이 가슴속에서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현빈이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정확히 일주일 후였다. 퇴근길 지하철에 오를 때마다 현빈은 습관적으로 그녀를 찾았다. 지난 일주일은 그에게 참으로 느리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그 시간대 지하철은 늘 여유로웠고,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던 현빈을 먼저 발견한 그녀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또 만났네요! 늘 이 칸에서 타요?”
그녀의 밝은 얼굴을 보자 현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밝게 웃어준다는 건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걸까,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걸까?' 현빈은 고민하면서 대답했다.
“네. 지금 회사 다닌 지 일 년 정도 됐으니까, 이 칸을 탄 지도 딱 일 년 됐네요.”
“그렇구나! 생각해 보면 출퇴근할 때마다 사람들은 항상 같은 칸을 타는 것 같아요. 저도 이 칸을 자주 이용했는데, 벌써 7년이나 됐네요. 야간 근무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쯤 이 시간에 타거든요.”
“그럼 우리는 일 년 동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서로 몰랐던 거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우연이란 참 신기하죠?”
현빈은 잠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열차는 거친 소리를 내며 어두운 터널 속을 빠르게 달려 나갔고, 주변의 승객들은 대부분 졸고 있거나 스마트폰에 몰두한 채였다.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 참! 책 정말 잘 읽었어요. 돌려줄까요?”
“괜찮아요. 벌써 새 책 다시 샀어요. 빠르죠?”
현빈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밝고 하얀 피부가 발랄한 말투와 생기 어린 표정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가 그토록 열광하는 책의 내용, 정말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 책에 나오는 말들... 우주가 소망을 이뤄준다는 말이요.”
그녀는 현빈의 눈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렇게 한번 해봐요. 제가 하는 말을 따라 해 보는 거예요. '내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어떤 도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느낌을 느껴봐요.”
현빈은 잠시 망설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작은 소리로 따라 해 보았다.
“내가 가진 소망에 대해서 어떤 도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뭔가 무거운 것이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며 숨을 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로 기분 좋은 말이 아닌데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봐요. '내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그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현빈이 조금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따라 말했다.
“내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그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순간, 가슴속에 밝은 희망이 떠오르며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마음에 힘찬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우와! 말 하나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군요!”
“한 번의 말로도 이렇게 바뀌는데, 만약 삶의 모든 순간에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꾸준히 확장해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게요. 간단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데,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요?”
“학교에선 이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저도 우향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덕분에 알게 됐죠. 선생님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 믿으라고 하셨거든요.”
“어? 난 그런 말씀 못 들었는데요!”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가르침이 다 다르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더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인디언 속담에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잘 듣고 마음에 새겨봐요. 같은 말을 만 번 하면 이루어진다!”
현빈은 그 말을 조용히 되뇌어 보았다. 같은 말을 만 번 하면 이루어진다. 반복해서 생각할수록 그 말이 신기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갑자기 현빈이 밝은 표정으로 외쳤다.
“하쿠나 마타타!”
그녀도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 말 알아요! 다 잘 될 거라는 뜻이죠? 그럼 이제 두 말을 합쳐서 외워볼까요?"
"하쿠나 마타타! 같은 말을 만 번 하면 이루어진다. 이제부터 좋은 일만 가득!”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크게 웃었다. 어느새 지하철이 그녀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현빈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그 순간, 한없이 계속될 것만 같던 그녀의 미소가 멈췄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없이 돌아섰다. 그 뒷모습엔 망설임과 단념이 엉켜 있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현빈의 가슴엔 텅 빈 공허함과 씁쓸한 아쉬움만이 가득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우주가 뭘 도와준다는 거야…'
그때 막, 열차는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며 지상구간을 향해 뛰쳐나왔다. 모처럼 맑게 갠 밤하늘엔 은하수가 총총 빛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간절한 소망을 가진 자의 마음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로드시커 외전] 조나단에서 이카루스를 향하여
깊은 밤, 방 안은 벽걸이 시계조차
숨죽인 듯한 적막만이 가득했다.
책을 덮고서, 그제야 편안히 숨 쉴 수 있었다.
갈매기의 비행은 내게 깊은 열망과 전율을 주었다.
『갈매기의 꿈』
작은 책, 짧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단 한 페이지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내 안을 들여다보며,
"너는 누구니?" 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조나단 시걸.
그는 평범한 갈매기 무리에서 이탈했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자유롭게 날고 싶어서.
자신조차 초월하기기를 원했던 갈매기.
그의 이야기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날고 싶었다.
땅 위의 빵 부스러기를 쪼아먹는 무리 속에 있기 싫었다.
돈을 벌고, 명품을 두르고,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며
높이 올라가는 삶.
처음 나는, 그게 높이 날아오르는 건 줄 알았다.
결국 나는 조나단이 아니라, 이카루스였다.
더 높이 날아오를수록,
이글거리는 욕망의 태양에 가까워질수록
밀랍으로 붙인 날개는 녹아내렸다.
나는 그것이 진짜 자유이고,
나 자신을 초월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결국... 나는 추락했다.
갈매기 조나단 시걸이 내게 묻는 것만 같았다.
"넌 대체 어디로 날아가려고 했던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남의 날개를 달고서, 높이 날아오르려고만 했다.
하지만...
과거의 추락이 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조나단도 추방당했고, 외로웠고, 미움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날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럴 것이다.
비록 내 날개는 한 번 부러졌지만,
다시 붙이고야 말 것이다.
밀랍이 아닌, 진실한 의지로, 간절한 소망으로.
가영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녀 앞에서는 위선 가득한 허영 대신,
제대로 날아보겠다는 열정으로 충만하다.
공허한 욕망이 아닌 진실한 존재의 갈망으로.
마음에 깊이 새겨진 길을 찾아 날아오르는...
나는 조나단이 되고 싶다.
그 어떤 제약된 믿음도,
강요된 기준도 두렵지 않은 갈매기.
오직 자신의 길을 향해 날아오르는 갈매기.
그리고 언젠가...
그녀와 함께 날아오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지금 나는
추락한 날개 위에, 다시 꿈을 얹는다.
4장
“연금술의 과정은 물질이 아닌 정신의 변화를 나타낸다.”
- 칼 융
“나 다음 달에 결혼한다.”
민석의 뜻밖의 전화에 현빈은 반가움이 스쳤지만, 머릿속엔 가영과의 답답한 관계가 맴돌았다. 그는 그녀에게 거절당한 이후로 계속 피해 다니고 있었다. 적막한 혼자만의 시간일 때면, 그는 자꾸 내려앉는 듯한 생각들을 떨쳐내지 못해 괴로워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조용한 술집 한 켠에 마주 앉았다.
“제수씨는 못 온 거야?”
“결혼 준비 때문에 일이 밀렸대.”
현빈은 한 모금 들이킨 술에, 지난 일 년이 머릿속에 스치듯 지나갔다.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고통이 다시 선명해질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 지난번보다 얼굴이 한결 편해 보여.”
“별거 없어. 그땐 부자였지만, 지금은 벼락거지거든?”
“거지치곤 말쑥한데. 돈 자랑하는 옷이 아니라 그렇지.”
민석의 무심한 듯한 농담에, 현빈은 고마움을 느꼈다. 사소한 것은 눈치껏 캐묻지 않는 친구,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너도 빨리 장가 가야지.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누가 나 같은 사람하고 하겠냐. 돈도 집도 없는 처지에… 게다가 얼마 전엔 번호 물어봤다가 바로 퇴짜 맞았다.”
“진짜? 어쩌다 그런 용기를 낸 거야?”
민석이 웃으며 물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왠지 나한테 호감 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번호 물으려 했지. 근데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걸로 끝.”
“그걸로 포기해? 너무 쉽게 접는 거 아니냐?”
“뭐라도 내세울 게 있어야 밀어붙이지… 내 처지에 뭐가 있겠어.”
현빈은 가볍게 술을 털어 넣었지만 유난히 쓴 것 같았다. 바닥을 치는 기분이었고, 괜히 술에 의지하는 자신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난 자신감도 없고, 소심하기만 하지. 너야 잘 풀리니까 쉽게 얘기하는 거잖아.”
민석은 조용히 웃었다. 어둑한 조명의 술집 한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민석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결혼 쉽지 않았어. 지금 박사 과정 일 년 차에 수입도 없다고 장인어른 반대가 심했거든. 겨우겨우 설득했지.”
현빈은 그제야 친구가 겪었을 고생을 떠올렸다. 미안한 마음이 밀려와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누구나 자기 고통이 제일 크다고 느끼는 법이니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현빈은 겸연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와 나의 차이가 뭔지 알아?”
민석이 단호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가 더 똑똑하고, 능력 있고, 자신감 있지.”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현빈의 말이 한순간 끊겼다. 같은 시골, 같은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 중학생 때부터 묘하게 갈라진 그 갈림길이 떠올랐다. 민석이 담담히 말했다.
“작은 생각이, 결국 아주 크게 갈라 놓는 거더라.”
"어떤 생각?"
“난 원하는 것에만 집중했고, 넌 원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더 끌려갔던 것 같아. 원치 않는 결과, 실패, 불안, 걱정… 그런 쪽으로 마음이 휩쓸렸잖아.”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누가 일부러 원하지 않는 걸 생각해?”
“다들 그래. 갖고 싶고 되고 싶다면서도, 안 될 생각에 지배당하지. 네가 조금 전 한 말도 그렇잖아. 거절당했으니 끝, 안 될 거라 생각만 하고 더 이상 시도조차 안 해. 결국 스스로 막아버리는 거야.”
현빈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민석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마음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잠재력이 있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그 힘을 불러내서 쓸 수도 있고, 그대로 잠재워놓을 수도 있지."
민석의 말들은 화살처럼 날아와 현빈의 가슴에 단단히 내리 꽂히는 듯했다. 우향 선생의 이야기들도 깊은 내면, 기억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듣고도 잊고, 듣고도 또 잊었었다. 우향도 민석도 가영도, 우주가 끝없이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젠 다시 잊지 않으리라. 기억의 석판에 단단히 새기리라. 몽롱한 정신에 찬물세례를 받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 순간 현빈의 표정이 달라졌다.
“난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겠어. 이젠 원하는 것에만 집중할 거야.”
현빈은 지난 날과 같은 상황을 더 이상 피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거절의 두려움을 극복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겠다!'
선명하고 힘 있는 다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마지막으로 민석이 덧붙였다.
“혹시라도 부정문으로 자기 선언하면 안 돼. 예를 들어 ‘나는 담배를 끊겠다’고 하면, 마음은 오히려 담배를 먼저 떠올리거든. 그럼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겠지. 그러니 정말 원하는 바만 선명하게 말하고, 믿고 행동해야 해.”
현빈은 더 이상 과거의 습관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마음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그의 우주가, 그녀의 우주와 하나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5장 그녀의 사정(1)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향한 묘한 끌림에 조용히 이끌리도록 하라.
그것은 당신을 헤매지 않게 할 것이다.”
- 잘라루딘 루미
가영은 현빈과의 처음 만남을 떠올렸다. 병실에서 그를 봤을 때 꿈 속에서 만났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꿈에서 그의 얼굴을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너무나도 확실했다. 그를 현실에서 처음 본 순간,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바람처럼 훑고 지났다.
그녀는 몇 달마다 한 번씩 같은 꿈을 꿨다. 꿈 속에서 그녀는 어떤 남자와 껴안고 있었고, 서로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 고요의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교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의 마음이 맞닿는 느낌,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느끼는 감각은 몽환적인 아름다움으로 늘 그녀를 눈물짓게 만들었다. 그들은 늘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현실에서 마주쳤을 때,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반드시 이 느낌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렇게 몽상처럼 여겼던 느낌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현빈의 생각에 빠져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영훈이었다.
“응.”
건조함이 묻어 나오는 그녀의 대답.
“뭐해? 나 지금 퇴근하는 길인데. 나올래? 저녁이라도 같이 먹게.”
“으응…… 오늘은 별로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오래된 사람은 이런 점이 참 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외적인 편안함 뒤에는 저절로 속이 드러나는 불편함이 숨어있었다.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다. 너무나 감추고 싶을 때 조차도.
“아냐. 지금 좀 피곤해서 그래. 어제 나이트 근무였잖아.”
“그래? 그럼 따뜻한 유자차라도 마시고 한숨 푹 자.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먹어도 괜찮겠다. 우유 사다 놓은 거 있어? 며칠 전에 보니까 날짜 지난 거만 남아있던데.”
가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발 자기야. 이럴 땐 말을 아껴주는 게 돕는 건데. 지금은 머리가 너무 복잡하단 말이야.'
그녀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삼켰다.
“아참! 한가지만 더. 다음주에 어머니가 올라오신다는데.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하시네. 며칠 계실 거니까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시간 비워놔야 할 거 같아.”
“알았어. 나 이제 좀 쉴게. 끊어.”
그녀는 겨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손끝에서 여운처럼 남은 온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5년을 사귀었고 반 년 전에 약혼한 사람에게서 서서히 마음이 멀어져 간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떳떳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마음의 틈새로 꿈속의 누군가가 운명처럼 비집고 들어오는 일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영훈의 마음은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았다. 언제나 흔들림 없는 태도와 배려, 그리고 듬직하게 그녀를 감싸주는 느낌이긴 했지만, 그의 삶은 교과서 같았다. 항상 시계추처럼 같은 패턴으로 생활했다. 그는 어쩌면 사랑조차도 정형화된 레시피대로 만든 초콜릿처럼 여겼는지도 몰랐다. 그건 처음엔 따뜻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늘 똑같은 맛으로 느껴졌다. 그런 점이 관계를 물리게 만들었을까, 하고 가영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그의 한결같은 마음은 박수를 쳐줄 만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감정은 불씨 하나 남기지 않고 다 타버린 장작처럼, 재만 남은 사랑엔 더 이상 불꽃도 온기도 없었다. 한동안은 노력하면 나아질 거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는 건 없었다. 억지 웃음만 남았을 뿐. 결국 그녀는 그런 자신을, 식어버린 사랑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랑이란 게 오래되면 빛이 바랠 수도 있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오기 마련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저 성격의 차이거나 사랑이 식어버리는 타이밍의 어긋남쯤으로 여기기로 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꾸는 꿈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그저 기묘한 우연으로 가볍게 여겼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이따금 찾아오는 이상한 꿈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었다. 하지만 병실에서 처음 현빈을 보았을 때, 그런 그녀의 생각은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허술하게 쌓아 올린 방어의 벽이, 조용히 스스로 무너진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먼저 반응했고, 그 반응은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그 느낌은 너무나도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그 모든 감각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덮어두려 했다. 그는 꿈속의 남자가 아닐 거라고, 그럴 리 없다고. 그럴 수 없다고. 그래서 그녀는 최대한 다른 환자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하려 애썼다. 그 어떤 감정의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매뉴얼대로 움직였다.
그가 퇴원한 후에도, 병원 시스템에 접속해 그의 신상 기록을 열어보고 싶은 유혹을 여러 번 억눌러야 했다. 전화번호 한 줄조차 그녀에겐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결국에는 겨우 성공하는 듯했고, 그의 존재는 서서히, 희미하게 기억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 지하철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제서야 그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건 마음의 문제도,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운명은 이미, 그녀 안에서 육중한 수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현빈에 관한 그녀의 마음은, 지하철에서 그를 다시 만난 순간 너무나도 쉽게,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열려버렸다. 그의 말투나 눈빛이 계속해서 그녀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긴 시간 쌓아온 이성의 벽이, 그의 한마디와 눈빛에 마치 봄을 만난 눈처럼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약혼자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문제는, 더 이상 현빈의 만남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사랑이 식은 건 현빈과의 만남 이전의 일이었다. 아니면 또 어떠랴, 사랑의 시작과 끝은 서로 다른 리듬으로 다가오는 것을.
가영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조금의 미안함은 느꼈다. 하지만 죄책감은 없었다. 남들이 흔히들 갖는 죄의식 같은 건, 그녀의 마음에 잠시도 머무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신념에 따르면 죄책감이나 수치심은 자기 사랑에 독이 될 뿐이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끌어안는 사람만이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니까.
영훈과 함께한 시간은 분명 소중했다.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잡아선 안 된다고, 그녀는 여러 번 되뇌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감정을 붙잡고 있으면 그 끝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심연의 끝자락일 터였다.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가슴 한 구석은 여전히 먹먹했고, 하나의 물결이 여운처럼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파문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가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영훈과 만남을 이어서 살아가게 될 미래를 조심스레 떠올려보았다. 자연스레 희미한 장면 하나가 저절로 마음에 떠올랐다.
따뜻한 햇살이 드는 거실, 나란히 소파에 앉은 두 사람. 그것은 차분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었지만 어딘가 답답함이 전해졌다. 말라버린 샘물처럼 공허한 느낌. 그녀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가슴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마치 마음속의 낯선 목소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윽고 그 막연한 감정적 부재의 실체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 삶에는 가슴 뛰는 설렘도,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열정과 사랑도 빠져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 보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이번엔 조심스레 현빈과 함께할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콩콩, 콩콩.
가슴이 두근거렸다.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온몸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정해진 미래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불확실성조차도 생기로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음은 호흡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숨이 고요해지면 마음도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짧은 상상과 명상만으로도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더 이상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에 마음을 묶어 둘 이유는 없었다. 마음이 잔잔히 가라앉자 고요하고 깊은 평화가 스며들었다. 마치 긴 밤을 지나 새로운 새벽이 밝아오듯이.
문득 그녀는 오래된 음반이 듣고 싶어졌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LP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치직거리는 아날로그 잡음과 함께, 익숙한 멜로디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비틀즈의 <Let It Be>가 흘렀다. 그 노래는 ‘그대로 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때론 그대로 놓아둘 때 최선의 답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6장
“너의 고통은 외부의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너 자신의 평가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그 평가를 언제든 지울 힘을 가지고 있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민석을 만난 날 밤, 현빈은 늦은 시간까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과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들의 차이에 대해서 구분해 보려고 애썼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였고, 다음날에는 늦게 일어났다. 언제나 늦잠을 자고 깼을 때면 짜증은 습관적으로 올라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민석의 말이 머릿속에서 강하게 울리는 듯했다.
'원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지 마!'
현빈은 자신에게 되물었다. ‘이 짜증이 내가 원하는 것일까?’ 대답은 분명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현빈은 자신에게 또박또박 글씨를 눌러쓰듯이 되물었다.
‘지금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짜증을 내고 기분이 나빠지는 건 습관적인 행동일 뿐, 결코 자신이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임을. 가능한 한 빨리 회사에 도착하는 것임을. 지금은 오직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자! 어느새 짜증은 마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회사에 도착한 뒤에도 그는 일하는 틈틈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그의 내면에 자각의 불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건 새로 피워낸 것이 아니었다. 아득한 과거, 고대로부터 꺼지지 않고 이어져온 불이 다시 타오른 것이었다. 어느 시대든, 어느 인간의 정신이든 환히 밝혀주었던, 그런 불이었다. 이 내면의 질문은 모든 시대정신을 초월하는 본질이었다. 오직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자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비로소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원하지 않는 것들에 습관처럼 끌려다녔는지를. 마음이 평화롭기를 바라면서도, 불안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주의를 뺏기곤 했다.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고 하면서도 원치 않는 것에 휩쓸리기 십상이었다. 그랬기에 늘 과거의 어두운 습관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랬던 그가, 이제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도 그는 야근을 마치고, 평소와 같은 시간에 퇴근했다. 지하철역에 들어섰을 때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한동안 가영과 마주칠까 봐 일부러 다른 칸을 타곤 했던 일. 그것도 결국 원치 않는 생각에 휘둘린 결과였다는 걸, 거절의 두려움에 굴복한 행동이었음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다시 익숙한 승강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망설이던 표정, 흔들리던 눈빛. 그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느낌이 들었다. 힘없이 축 처지는 어깨와 한숨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애써 기억 속의 장면들을 되감아보았다. 그녀가 활짝 웃던 장면에서 정지시켰다. 그녀의 세세한 표정을 찬찬이 살펴보았다. 그녀의 행복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에너지가 솟아올랐고, 용기와 자신감이 뒤따랐다.
'이거 재미있는데?'
그는 그녀의 상반된 두 표정을 번갈아 떠올렸다. 떠올리는 표정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너무나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란, 생각보다 훨씬 유연한 것이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도 있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마침내 그녀의 웃는 얼굴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그리고 자신도 진정으로,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작은 변화만로도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조용히, 하지만 분명히 되뇌었다. 꼭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잔잔하고 평온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움이었다.
그는 익숙한 승강장의 같은 시간의 열차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열차 안으로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가영은 그가 탄 출입문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객차에 승차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가 여태 보아왔던 웃음 중 가장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미소만으로도 그의 가슴이 설레었다.
'이런 게 사랑인 건가.'
“오랜만이네요.”
“우린 늘 지하철에서 만나네요.”
현빈이 약간은 어색한 몸짓으로 가영의 옆자리로 다가가며 물었다.
“앉아도 되죠?”
“그럼요. 누가 맡아놓은 적 없어요.”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그들 사이에 머물렀다. 어색함을 떨쳐내려는 현빈의 몸짓이 서툴렀다.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그러게요. 벌써 반팔 셔츠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으니까요.”
문득, 지난밤 꾸었던 꿈이 가영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현빈과 관련된 신기한 꿈 이야기가 잔뜩 부푼 풍선처럼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너무 쉬워 보이는 것이 싫어 꾹 눌러 삼켰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알 수는 없겠지. 그나저나 이 남자 말주변도 참 없다.'
가영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그녀의 핸드백 속에서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가영은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백을 열어 화면을 확인했다. 발신자명에는 약혼자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망설이던 그녀는 진동벨을 꺼버렸다.
“전화 안 받아요?”
“네. 안 받아도 되는 전화예요.”
“괜히...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는데요?”
“왜요?”
“내가 있어서, 받지 않는 전화가 있다는 게... 좋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고 얼버무리긴 했지만, 정말 아무 영향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잠시였지만 영원 같은 정적이 그들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제 막 흩뿌리는 빗방울들을 연잎이 잔뜩 머금은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무게를 더해가던 그때, 툭.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물방울을 떨구듯, 현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에는 지하철 밖에서 만날까요?”
이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현빈은 내면의 망설임과 싸웠고, 거절의 두려움을 억눌렀고, 정신을 가다듬고 오직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그렇게 마음을 정제하고, 또 정제했다. 그 모든 감정의 응축 끝에 마침내 흘러나온 한 마디였다. 그것은 그에게는 수만 년의 세월을 땅 속에서 열과 압력을 견뎌낸 끝에 탄생한, 투명한 수정과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흔들림 없이 곧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힘. 그녀는 그 힘이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끌어당기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변화는 단순한 표정이나 말투 이상의 것이었다. 그의 확신이 그녀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 거대한 에너지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처음으로 웅장한 태산이 펼쳐진 광경을 마주한 사람이 된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아니, 확신의 힘일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그저 그 큰 에너지에 이끌리듯이 그녀는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럼... 3주 후 주말에 만나요. 그때 주말에 휴무가 있을 거예요. 연락처는 병원에 남겨놓은 그대로죠? 내가 연락할게요.”
두 사람 앞에 새로운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로드시커 외전] 소울메이트에게 보내는 미발송의 편지
현빈,
이 편지는 아마 당신에게 닿지 않을 거예요.
아니, 처음부터 보낼 생각이 없었어요.
단지 내 마음의 결을 꺼내어 한 번쯤 눈앞에 펼쳐놓고 싶었을 뿐이에요.
요즘 나는,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낯선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껴요.
하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다시 만난 듯한 편안함,
또 하나는 손 닿을 듯 가까운데도 끝내 닿지 않을 것 같은 아득함.
그날 저녁, 우리는 아무 말없이 오래 걸었죠.
당신의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잠시 번져 보였어요.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당신 마음의 온도를 느꼈어요.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깊은 비밀과 상처를 품은 사람의 웃음이었죠.
어째서인지 그게, 나를 더 붙잡았어요.
당신은 지금 그것을 내게 말해주지 않지만 언젠가는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그 상처를 치유하고서 성큼 앞으로 나아갈 날을,
조용히 기다릴게요.
나는 예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람을 붙잡은 적이 있어요.
그는 나를 사랑했지만, 끝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진 못했어요.
나는 그 사랑 속에서 조금씩 작아졌고, 끝내 잃어버린 건 나 자신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달라요.
당신 곁에서는, 내가 나를 잃지 않아요.
오히려 조금씩 나다워져요.
그날, 당신이 아무 말 없이 내 손등 위에 손을 얹던 순간이 있었죠.
그 짧은 온기 속에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을 느꼈어요.
마치 오랜 세월을 돌아, 결국 서로를 찾아온 사람들처럼.
그때 알았어요.
당신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소울메이트라는 걸.
아직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건넬 자신이 없어요.
당신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이 모든 고백이 당신에게 짐이 될까 조심스러워요.
그래서 이 편지는 아직은 보내지 않을래요.
당신이 묻지 않은 대답을 내가 먼저 내놓고 싶진 않아요.
언젠가, 정말로 내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그날이 오면
그때 건네줄게요.
그날까지 이 편지는 나만 아는 마음의 서랍 속에 잠들어 있을 거예요.
언젠가 그 서랍이 열릴 날을, 조용히 기다릴게요.
그때, 미래의 어느 날인가,
당신 내게 모든 것을 말해줄 때까지
나는, 항상 곁에서 당신을 지켜줄게요.
가영
7장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안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게 허락하시옵소서...”
- 라인홀트 니버, 평안의 기도(Serenity Prayer)
가영은 현빈에게서 특별한 인연의 느낌을 받았지만,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약혼자와의 오랜 관계 때문이었다. 그녀와 약혼자는 꽤 오랜 세월을 함께해왔지만, 더 이상 그들 사이에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감정은 없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던 걸까? 그건 우유부단함 때문이었을 수도, 지나온 시간의 타성 때문이었을 수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두려워서였을 수도,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뒤섞인 복합적인 이유였을 수도 있었다. 전후 사정이 어떻든, 가영이 그 오랜 관계를 끊고 현빈에게 마음을 돌리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너무나도 우연히 찾아왔다. 마치 계획된 것처럼, 혹은 운명처럼.
가영과 약혼자가 함께 카페에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멈춰버리는 바람에, 약혼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가영은 그의 전화로 급히 통화를 해야 했다. 통화를 마칠 무렵,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보낸 사람은 그녀가 모르는 여자였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메시지를 열어본 가영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었다. 오랜 세월 변함없이 자신을 대해왔던 그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니. 가영은 현빈이라는 존재와의 만남이 운명처럼 느껴졌지만,
마냥 그 감정에 자신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녀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던 바로 그 순간에,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 감쪽같이 자신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가영은 그 자리에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난처하면서도 씁쓸한 감정이 동시에 몰려왔다.
가영은 약혼자에게 차분히 물었다. 어찌 보면 자신 역시 비슷한 처지이기에,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약혼자가 새로운 여자를 처음 만난 시기가, 현빈이 병원에 실려 와 그녀와 처음 만났던 때와 거의 같았던 것이다. 더구나 그가 그 여자와 본격적인 관계로 발전한 시점 또한, 현빈과 가영이 지하철에서 우연히 재회했던 시기와 묘하게 일치했다.
그는 몹시 난처한 표정으로 그간의 일들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조만간 모두 말하려 했지만, 가영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가영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현빈과의 만남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사라졌으니 말이다. 어쩌면 하늘이 도와준 일인지도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진정 운명이 아닐까 생각할수록, 그녀는 더 깊은 확신을 느꼈다.
다시 한번 그녀는 되뇌었다.
Let it be. 때로는 모든 일을 순리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약혼자에게서 뒤돌아 카페를 나서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갑작스러운 사건 하나로, 약혼자와 현빈 사이에서 혼란스럽던 감정이 한 순간에 의미를 잃고 퇴색되어버렸으니.
문득 우향의 말이 그녀의 마음속에 스쳐갔다.
‘참으로 인생을 현명히 살아가도록 돕는 지혜는,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야 할 때와
순리에 맡겨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것이란다.’
그녀는 비로소 그 말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경험으로, 더더욱 절실히.
8장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현빈과 가영이 지하철에서 재회한 지 3주가 지난 후, 장마가 마지막 빗줄기를 뿌리고 사라질 무렵 그들은 다시 만났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둘만이 나눌 수 있는 농담이 늘어갔고, 서로의 미묘한 감정을 자연스레 이해하는 순간들이 쌓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둘만이 함께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장마가 끝난 뒤 찾아온 청량한 여름 하늘처럼,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마치 오래전 헤어진 오누이가 다시 만난 듯 편안하고 조화롭게 지냈다. 둘의 나이는 같았지만, 가영은 종종 성숙한 누이처럼 현빈을 이끌었다. 현빈 또한 그녀의 그런 성숙함을 인정하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요구도 집착도 없이, 존재 그 자체로 감사하며 함께했다. 주로 현빈이 가영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이 많았지만, 가영 역시도 현빈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했다.
과거의 여러 경험으로 인해, 이미 내면의 상처를 치유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문제를 투사하지 않았다. 홀로 있을 때 충만하면서도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릴 줄 알았다. 그런 균형 덕분에 몇 달이 흘러도 그들의 관계는 순조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영은 프랑스에 살던 지인이 귀국했다며 현빈에게 함께 만나러 가자고 졸랐다.
“누구길래 그렇게 들뜬 거야?”
“응. 그 사람 점쟁이야.”
“점쟁이? 갑자기?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한다며.”
“응. 안 좋아하지.”
가영이 유쾌하게 큰 소리로 웃자, 거리를 걷던 몇몇 사람들이 흘낏 돌아보았다. 현빈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갑자기 왜?”
“나는 진짜 점만 믿고, 가짜 점은 믿지 않거든.”
“진짜 점, 가짜 점이 따로 있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존재해. 다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현재의 과학으로 측정되지 않을 뿐이지. 우리 주변에는 물질에 선행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흐름이 있어.”
현빈의 열린 의식이 안테나를 바짝 세우며 물었다.
“에너지의 흐름?”
“응. 우리의 감각 중 촉각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봐. 그 세상에도 바람은 불어오겠지만 아무도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도 느껴지지도 않겠지.”
현빈은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그런 세상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일어날 거야. 나뭇잎과 가지들이 저절로 흔들리고, 창문이 갑자기 덜컹거리고, 달리던 차가 흔들리기도 하겠지.”
“정말 그렇겠네.”
“그게 다 공기의 흐름 때문이고, 그런 흐름을 우리는 바람이라고 부르잖아. 그런 세상에서는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미신이라며 무시하는 사람들로 나뉠 거야. 아주 소수의 현자들만이 바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고.”
“그런데 그게 점하고 무슨 상관이지?”
“우리 인생에도 우주에도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어. 큰 일은 큰 흐름으로, 작은 일은 작은 흐름으로 영향을 주지. 만약 그런 흐름을 미리 읽어낼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
“그것도 참 그러네.”
“어이구, 어떻게 물에 술 탄 듯한 대답만 하냐?”
가영이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자 현빈이 웃으며 대답했다.
“가영 씨가 다 옳은 말만 하니까 그렇지.”
현빈은 가영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며 웃었다. 많은 것을 알면서도 무겁지 않은, 밝고 명랑한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육체뿐 아니라 영혼이라고 부르는 비물질 차원의 에너지가 있어. 흐름은 어느 정도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게 해주거든. 그러니 그 흐름을 읽으면 미래의 흐름이나 영혼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거지.”
현빈은 가영의 말에서 어렴풋이 감을 잡았다. 그는 이미 과거의, 악마와의 만남을 통해 어느 정도는 체득해 왔던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기로 했다. 열변을 토하는 그녀가 너무나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흐름을 읽는 도구면, 카드 같은 거?”
“응. 흔히 트럼프 카드나 화투장으로 점을 보기도 하지. 타로카드니 러시안집시카드라고 하는 것도 들어봤을 거야."
가영의 표정은 점점 더 진지해졌다.
"하지만 이런 도구들은 전부 흐름을 읽기 위한 형식일 뿐이야. 주역에서는 산가지로 점사를 봐. 아주 오래전에는 거북이 등껍질이나 소뼈를 태워서 생긴 균열을 보고 점을 쳤다지. 중요한 건 이 모두가 어떤 물건의 배열이나 형상을 보고 그 배후의 흐름을 읽는다는데 있어. 이건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옛 도인들의 개념과도 닮아있지. 마음이 맑아지면 어떤 형상을 보더라도 바탕의 흐름을 읽는 깊은 지혜가 떠오른대.”
격물치지. 현빈은 우향 선생을 떠올렸다. 가영과 우향 선생의 말투와 모습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가영은 우향 선생의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현빈 자신도 가영의 소개로 우향을 만난 터였으니까.
“와, 가영 씨, 알고는 있었지만 엄청 유식하구나!”
“뭐, 내가 이론에만 좀 강하지.”
가영은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점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흐름을 짚어줌으로써, 정신 없이 바로 앞만 보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끔씩 도움을 받는 건 유익하다고 생각해. 너무 의존하지만 않는다면."
어느새 두 사람은 약속장소인 카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서자,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반갑게 웃으며 가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영아. 여기야."
가영이 여자를 알아보고 언니라고 부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키 큰 여자는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고, 가영과 두 손을 맞잡고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현빈 씨 소개를 깜박했네."
"현빈 씨, 이분은 윤미 언니. 어릴 때부터 우리 옆집에 살던 언니이기도 하고 내 개인 카운셀러이기도 해요."
"서윤미예요. 반가워요."
"김현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빈은 인사를 나누며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화려한 치장 없이도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흔히 떠올리는 무속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뭘 그리 넋을 놓고 봐요!"
가영이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현빈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아무리 언니라도 그렇게 정신 팔리면 나한테 혼나요."
"실례했습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잠시..."
"호호, 고등학생 딸을 둔 아줌마한테 너무 과찬이네요."
윤미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인류학 전공하다가 상징과 신화에 빠져서 이 일을 시작했어요. 타로와 점성학을 통해 사람들 고민을 듣고 도움을 주려고 해요."
현빈은 문득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돈과 로또가 전부였던 물질적인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여행. 자신이 아주 낯설고 드넓은 세상을 여행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여행의 진짜 목적은 뭘까?'
현빈은 이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어도 자신이 진정한 소망을 찾기 위한 질문을 놓치지 않게 되었다.
"자, 그럼 오늘도 카드를 펼쳐볼까요?"
윤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관계의 흐름을 읽어볼게요."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윤미는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후 신중히 카드를 섞었다. 몇 장을 뽑아 테이블 위에 펼쳤다. 카드를 내려다보던 윤미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니, 왜 그래요?"
가영의 목소리에 불안이 묻어났다.
"많이 안 좋은 흐름인가요?"
"음..."
윤미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배열만으로는 확실히 말하기 곤란하네. 다른 덱으로 다시 확인해볼게."
윤미가 다른 종류의 타로 카드를 꺼내 다시 섞고 펼쳤다. 여전히 심란한 표정이었지만, 잠시 후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영의 얼굴도 따라서 어두워졌고, 현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사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했지?"
"다섯 달쯤요. 왜요?"
윤미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어요. 어떤 걸 먼저 들을래요?"
현빈과 가영이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마음은 언제나 나쁜 소식을 더 크게 받아들이는 걸까?
"좋은 소식부터요."
가영이 현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소울메이트예요."
윤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영혼이 아주 깊게 연결되고 얽혀있죠. 아주 오랫동안 함께해온 관계예요. 물론 소울메이트라고 해서 절대 헤어지지 않는 건 아니에요. 평생을 함께한 부부도 결국 한 사람이 먼저 가게 되죠. 하지만 그 연결은 깊고 특별해요."
"정말 신기해요."
가영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그랬구나. 현빈씨를 만나기 전부터 꿈에서 여러 번 봤거든요."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모든 소울메이트가 그런 경험을 하는 건 아니야."
"그럼..."
현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쁜 소식은 뭐죠?"
윤미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소울메이트도 헤어질 수 있다는 거예요. 두 사람은... 이번 생에서는 유난히 일찍 헤어지게 될지도 몰라요."
"얼마나 빨리요?"
"지금으로부터 여섯 달을 넘기지 않을 것 같아요."
“여섯 달……”
가영이 작게 되뇌며 고개를 푹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쓸려 내려와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그런 우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더 안 좋은 소식이 있는데......"
윤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그들은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하루 종일 흐릿하던 하늘이 점점 더 찌푸려지더니 검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창밖으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 없이 허둥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창가 아래로 보였다. 계절의 끝을 알리는 듯한 가을비가 추위를 부르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 헤어지면..."
잔뜩 뜸을 들이던 윤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울메이트로 이어져온 인연 자체가 끝날 수도 있어요. 완전히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이죠."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이런 말 밖에는 해줄 수 없어서…"
가영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심연 같은 어둠에 갇혀 있었다. 고개를 돌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사라진 듯한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무음의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세계가 창백한 빛에 물들었다가 서서히 잿빛 여명이 잦아들었다. 드디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이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미풍은 순식간에 거센 돌풍으로 바뀌었다. 하늘을 보니 저 멀리서 시커먼 먹구름이 폭우를 쏟아내며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짐승처럼 꿈틀거리며 대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가영은 달리고 또 달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숨이 멎을 듯이 거칠어졌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먹구름은 악착같이 그녀를 뒤쫓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지평선 가까이에서 누군가 팔을 크게 휘저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현빈이었다.
"방울을 버려! 어서 그 방울을 버려!"
바람에 실린 목소리가 간절하게 울렸다. 방울? 귀를 기울여보니 가슴께에서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짤랑, 짤랑.
그녀는 목 주위를 더듬었다. 가느다란 사슬에 작은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손끝만 한 방울이었다. 순간 모든 게 명확해졌다. 먹구름이 자신을 쫓는 이유도, 현빈이 소리치는 이유도 방울 때문이었다. 가영은 방울을 움켜쥐었다. 떼어내려다가 멈췄다. 방울은 따뜻했다. 살아있는 듯 은은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보석처럼 투명하고 영롱한 빛이 흘러나왔다. 너무 아름답고 소중해 보였다. 어떻게 이걸 버릴 수 있을까? 손이 떨렸다. 방울을 움켜쥐었다 놓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가슴이, 손이, 온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현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전보다 더 절박하고 간절하게. 하지만 그의 모습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결국 가영은 방울을 품에 꼭 안았다. 먹구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달렸다. 현빈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끝없는 벌판에는 이제, 그녀와 구름과 추격만이 남았다.
가영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두려움이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9장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 구약성경, 아가서
"나 요즘 매일 밤마다 꿈을 꿔."
현빈과 가영은 서로의 스케줄 때문에 3주 만에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가영은 다소 초췌한 얼굴로 나타나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본 현빈은 놀란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화로는 그런 얘기 별로 안 하더니… 얼굴이 많이 힘들어 보여. 지난번에 꿨다는 방울 꿈 때문에 그래?”
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앞에 놓인 커피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전에는 잘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현빈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꺼운 외투에 파묻힌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번화가를 지나고 있었다. 청소부의 비질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낙엽들이 바람에 휩쓸려 뒹굴고 있었다. 높다란 빌딩숲 사이로 드러난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벌써 겨울이 다 됐네…"
현빈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삶은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중소기업이지만 성실하게 일하며 인정받았고, 급여도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영과의 만남이 준 심리적 안정감이 컸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화려했지만 가슴을 찢는 듯하던 파탄의 기억들이 이제는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안정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현빈씨는 아무 걱정도 안 돼?"
현빈은 상상의 나래에 잠겨 있다가 가영의 질문에 갑작스레 현실로 끌려 내려왔다.
"무슨 걱정?"
"이제 봤더니 현빈씨 정말 천하태평이구나."
"뭐가?"
"우리가 헤어진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가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흠칫 돌아봤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타로카드 때문에 그래? 정말 심각하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지 마! 그러면 더 화가 나니까!"
현빈은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눈물을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매사에 밝고 침착하던 그녀였기에 더 크게 놀랐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요즘 스트레스가 많았나 봐. 마음도 몸도 힘들어. 내색하지 않으려다 보니 많이 쌓였던 것 같아."
가영은 마음을 정리하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윤기 있는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며 반짝였다. 그녀는 호흡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눈만 붙였다 하면 꿈을 꿔."
현빈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 꿈은 마치..."
가영이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영화처럼… 우리가 함께 지내온 여러 삶의 모습들이 지나가는 거야. 나는 그 속에서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현빈 씨를 만났어."
"여러 삶?"
"응. 엄청나게 화면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중세 유럽의 어느 왕국에서는 현빈 씨가 용감한 기사였고, 나는 그의 아내였어. 우리는 평화로운 시대에 안정적인 삶을 함께했지. 또 다른 생에서는 척박한 땅의 개척민 부부였어. 거친 자연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싹을 틔우는 작은 희망에도 함께 웃었어.”
가영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생에서 나는 황진이였고 자기는 서경덕이었던 것 같아. 우리는 서로에게 애틋한 시를 주고받으며 평생을 연모했어. 하지만 모든 삶이 아름다운 건 아니었어. 때로는 비극적인 이별을 맞기도 했고, 서로를 오해하고 상처 주는 순간들도 있었어. 그런 화면들을 보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다시 느꼈어."
현빈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지치고 힘든 느낌이 역력했다.
"수백 번도 더 되는 삶을 그렇게 돌아보았어. 꿈에서 깨고 나면 탈진하는 것 같아. 잠을 잔 게 아니라 밤새도록 뛰어다닌 느낌이야."
현빈은 타로 리더가 말해주었던 전생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물었다.
"수백 번이나? 그렇게 많아?"
"우리 영혼은 뭔가 배울 게 남아있는 한은 끝없이 윤회해. 진화하면서 말이야. 수백 번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수천, 수만 번일지도 몰라."
"그런데 꿈속의 장면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어떻게 알아? 그냥 꿈일 수도 있잖아."
가영이 현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물론 증명할 수는 없지. 하지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느낌이 든다면? 나는 내 느낌을 믿어."
현빈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난 아직 잘 모르겠어. 타로 카드에서 우리가 헤어진다고 했다지만, 가영 씨 꿈에서 전생을 봤다고 해서 우리가 꼭 헤어진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현빈의 말에 가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꿈에서 경험한 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녀가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우리는 소울메이트였잖아. 거의 무한한 삶을 반복하며 윤회하는 동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함께 겪어왔지. 그렇게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아왔어."
"그래서?"
"그러던 어느 날, 내 영혼은 이대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삶과 삶 사이의 시간에 다음 생을 계획할 때, 훨씬 더 복잡하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계획을 세웠지."
현빈이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떤?"
가영이 현빈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다른 누군가와의 삼각관계를 설정하고... 그런 상황을 극복해서 서로 간에 더 깊은 신뢰와 사랑을 이루려고 했던 거야."
삼각관계라는 말에 놀란 현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바로 이전 삶에서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아. 하지만 나는 실패했어. 너무 강도 높은 유혹의 상황을 설정했던 탓일까."
"뭐라고? 그럼 결국 가영씨가 바람을 피웠다는 얘기잖아!"
"너무 흥분하지 마. 그 설정은 애초에 현빈씨의 영혼도 동의했던 일이었으니까."
현빈은 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꿈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왜 그렇게 펄펄 뛰고 난리야?"
"그런 건 꿈으로도 꾸지 말라구!"
두 사람은 잠시 티격태격했지만, 심각한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가 이번 생에서 소울메이트를 끊고 완전히 헤어진다는 건 무슨 뜻이지?"
"그건 나도 몰라."
"다른 건 다 알면서 제일 중요한 걸 모른다고?"
"당연하잖아."
가영이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거였고… 우리가 왜 완전히 헤어지게 되는지는 미래의 일이잖아. 아직 꿈에서 보여주지 않았어."
잠시 밝아지던 가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두 사람 사이엔 깊은 적막이 흘렀고, 때마침 카페의 스피커는 우울한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현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을씨년스러운 거리 위로, 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10장
“우리는 꿈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우리의 짧은 인생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가영은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퇴근길에 나섰다. 12월, 아직 본격적인 겨울 추위와는 거리가 있지만 아침 공기는 꽤나 쌀쌀했다. 도심의 빌딩 사이로 떠오른 황금빛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색 롱코트 깃을 여미고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붐비던 출근 인파가 썰물처럼 빠진 거리를 걸어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그녀는 평소 그리 생각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거리를 걸을 때면 다가오는 풍경들을 즐기고 사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불길한 예언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을 다잡으려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마음을 잘 지켜봐야 해. 감정에 휩쓸리지 말아야 해.’ 그녀는 몇 번씩 숨을 고르며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려 했다. 하지만 마음 깊이 뿌리내린 불안은 다시 싹을 틔우고 자라나 마음을 온통 뒤덮곤 했다.
가영은 어릴 적부터 유달리 남들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 아이였다. 말을 막 배울 무렵부터 부모에게 묻곤 했다.
"엄마. 나는 누구야?"
"누구긴. 가영이지. 우리 딸."
"가영은 이름이지, 이름이 나는 아니잖아. 나는 뭐지?"
"엄마. 나는 어디서 왔어?"
"엄마 뱃속에서 나왔지."
"엄마 뱃속에 있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조금 더 자라자, 부모가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임을 깨달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어른에게 물었다.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했다고 하셨죠. 그럼 하느님은 누가 창조하셨나요?"
"선생님. 우주의 끝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어른들은 짜증스레 대답했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질문들은 마치 끊기지 않는 샘물처럼 내면으로부터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가영에게 그런 질문들은 깊은 목마름이었다. 진실을 찾기 위해 내면 깊은 곳에서 갈구하는 영혼의 외침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가족이나 친구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과 『영혼의 동반자』를 읽으며 크나큰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되고 싶었다. 소울메이트를 만나 영혼으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건 그저 ‘동화 같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라며 웃었다.
가영은 몇 명의 남자를 만나보았지만 그 누구와도 영혼 깊숙이 교감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특별한 사람을 만나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런 만남은 없었고, 결국 그 믿음마저 희미해졌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이상적인 걸 바라는 건 아닐까? 현실적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때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이 약혼자 영훈이었다. 다섯 해 동안 그와 안정적인 연애를 이어왔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 영훈과의 만남의 끝자락에서 현빈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현빈을 만나면 어둑하던 그녀 영혼의 방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듯했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깊은 영혼의 안식을 느꼈다. 그것은 '성격이 잘 맞아', '트러블 없이 잘 지내', '티키타카가 잘 돼'와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그녀는 영훈과 만날 때 뭔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달랬다.
'세상에 완벽한 커플이 어딨겠어? 다 맞춰가며 사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현빈과 함께 있으며 확실히 깨달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본래 하나였던 영혼이 둘로 나눠진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예언은 이별의 때를 향해 운명의 시계는 째깍이고 있었다. 가영의 마음은 사랑과 불안, 기진맥진하게 하는 꿈들과 어두운 예언에 대한 신뢰로 정신 없이 흔들렸다. 삶에서 닥치는 문제란 늘 생각하기에 따라 크게도, 혹은 작게도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지금 그녀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조차 혼란스러웠다.
지하철역을 나선 후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향하던 그녀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헤어진 약혼자 영훈이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저 사람까지 속을 썩이는 거지…‘
혼란스럽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피할까도 고민했지만 이내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옛 연인의 집 앞에 서 있는 남자만큼 성가신 존재가 있을까.
"오랜만이야. 그런데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내 근무 스케줄은 어떻게 알았어?"
가영은 이 계절의 바람보다도 더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훈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어색한 두 시선이 이리저리 엇갈렸다. 가끔 지나치는 주민들의 시선이 편치 않았다. 짧고도 긴 침묵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헤어진 지 반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 남자는, 아침부터 갑자기 집 앞에 나타나, 복잡한 남의 속도 모르고 뜬금없이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예전에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친밀했던 시간들이 오히려 더 멀게 다가왔다. 이런 게 남녀 사이라는 거구나… 그녀는 갑작스런 오한에 몸을 떨었다.
"나 밤새 근무하고 퇴근길인 거 알잖아요. 다음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가영은 자기도 모르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거리감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도 밤새 한숨도 못 잤어."
남자는 애써 거리를 좁히려는 듯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가영은 입술을 깨물고 가까스로 입밖으로 새어 나오는 말을 참았다.
"그 여자와는 헤어졌어. 석 달 됐어. 그동안 네 생각 많이 했어. 그건 잠깐의 실수였다는 걸 알았어.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였어. 그러니 이제 그만 나를 용서해줘."
가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미 그쪽을 용서했어요. 우리가 헤어진 바로 그 순간에."
"아냐.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지금 너의 목소리… 그건 용서한 목소리가 아니야."
그의 말은 틀렸다. 현빈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지금, 그녀는 영훈을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영훈은 자신이 믿는 대로 가영을 해석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거야!"
가영은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가 따라올 것 같아 몸을 돌렸다. 순간 영훈이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조여왔다. 분노가 폭발 직전까지 치솟았다. 그때, 그녀의 내면에서 낯선 느낌이 떠올랐다.
‘이건… 전에 있었던 일 아닌가?’
데자뷰였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닌 듯한 기시감. 종종 경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의 존재 깊은 곳에서 오랜, 전생의 영상들이 부글거렸다. 용암이 끓듯이 뒤엉킨 그것들은 일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솟구쳤다. 그것들은 현실의 시야와 뒤엉켜 눈앞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녀의 의식은 점점 더 몽롱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소용돌이가 멈추자 과거의 영상 하나만 선명하게 남았다.
그럴 리 없어!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비틀거렸고, 몸을 바로잡으려 난간으로 손을 뻗쳤다. 놀란 얼굴로 달려드는 영훈의 모습이 그녀의 마지막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가영은 천장만으로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곳이었다. 근무지인 병원의 비어 있는 병실. 하얀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차가운 공기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영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데자뷰처럼 스쳐간 영상들이 떠올랐다. 오래된 필름이 겹쳐 보이듯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낯익은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서로를 견제하는 기운이 병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병원까지 데려왔으니 깨어날 때까지 내가 지키는 게 맞는 것 같군요."
영훈의 목소리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려고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은.
"병원으로 옮겨준 건 고맙네요. 하지만 거기까지 아닌가요?"
현빈의 격앙된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영씨 동료가 나에게 연락해 준 것만 봐도 누가 남는 게 맞는지는 확실한 것 아닐까요?"
가영은 눈을 감은 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머릿속에서는 알 수 없는 영상들의 잔재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과거가 현재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왜 계속 이런 거지? 타로 카드 점괘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 순간, 현빈의 목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가영씨가 깨어나면 본인이 누구를 원하는지 직접 들어보죠. 그러면 모든 게 명확해질 테니까."
영훈이 비웃듯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5년 세월을 무시할 순 없어요."
그들의 대화는 가영의 어지러운 머리와 가슴의 불덩이에 부채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가영은 눈을 번쩍 뜨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들 둘 다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필요 없어! 두 사람 다 나가줘! 혼자 쉬고 싶어..."
그녀의 한마디에 팽팽하던 활시위가 끊어지는 듯, 순간 병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현빈의 얼굴엔 실망과 충격이, 영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현빈에게 그것은 관계의 균열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고, 영훈에게는 희망의 빛이 되었다.
"가영씨……"
현빈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원망이 서려 있었다. 그는 불길한 충격에 휩싸였다. 타로 점괘의 불길한 예언이, 현실에서도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훈이 출입구 쪽으로 돌아서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혼자 쉬고 싶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서 나가시죠."
영훈은 여유를 잔뜩 실은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마치 휘파람이라도 불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현빈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가영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돌아서는 현빈의 어깨가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무겁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것이 현빈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짓이기고 있었다.
[로드시커 외전] 가영의 전생의 선택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윤미는 가영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가을 이후, 자신의 타로 점괘로 인해 그녀가 겪은 괴로움들, 그건 가영의 전생과 그런 과거 일들에 대한 과다한 집착과 믿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용서하지 못한 죄책감 같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일어난 일들이었다고 했다. 그런 선택으로 인해 현빈과 헤어질 뻔했다는 일도, 또 한 달 후에 그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웃으며 청첩장을 내밀었다. 이 모든 해결의 바탕에는 아버지 우향과의 해묵은 화해와 지혜로운 조언이 바탕에 있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가영은 지난 가을, 헤어진 약혼자 영훈을 만나 강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러졌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혔다. 하지만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 마음의 깊은 차원에서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과의 화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자 모든 마음의 괴로움들이 녹아내렸다.
윤미는 가영의 일들을 들으며 타로 카드를 비롯한 점사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 삶의 선택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는 진정한 힘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된 것은 아닐까……
윤미는 가영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19세기 영국, 가영이 전해준 전생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아래에 그들의 이야기를 가영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전해본다. 그들의 이름은 달랐지만 글에서 ‘나’는 가영, 현빈의 전생은 H, 영훈은 Y로 표기함을 전한다.
런던의 겨울은 안개가 사람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는 방식으로 찾아왔어요. 석탄 냄새와 젖은 말발굽 소리가 뒤엉킨 채, 가스등이 번지는 저녁이면 도시는 마치 노랗게 빛나는 유리 속에 잠긴 것 같았죠. 나는 블룸즈버리의 작은 하숙집에 살면서 어느 중견 작가를 도우며 원고 정리를 했고, 저녁에는 미세스 휘트모어가 여는 살롱에 들렀어요. 새 책과 음악, 혁신적인 사상가를 초대하는 모임이었는데, 그곳에서 H를 처음 만났습니다.
H는 말수는 적었지만 단정했고, 무엇보다도 꿈과 계획이 있었죠. 공업 학교를 나와 교량 설계를 배우고, 기계와 강철을 사랑하는 사람. 언젠가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더 아름답고 안전한 교량을 만들고 싶다고 말할 때면 그의 눈동자는 가스등보다 밝았어요. 문학에도 소질이 있던 그는 종종 나의 일을 돕기도 했어요. 우리는 함께 앉아서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함께 지웠죠. 그의 신중한 침묵은 언제나 나를 진정시켰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약속했을 때, 나는 작은 정원을 볼 수 있는 집과 서가에 꽂힌 책의 냄새를 떠올렸죠.
Y는 한 계절 뒤에 나타났습니다. 가을과 겨울이 스치는 회색의 사이에 나타난 그는 동방의 무역으로 자본을 쥔 젊은 사업가라고 했죠. 미세스 휘트모어의 집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 글라스의 표면에 샴페인 거품이 맴돌던 밤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보는 나에게 “당신은 읽는 사람인가요, 쓰는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둘 다요.” 하고 웃었습니다. 그가 웃을 때마다 벽난로의 온기가 더 가까이 오는 것 같았고, 그의 말은 어딘가 즉흥적인 음악처럼 들렸습니다.
H와 Y의 차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었어요. H는 항상 단단하고 한결같았고, Y는 리드미컬한 진동 같았죠. 이전까지 나는 늘 견고한 것을 선택해 왔습니다.
어느 저녁, H는 스리피시스 골목의 실험 공장에서 밤샘을 해야 한다는 연락을 보내왔어요. 실험을 미루면 계약이 미뤄지고, 그러면 우리의 결혼도 기약 없이 늦춰질지 모른다고요. 편지의 문장 하나하나는 논리적이었고 잘못된 부분은 없었지만, 그날 나는 이유 없이 텅 빈 테이블 위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요. 나의 생활은 H와 어울리게 견고했지만, 공허함이 늘 함께였던 것 같아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그리는 마음이었을지도요.
그 주의 토요일, Y가 초대장을 보냈죠. 소호의 한 화가의 비밀스러운 전시회라고 했어요. 그곳은 가늘고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다락이었고, 방 안에는 붉은 코트의 사냥꾼과 비에 젖은 흙냄새를 닮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어요. Y는 그림들 사이를 걸으며 내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에게 진정한 기쁨은 무엇입니까?”
나는 잠시 H의 손을 떠올렸어요. 차가운 강철을 만지는 사람의, 거칠지만 신뢰할 수 있는 손.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다른 것이었죠.
“마음의 욕구를 따르는 것이요.”
Y는 고개를 끄덕였고, 창가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템스강의 물결이 멀리서 반짝였고, 가스등의 빛이 유리에 부서져 들어왔어요. 그는 내 손끝을 가볍게 들어 올렸습니다. 손과 손이 맞닿은 열기. 그는 서두르지 않았지만,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그런 그의 공백은 완전한 나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나는 그 침묵을, 그 열기를, 그런 마음의 욕구를 따랐습니다. 그때의 나는, 분명히 그렇게 스스로 원했다고, 인정합니다.
“나와 함께 떠날까요? 오늘 밤이 아니어도 좋아요. 하지만 오늘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의 말은 제안이 아니라 내 마음의 확인이었어요. 나는 내 심장 소리를 세었습니다. 하나, 둘, 셋. 어떤 삶에선 정원을 가진 집과 안전한 다리를 건너는 행운이 내 몫이겠지만, 이 삶의 내가 느끼는 것은 흔들림이었습니다. 흔들림이 무서웠지만, 동시에 나를 살아 있게 했죠.
“H는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같은가요?”
Y가 물었죠.
그 질문이 내 안에서 오래 울렸어요. 시계탑의 종소리처럼. 그리고 나는 깨달았습니다. 이 선택이 나를 구원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다만 내 마음의 무게를 잠시 다른 방식으로 옮겨놓을 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내 발을 앞으로 내디뎠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 스스로 걸어 들어갔어요.
우리는 소호의 붉은 벽돌 사이를 지나 말이 기다리는 마차 쪽으로 향했습니다. 가스등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 위로 내 치맛자락이 스쳤고, 누군가의 바이올린이 골목 저편에서 어렴풋이 울렸습니다. 마차의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포도주의 향이 흘러나왔죠. Y가 먼저 올라탄 뒤, 손을 내밀었어요. 그 손을 나는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마차가 움직이기 직전, 나는 창문 너머의 밤을 보았습니다. 템스강의 검은 물, 강 위로 늘어진 다리의 아치, 저 멀리 작업등을 켜놓고 오롯이 서있을 H의 그림자. 내가 알고 있던 견고함의 상징이 그곳에 있었어요. 나는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습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창틀을 만지며, 내 안에서 아주 얇은 종이 같은 무언가가 찢어지는 느낌을 들었습니다. 불편하지만 명확한 자각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유혹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임을 너무나 분명히 느끼며…
마차는 코벤트 가든의 소음을 뒤로하고 더 어두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에 맞춰 심장이 박동했어요. Y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그 침묵이 고마웠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 자각은 잔인했지만 더없이 솔직했어요.
어떤 문 앞에 마차가 멈췄을 때, 나는 손을 떼려다 다시 그의 손을 꽉 쥐었습니다. 그것은 도움을 청하는 손이 아니라, 승인을 내리는 손이었어요. 그가 문을 열고 나를 이끌었고, 나는 족쇄를 찬 사람처럼 한 발 한 발 실내로 들어섰습니다. 난로의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고, 벽난로 위에는 장미가 가득한 작은 화병이 놓여 있었죠. 장미의 향이 낯설게 달콤했습니다.
그 밤의 기억은 장면들의 연속으로 남아 있어요. 드레스의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정적으로 가득 차오르던 방의 온도, 가까이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 모든 것이 명백한 동의였고,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외면해 온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으니까요.
새벽녘, 창문 틈으로 회색의 빛이 스며들 때,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Y는 잠들어 있었고, 나는 그의 호흡을 한 번 세어 본 뒤, 내 손등을 오래 바라보았어요. 그 위에는 내가 내린 결정이 잔잔히 남아 있었죠. 내가 원해서 붙잡았던 손, 내가 원해서 내디딘 문턱.
그때 창밖에서 마차가 지나가며 차바퀴가 바위를 긁는 소리를 냈어요. 그 소리에 나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이 선택이 다른 삶에서 누군가의, 어떤 관계의 끝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하지만 나는 그 두려움마저도 내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 밤은 누구의 책임으로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옷을 가다듬고 깃을 올렸습니다. 거울 앞에 섰을 때, 낯선 여자가 서 있었어요. 그러나 그 여자는 나였고, 나의 눈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했죠. 나는 나에게 아주 작게 속삭였습니다.
“나는 끌려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말이 나를 서늘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래도록 한 문을 떠올립니다. 내가 스스로 열고 들어갔던 그 문. 그 문턱을 다시 돌아 나오려면 얼마나 많은 겨울을 거슬러야 할까. 아마도, 몇 생을 더. 그러나 그 밤, 마차의 바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내 선택을 단 한 번도 멈칫거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11장
“인생은 당신에게 묻는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행동으로 대답한다.”
– 빅터 프랭클
가영과 현빈의 연락이 끊어진 지 한 달이 지났다. 타로 리더의 예언이 차갑게 현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쓰러진 가영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현빈을 피하고 있었다. 그의 전화에도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자주 글을 올리던 SNS조차 전혀 업데이트가 없었다. 현빈은 그녀가 다시 옛 애인에게로 마음을 되돌린 것일까 하고 수십 번도 넘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병실에서의 그녀의 표정과 눈빛을 떠올리면 도저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현빈과 가영은 서로를 소울메이트라고 생각했다. 그건 가영에게 더욱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어째서 이별의 예언은 현실로 이어졌을까? 그걸 완강히 부인하던 그녀의 마음은 어째서 돌아서게 되었을까?
그녀와 함께하며 점점 더 안정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던 그의 삶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늘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세상일은 왜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머릿속은 더 복잡하게 꼬여가기만 했다. 마치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쥐가 된 것만 같았다.
가영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왜 나를 피하는 걸까? 답이 없는 질문들에 빠질 때면 무의미한 생각들이 폭주하듯 마음을 잠식했다. 사랑하는 이와 닿지 못하는 갈증은 그를 미치도록 괴롭게 만들었다. 감정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고, 괴로운 시간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흘렀다. 하릴없이 마우스만 딸깍거리던 그는, 문득 민석의 얼굴이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만난 민석의 얼굴은 무척 편안해 보였다. 결혼 후의 안정감이 그를 더욱 성숙하게 만든 것 같았다. 언제나 편안해 보이는 민석이, 현빈은 항상 부럽게 느껴졌다.
"제수씨는 잘 지내고? 신혼생활은 재미가 어떠냐?"
"신혼 재미가 다 뭐냐. 딸린 백수 먹여 살리느라 정신이 없지. 나도 이제 박사 논문 준비도 해야 해서 더 바빠졌고."
"그래도 혼자 살 때보다는 낫지 않냐? "
"그야 물론 그렇지. 누군가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힘이 되더라."
민석의 말에 현빈의 가슴이 움찔했다.
"아기 소식이 들려올 때가 지난 거 같은데?"
"말도 마라. 취업할 때까지는 엄두도 못 내. 그나저나 너는 좀 어때? 지난 번에 잘되니 안되니 하면서 울상을 짓더니."
현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때 네 말 듣고 잘 풀렸었는데..."
현빈은 소주잔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왜 이렇게 세상일이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냐..."
그는 그간 가영과 있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다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민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건 뭐야?"
"내가... 정말... 원하는 거?"
"그래. 네가 정말로 원하는 거 말이야."
민석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에 현빈은 얼음장 같은 냉수를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의식에 묻혔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거짓천사가 너무나 그럴싸하게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면서도 사실이 아니었다. 인간은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겠지만, 한 번의 삶에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매번의 삶마다 단 하나,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을 구해야만 한다. 곧이어 우향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직 이 하나의 생각만을 붙들어야 하네.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만 하네.’
‘그래. 그런 마음으로 가영을 만났었지.’
현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건네주었던 책 속의 문구를 다시 기억해냈다.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가 도와주는 거였다. 이 구절대로 현빈은 그녀를 만났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강렬한 깨달음이 그에게 해일처럼 밀려왔다. 온몸의 세포가 동시에 다시 깨어나는 듯 출렁였다.
"네가 전에도 말했었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라고. 내가 잠시, 또 잊고 있었어. 이제 확실히 알겠어. 내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게 뭔지.”
현빈의 눈빛이 유난히도 밝게 빛났다.
"나는 정말로 가영을 사랑해! 반드시 되찾을 거야!"
현빈의 확언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삶은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으라고. 계속 놓치고 있었나 봐. 이제야 알아차렸어."
민석은 아무 말없이 싱긋 웃어 보였다. 현빈에게 그것은, 민석 자신도 삶을 통해 같은 것을 깨달았다는 듯이 보였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던 현빈에게, 우연히 벽에 걸린 명언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하철역 플랫폼에 걸린 문구였다.
시작과 창조의 모든 행동에 한가지 기본적인 진리가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순간,
그때부터 하늘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 괴테
[*]
가영을 향한 현빈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이 문구는 마치 하늘이 내린 계시처럼, 그의 가슴에 깊숙이 내리꽂혔다. 그는 혼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늘도 움직일 수 있다. 반드시.
12장
“너 자신이 되어라. 너는 지금껏 남의 삶을 살고 있었다.”
- 니체
꽃피는 춘삼월이라지만 아직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릴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급한 담장의 개나리 가지들이 벌써 노랗게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가영에게는 이날이 일요일처럼 느껴졌다. 전날 오후 근무를 마치고, 느지막한 야근을 끝낸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퇴근을 하고, 오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은 대충 우유와 식빵 한 조각으로 때우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역에서 나와 양지바른 길을 걸으며 만나는 개나리의 노란빛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3월초. 현빈과 헤어진 지도 벌써 석 달, 지나간 한번의 겨울이 마치 평생의 겨울들을 보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영훈에 비해 현빈은 상대적으로 연락이 드물었다. 가영은 현빈으로부터 전해지는 연락을 참느라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모른다. 수십 번도 더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그를 다시 예전처럼 만나기에는 혼란이 주는 고통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자주 업데이트 하던 SNS도 더 이상 아무 의미 없게 느껴져 방치한지 오래였다.
“왔니?”
다시 돌아온 봄날을 맞아 화단을 정리하던 우향은 작은 발소리만으로도 가영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잘 지내셨어요? 그리 먼 길도 아닌데 자주 못 들러서 죄송해요.”
“아니다. 어서 들어가자.”
가영은 혼자 사는 홀아비의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한 실내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여백의 미를 살린 실내는 그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구나.”
가영은 너무 쉽게 들킨 속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자신을 추스렀다.
“언제나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가영의 말에서 슬그머니 가시가 돋아났다. 하지만 상처입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 가시는 결국 되돌아와 자신을 찔렀다. 우향은 그저 투명했다. 화살을 쏜다 해도 그를 뚫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들이댄 가시 따위에 우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그 존재의 샘이 얼마나 깊은지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드넓은 바다에 소금 한줌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다 뒤죽박죽 되어버렸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그녀에게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한동안 마음에 갇혀 답답하게 쌓여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내며 울다 보니 비로소 조금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듯했다.
“그동안 여러 꿈을 꿨어요. 절 힘들게 하는 꿈이었죠. 나름대로 잘 이해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꿈의 핵심적인 의미는 도저히 풀리지 않아요.”
그녀는 방울의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향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뜨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꿈에서 방울은 어떤 아름다운 생각의 체계를 나타내고 있어. 영혼의 짝과 같은 생각들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이긴 하지. 하지만 그건 그저 좋아 보이는 것일 뿐이란다. 그것이 서로의 관계에 양념처럼, 향신료처럼 쓰일 때는 빛을 발하겠지. 하지만 그게 핵심이 되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해.”
“그런 생각들이 그저 허구이고 상상일 뿐이라는 건가요?”
“아니. 소울메이트 관계가 일어나지 않고 의미도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게 관계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미래는 현재로부터 비롯되지만 현재가 미래를 절대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아. 마찬가지로 과거도 현재를 완전히 지배할 순 없단다.”
가영은 알 수 있게 되었다. 타로 카드가 이별을 예지하는 건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꿈에서 본 과거생에 대해 스스로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현빈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도 과거의 정보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했던 거였다. 죽은 과거와 타로카드의 해석에 스스로 생명을 불어넣고서 두려워하며 움츠러든 것이었다. 현빈과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우향은 차분히, 그리고 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방울은 우리 전통 무속신앙에 따르면 뭔가를 불러오는데 사용하는 도구란다. 주로 신을 부르지. 요즘 사람들은 뭔가를 자꾸 끌어오려 하지만, 세상의 에너지가 늘 순수하고 밝지만은 않아. 무엇을 끌어들이든 반드시 그에 따르는 대가와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란다.”
가영은 자신이 알 속에 답답하게 갇혀 있다 깨어나는 새끼새처럼 느껴졌다. 우향의 몇 마디 말은 어미새의 부리 같았다. 그녀를 둘러싼 오랜 괴로움의 껍질들이 한꺼번에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비로소 알을 깨고 밝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적 읽었던 데미안의 한 구절을 조용히 읊조렸다. 데미안은 아버지가 권해서 읽은 책이기도 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가영은 자신이 깨고 나온 껍질들을, 과거의 세계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믿음들로 가득한, 하지만 미혹함으로 괴로움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버릴 필요는 없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필요에 따라 취하고 또 버리면 되는 것.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느꼈다. 아브락사스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저 그녀가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가영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에 무겁게 남은 것들을 말끔히 정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가영은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꼭 쥐었다.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매듭을 풀지 않고는 온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고마워요. 덕분에 많은 것들이 해결됐어요. 하지만..."
가영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아빠......"
그녀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말들 하나하나가, 이슬처럼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가영은 어린 시절, 아버지인 우향의 부재를 떠올렸다. 우향이 오랜 세월 전국을 떠돌며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가영에게 꼭 필요했을 때, 그는 지켜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
“아빠는 역시 언제나 현명해요. 이번에도 제가 몇 달이나 풀지 못하던 문제를 이렇게 쉽게......”
그녀는 잠시 울먹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을 고르며 원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평생을 머리로는 이해하려 애썼지만 가슴으로는 용서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늘, 머리와 가슴이 따로인 이중적인 감정은 그녀를 더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녀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더 이상 물러설 자리는 없다고 느꼈다.
“생각으로는 늘 아빠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가족들을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으니까! 이해하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마음은... 감정은... 아빠를 원망하는 마음이 쌓여갔어요. 아픈 엄마와 나를 둘만 남겨두지 않았으면... 아빠를 그토록 기다리던 엄마의 곁에 있어주었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격하게 출렁이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엄마의 임종을 혼자 지키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녀는 마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오열을 터뜨렸다. 우향은 가영의 곁에 앉아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래.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우향의 따뜻하고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가영의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네 마음에 억눌렀던 그 에너지들이 터져 나온 것이 나는 정말 기쁘구나. 이날이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단다."
가영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원망의 찌꺼기들이 눈물과 함께 흘러나간 듯했다.
"세상 일들은 다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늘 네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왔지만 이제야 때가 온 것 같구나. 나도 네 엄마를 정말로 사랑했었어.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내 가슴도 많이 아팠단다."
우향의 눈시울이 잠시 붉어지는 듯했다. 딸인 가영조차도 그 모습을 생경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투명한 목석 같은 그에게서는 잘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다. 반드시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하는 때가 있지. 희생도 따르는 법이야. 하필이면 그 희생이 너와 엄마에게 있었다니, 나도 너무 안타까웠어. 하지만..."
우향은 평안의 채널로 마음을 되돌렸다. 곧이어 그가 다시 투명한 모습을 되찾는 듯했다. 조금은 떨리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너도 나를 이해하는 마음이 반쯤은 있었으리라 믿는다. 너 역시도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니까.”
우향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가영은 온몸이 떨릴 만큼의 강렬한 공명을 느꼈다. 마치 얼음이 녹듯이 마음을 가로막던 경계가 부드럽게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가영의 마음과 우향의 마음은 일순간에 녹아내리듯 하나가 되었다. 나와 너를 가르던 경계는 스르르 녹아내렸다. 자아의 경계를 콘크리트처럼 믿었던 생각은 착각이었다. 경계는 언제든 허물어지는 가벽에 불과했다. 그 순간, 하나 된 마음에 희열이 샘솟았다. 가영은 우향이 되었고, 그의 마음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가영은 마치 아버지의 기억과 감정이 자신의 내면을 통과해 지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그의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것은 찰나일 수도, 영원일 수도 있었다. 의식의 공간에서 때로 시간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개념인지 모른다……
마음은 다시 분리되었고 그녀는 다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지막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향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구도자(求道者)였다. 서로의 길은 달랐지만 둘 다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우향은 젊었을 적, 오랜 세월 진리를 찾아 전국을 방랑했다. 모든 고승과 각자(覺者)들을 찾아다녔다. 또한 오랜 기간 수행 기간을 거쳤다. 결국 그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다른 것을 잃었다. 그것이 가족들의 신뢰였고 지키지 못한 아내의 임종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엄마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긴 했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돈과 성공, 정의, 지식, 인간관계... 그녀의 어머니는 사랑으로 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다.
우향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진리를 찾는 어떤 사람들은 방울이 상징하는 것이 진리의 일부라고 믿고 있지. 하지만 그것이 가장 큰 함정이 될 수 있단다. 그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샛길로 빠지게 되니까. 그 속에서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법이야.”
가영은 마침내 꿈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방울을 던져버려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마음에 굳게 걸어놓았던 빗장을 거두고 용서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몸소 깨우치게 되었다. 용서하고 나니 가슴을 억누르던 큰 돌덩어리 하나를 버린 듯이 가벼워졌다. 집을 나서며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빠.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나도 너무 고맙구나. 마음에서 큰 짐을 내려놓았으니, 그만한 좋은 일이 있을 게다. 마음이 움직이면 현실의 일도 움직이는 법이지.”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요?”
우향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가영은 귀가길의 열차 안에서 현빈과 마주쳤다. 그녀는 이 우연한 만남에 놀랐지만 오히려 현빈의 표정에는 담담함이 서려 있었다. 그건 마치 재회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그런 표정과 단호한 눈빛에 한 번 더 놀랐다. 그건 그녀가 알던 그의 과거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두근거렸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분명한 발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석판에 새기듯이 말했다.
“이제 다시는..."
그의 말들이 그녀의 온몸으로 스며들어 하나가 되었다.
"너를 놓지 않을 거야.”
그녀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
흔히 괴테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으나
,
실제 출처는
W. H. Murray, The Scottish Himalayan Expedition (1951).
[로드시커 외전] 메피스토와 관음의 대화
천상계는 인간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단순히 빛과 음악만 가득한 세계가 아니다. 도서관, 관청, 카페까지, 인간세계의 구조가 모두 반영되어 있다. 다만 그 본질이 좀 더 ‘빛’에 가까울 뿐이다.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근원의 서>에 따르면, 천상계에서 먼저 창조된 사물이 인간계에 투영된다고 한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는 기도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천상계의 작은 카페. 하루 일과를 마친 아발로키테슈바라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마주 앉아 맥주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아발로키테슈바라는 힌두교에서 불리는 이름이며 동양의 불교에서는 관음이라 불린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바로 그 악마적 존재다.
메피스토: (잔을 비우며) 인간이란 녀석들, 참 재밌어. 내가 조금만 속삭이고 도와주어도, 가진 것보다 더 갖고 싶어 안달을 내지. 최근에도 한 놈을 구렁텅이에 몰아넣었어.
관음: (조용히 웃으며) 넌 늘 그런 게 즐거운가 보구나. 하지만 내가 만나는 인간들은… 당장의 도움에는 크게 감동받고 기뻐해.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지. 결국 근본에서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면, 나도 종종 지치고 낙담해. 대체 내가 뭘 한건지 싶어.
메피스토: (비웃으며) 그러니까 내가 늘 이기는 거야. 인간의 본모습은 바뀌지 않아. 욕망은 아주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와 같지. 아무리 뽑아도 다시 돋아나 인간의 마음을 좀 먹는다고.
관음: 하지만 꼭 그렇기만 할까?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듯이, 절망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 그 작은 꽃이 때론 한 영혼의 모든 생명을 지켜내기도 하지.
메피스토: (잠시 생각하다가, 잔을 내려놓으며) 흥, 그럴지도 모르지. 사실 요즘 좀 신경 쓰이는 녀석이 하나 있긴 해. 내가 아주 쉽게 궁지로 몰아넣었어. 가진 걸 다 잃고, 자살까지 시도했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
관음: (눈빛이 달라지며) 무슨 일?
메피스토: 보통이라면 끝났을 텐데, 이 자식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어. 오히려 마음을 붙잡고 나아가는 모양이야. 내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잔을 들며 고개를 갸웃한다). 망가뜨린 줄 알았는데, 다시 일어서다니 (인상을 몹시 찌푸린다).
관음: (잔을 들어올리며) 어쩌면 그의 마음에 꽃을 틔울 씨앗이 이미 자라고 있는 걸지도. 네가 무너뜨렸기에, 어쩌면 더 단단히 뿌리내릴 지도 모르지.
메피스토: (쓴웃음) 씨앗이든 뭐든, 아직은 몰라. 하지만 재미는 있겠군.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두고 보자고.
두 존재의 잔이 다시 한번 부딪혔다.
천상계의 카페, 두 기묘한 신들에게 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들 사이에는 붉고 푸른, 서로 다른 색의 빛이 퍼져나왔다. 천상계에선 늘 그랬다. 존재의 감정이 빛으로 드러나곤 했다. 변하지 않는 컬러의 속성, 신들이 딱 그랬다. 오직 인간들만이 변화의 씨앗을 품었다는 걸, 정작 그들조차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