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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시커[Road Seeker] 3부 영혼의 길

페이퍼북 스페셜 버전 (외전 포함) 통합본

로드시커 3부

영혼의 길을 밝히는 구도자


“자기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깨닫고 그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위대한 은총’은 저절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 오귀스트 로댕


1장


"나는 언제나 악을 원하고, 언제나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다."
- 괴테, 『파우스트』 1부


그 이듬해 봄, 현빈과 가영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배려하는 한 쌍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조화로운 관계에 놀라워하면서도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일 년만 지내봐라’는 말과 달리 일 년이 지나도 두 사람의 사랑과 신뢰는 더욱 깊어졌다. 홀수해마다 위기가 온다던 속설도 삼 년, 그리고 오 년이 지나도 그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관계의 실패를 상대에게서 찾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돌아보지 않는다. 현빈과 가영은 달랐다. 다른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았고, 그런 바탕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좋은 관계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서 비롯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결혼 후, 그들에게도 두 명의 자녀가 생겼다. 밤새 울어대는 아이를 안고 토닥이던 날들,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식탁, 피곤한 몸으로도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순간들. 그 모든 날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경제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항상 함께 고민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들을 처음 만나게 해준 마음의 법칙 — 명확한 목표와 확신,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더하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는 믿음 — 을 따름으로써, 현실의 일들 또한 차근차근 이루어갔다.


결혼 후 십여 년, 가영은 병원에서 수간호사가 되었고, 현빈은 작은 중소기업을 인수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좋은 집을 장만했고, 아이들은 밝고 건강하게 자랐다. 가정은 화목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 행복은 그대로 영원할 것처럼 그들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 날, 현빈은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굽은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아름다운 호수와 댐을 만났다. 햇살이 수천 개의 보석처럼 물 위로 반짝였고, 호수 위로 춤추는 산들바람이 빛들의 향연을 더욱 황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아내 가영과 아이들의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때, 현빈은 댐 앞에서 얼쩡거리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를 보았다. 불길한 예감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댐 앞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안 돼!”

현빈이 급히 외치며 달려갔지만 댐에서는 벌써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균열이 그의 외침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점점 더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었다. 벌어진 틈에서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나왔다.


“너 도대체 뭐야!”

그를 붙잡으려는 순간,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 광기 어린 미소 뒤에 숨은 날카로운 눈빛. 현빈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 얼굴은 바로, 빛 바랜 사진처럼 무의식 깊이 침잠해버린,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다. 그는 악마의 멱살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이 악마! 아직도 내게 남은 게 있어서, 또 찾아온 거냐!”

악마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철판을 긁는 듯한 불쾌함으로 메아리쳤다. 이윽고, 악마는 점점 투명해지더니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현빈은 텅 빈 허공을 향해 주먹 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멱살을 쥐었던 손은 텅 비었고, 가슴엔 분노가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익숙했던, 하지만 마음을 새롭게 다진 이후엔 결별했던, 그런 느낌이었다.


우르르 쾅!

그 순간, 댐이 무너졌다. 검붉은 흙탕물이 굉음을 내며 터져 나왔다. 산이 울렸고, 땅이 흔들렸다. 물은 댐 아래 마을을 향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물에 잠겼다. 가족이, 집이, 삶이, 그가 지켜온 모든 것들이.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든 것을, 그 모든 무너짐을, 그저 멀찍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빈은 억! 소리와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들이 떠올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악마와의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조각칼로 판을 새기듯, 의식의 구석구석을 파헤치는 듯한 고통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우울한 기억과 조금 전의 악몽이 머릿속에서 오버랩 되었다.


“무슨 일이야? 나쁜 꿈 꿨어?”

현빈의 기척에 가영이 깨어나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 일 아니야. 더 자.”

하지만 그는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어 밤새 뒤척였다. 그저 꿈으로만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경험이었다.



악마를 본 기분 나쁜 꿈이 자꾸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을까. 악몽 이후로 그의 사업 매출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몇 달 사이, 고객사의 오더는 계속 줄었고, 일감으로 북적이던 사무실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직원들은 일이 없어 마우스만 딸깍이며 모니터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 사업체는 문을 닫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 가영의 몸도 점점 더 기력이 떨어져갔다. 종합검진을 받아봤지만 아무런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녀 역시 결국에는 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눈 깜짝할 새 일어났기에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나마도 현빈은 최대한 부채 없이 내실을 다지며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고, 여윳돈을 안정적인 투자처에 나누어 두었기에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했다.


현빈은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도 이제 마흔을 넘긴 나이, 악마와의 일은 십 년 넘게 지난 과거였지만 그 얼굴은 잊혀지지 않았다. 그는 악마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괴롭히려는 거야!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철없던 젊은 시절, 악마와 맺은 계약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이 불행을 부르는 존재가 남은 평생을 뒤따를까 봐 겁이 났다. 그는 아내 가영과 아직 어린 두 아이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잘못된 인연으로 모두를 불운 속에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었다.


‘잡는다… 반드시 잡아서 끝장을 본다.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요절을 내리라.’ 그 놈이 자신이 있는 곳을 ‘천계’라 불렀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곳이 천계든 신계든, 뭐라 부르든, 반드시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현빈은 악마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그저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 여행을 다녀오겠다고만 말했다. 아내에게도 악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믿기 힘든 과거 이야기를 꺼내 불안과 걱정을 얹어줄 필요는 없었다.


무작정 집을 나선 후 처음 찾아간 곳은 종교가들이었다. 악령을 퇴치한다는 목사, 신부, 승려들을 만났다. 어떤 이는 ‘당신에게 붙은 악령만 퇴치 가능하다’며 그를 그냥 돌려보냈다. 또 어떤 이는 그를 눕혀놓고 이마에 물을 붓고, 온몸을 거칠게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의 몸속에 악령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내보낸다며 그의 온몸을 멍이 들도록 때렸다. 아팠을 뿐 변한 건 없었다.


특이한 무당도 있었다. 그는 현빈을 관 속에 들어가라고 한 뒤 뚜껑을 닫고 방울을 흔들며 주문을 외웠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향을 피우고, 네 시간 동안 죽은 자 취급을 했다. 그러고는 악령이 떠났다며 거액을 요구했다. 현빈은 한 푼도 줄 수 없다며 자리를 떴다. 무당은 욕설을 퍼부었다.


"삼대에 저주를 내려 벼락 맞아 죽을 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두 달, 석 달…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손에 잡히는 소득은 없었다. 현빈은 특이한 사람들을 찾아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허드렛일과 일용직으로 연명하며 버텼다. 가끔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면, 남은 생을 악마에게 무릎 꿇고 살게 될 것만 같아 돌아갈 수 없었다. 게다가 퇴마사들에게 뿌린 돈도 상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랜만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영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울음을 삼키는 듯한 목소리,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그것의 얇은 껍질은 금세 부서질 것 같았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여섯 살 막내 딸이 매일 밤 아빠를 찾으며 울다 잠이 들었고, 감기가 잘 낫지 않더니 폐렴에 걸려 입원했다고 했다. 첫째 아들은 이모에게 맡기고, 가영은 입원한 둘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니! 왜 그걸 이제야 얘기해!”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사실 그건 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속 깊은 아내가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숨겼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현빈은 딸의 얼굴과 재롱을 떠올리며 웃다가, 또 울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책과 자기비하가 몰려왔다.


“다 내가 못난 탓이야!”

한참을 흐느끼던 그는 하늘을 향해 절규했다.


“신이시여! 어째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그의 마음은 신의 부재와 악마의 장난에 짓눌려, 끝 모를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있었다.

2장


“네 마음속 깊은 곳을 바라보라. 그러면 너는 신을 발견할 것이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노란 은행잎이 두텁게 쌓인, 스산한 늦가을 오후였다. 차가운 바람이 벤치에서 흐느껴 울던 현빈의 어깨를 스쳤다. 그 바람과 함께였을까,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혼자라고 알고 있던 그는,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를 에워싸고 있던 슬픔은 순식간에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제가 참견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일로 그리 괴로워하십니까?”

그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20대 같기도, 40대 같기도 한 모호한 얼굴. 작달막한 키에 둥근 테 안경을 바짝 올려 쓴 모습이 영화 속 해리 포터를 연상시켰다. 동그란 렌즈 뒤로 빛나는 눈빛에는 호기심과 온기가 함께 깃들어 있었다. 무슨 말이든 다 받아줄 것 같은 푸근함,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을 듯한 현자의 기운이 묘하게 겹쳐 있었다.


“내게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자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겁니다…”

그의 인상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던 현빈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십 년 전, 악마와의 인연도 바로 이런 늦가을에 시작됐었다. 혹시 이 남자도 또 다른 악마이거나, 같은 놈이 다른 얼굴로 돌아온 건 아닐지 두려웠다.


“됐으니 괜한 참견 마세요.”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려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누구를 찾고 계신 건 아닙니까?”

현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수만 갈래 실타래가 엉킨 듯 복잡해졌다. 설마 악마처럼 내 속을 꿰뚫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든 속을 떠봐야겠다! 악마라면 내 손으로 끝장을 내고, 아니라면 계속 찾아다니면 그만이다. 차라리 악마였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속아주는 척하다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않은가.


“맞습니다. 찾는 사람이 있어요.”

그 남자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다.


“그 사람이 혹시 새까맣고 작은 아이입니까? 아니면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말쑥한 남자입니까?”

작은 아이, 꼬리까지 있다면 고전적인 악마의 상징이었다. 장대한 남자는 바로 그 놈.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들은 많다.


“혹시 그런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요.”


아무래도 현빈 자신보다는 한 수 위일 것 같았다. 그는 떠보려던 마음을 거두었다.

“제가 찾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죠?”

“그 모습은 딱히 뭐라고 규정하기 힘듭니다. 멋지고 잘 생긴 모습으로 위장하길 좋아하지만 때론 가장 흉측하게 변하며, 가끔은 새까만 꼬리를 달고 나타나는 자이지요. 실체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로 상대방의 악하고 부정적인 마음에서 힘을 크게 얻는 자인 건 분명합니다.”


악마의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 즐겁다는 듯, 그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모습 또한 젊은이와 나이든 사람의 모습을 동시에 드러내는 듯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그 놈을 찾는 걸 알았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저 역시 믿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습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뒤통수에 커다란 혹이 있더군요. 이후로 기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신분증도 없었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모든 과거를 잃었습니다.”


현빈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과거는 없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누군지 분명히 알고 있어요. 나의 깊은 무의식까지도. 그래서 나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기쁨과 확신으로 충만합니다.”


“정말 가족을 찾고 싶다거나, 과거를 되찾고 싶지는 않습니까?”

“아니요. 지금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나는 예전에도 지금과 같았는데, 기억만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제가 악마를 찾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저에겐 남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타심통이라 하지요. 악마가 아무리 자기 모습을 바꿔도 저는 그 마음을 읽고 악마를 찾아낼 수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그쪽 앞에서는 저도 생각을 조심해야겠네요.”

현빈이 머리를 긁적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꼭 필요한 때, 중요한 순간에만 능력을 씁니다.”

“아, 참. 사고로 기억을 잃었으면 정확한 나이도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사고가 일어난 뒤로 정확히 사십일 년이 지났다는 건 기억합니다.”

붉게 물든 석양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현빈은 그의 얼굴을 보며 전율이 일었다. 그의 주변에 흐르는 시간이 인간의 것이 아님을 예감하면서...



그 남자는 기억과 함께 이름조차 잃어버렸다. 그런 그를 세상에서는 무명(無名) 선생이라 부른다고 했다.

현빈은 무명이 이끄는 대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무명은 방 한 칸에 주방이 딸린 원룸에서 지내고 있었다. 실내는 살림이 거의 없이 단출했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가난해 보였지만 소탈한 모습이 오히려 현빈에게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그동안 현빈이 만났던 성직자와 퇴마사들이 탐욕스럽게 부를 누리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현빈이 방안을 살피며 기다리는 사이 무명이 차를 내왔다.

"드세요. 오랜 친구가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에서 캔 약초로 만든 차랍니다. 선생님께도 잘 맞으실 겁니다."

"아이구, 선생님이라뇨. 편하게 호칭하셔도 됩니다. 너무 동안이신 터라 아깐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현빈은 무명의 나이를 얕잡아 보고 편하게 대했던 일이 떠올라 손사래를 치며 예의를 갖췄다. 현빈도 이미 불혹의 나이였지만 무명이 사고를 당한 후의 세월이 사십일 년이라면 족히 그의 연배는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너무 동안이라 죄송할 따름이지요."

그는 허허하며 소탈하게 웃었다.


"그런데 대체 그 놈에게 어떤 일을 당하신 겁니까?"

현빈은 한을 푸는 심정으로 그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들은 후,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녀석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확 잡아서 혼을 내주어야지요!"

현빈이 씩씩거리며 하는 대답에 그가 더 크게 웃었다.

"어떻게 혼을 내주려고요?"


"아, 그거야 뭐,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어떻게든 해야지요! 잡아서 목을 비틀든 허리를 꺾어놓든……"

"녀석이 힘이 아주 세지 않던가요?"


현빈은 말문이 막혔다. 악마는 모든 면에서 월등했다. 복수심으로 들끓는 마음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생각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벽은 높았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놈을 찾을 생각입니까?"

"어떻게든요."

"어떻게든요?"

"네! 어떻게든 꼭 찾아내고야 말 겁니다. 온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대답은 용감했지만 현빈은 많이 지쳐 있었다. 무명과의 약간의 대화만으로도 자기 생각의 약점이 드러나 기운이 빠졌다. 신출귀몰할 악마란 놈을 대체 어떻게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무명은 다시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 호기 하나만은 높이 사 줄만 하군요."


무명이 웃음을 멈추고 현빈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무명의 청명한 눈빛엔 세상 만물을 꿰뚫어보는 듯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타심통이 발현되는 건 아닐까, 현빈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째깍거리던 시계 소리가 잠시 멈추는 듯한 그때, 찰나의 정적을 깨고 무명이 입을 열었다.


"신을 보는 눈을 갖추지 않고서 어찌 악마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보는 눈이요?"


현빈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가 깨어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명의 말에는 정말로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의 직감이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악마가 실재하는 영적인 존재라면 신은 더 크고 넓게 존재할 것입니다. 그것은 편재(遍在)라고도 불립니다. 세상 모든 곳에 신은 존재합니다. 신이 없는 곳을 찾을 수는 없지요.”


“편재…”

현빈의 정신이 한 점으로 모이는 듯 빨려 들었다.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무명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우리는 악마를 불러낼 지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악마적 유혹에 자신을 넘기게 되고 결국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흑마술이라 불리는 거지요. 하지만 세상에 편재하는 신을 보는 눈을 갖추게 된다면 선과 악을 초월한 모든 영적인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악마를 보고 찾을 수 있게 되겠지요."


현빈이 그의 말에 무릎을 탁 치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을 볼 수 있을까요?"

"러시아의 대문호였던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신은 편재하므로 세상 어디에나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을 발견하기 가장 쉽고 가까운 곳은 바로 자신의 내면인 것이지요."


현빈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자신의 내면이요? 그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무명이 잠시 찻잔을 들여다보더니, 마치 그 안에서 무언가를 보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음은 스스로 자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광대합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여기는 부분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빈은 무명의 말을 들으며, 이제는 장인이 된 우향 선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비유를 들어보죠."

무명이 찻잔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맑았던 차가 소용돌이치며 흐려졌다.

"마음이 물과 흙이 섞여 있는 물통이라고 해봅시다."

무명이 찻잔을 더 빠르게 돌리자, 차는 완전히 탁해졌다. 현빈은 그 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선생의 마음은 어땠나요? 한시도 쉬지 않고 통을 흔들어대며 살아오지 않았던가요? 희노애락과 같은 온갖 감정과 생각으로요."


현빈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무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조금 전만해도 공원에서 쓰러져 절규하며 신을 부르짖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순간, 다시 막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막내딸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 아내가 눈시울을 붉히며 밤을 새우는 모습들이 상상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런 장면을 떠올리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목이 메었다.


"이것 보세요."

무명이 현빈의 마음을 읽은 듯,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현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 데도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무명의 말에 현빈은 부아가 치밀었다. 화가 치솟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되물었다.


"아니,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마음이 편안할 부모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현빈에도 불구하고 무명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그럴까요? 아이가 병원에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잠시 잊고 있었던 동안에는 어땠습니까?"

현빈이 순간 멈칫했다. 정말 그랬다. 무명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몇 분간은 확실히 지금보다 훨씬 평온했었다.


"그런데 불편한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마음의 물통이 요동 치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흙탕물이 가득해졌지요."

무명이 손으로 찻잔을 가만히 덮었다. 잠시 후 손을 들어보니 차는 다시 맑아져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이제 알아차리셨습니까?"

현빈은 그제서야 무명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평상시에도, 잠자면서 꿈에서조차 온갖 감정에 울고 흐느끼고 웃으며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있지 않은가! 문득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 마음 속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앉아 있는 걸까? 거대한 욕망의 뱀? 울분과 억압의 지렁이떼? 분노라는 이름의 괴물? 흙탕물이 걷히면 오히려 그런 무서운 것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현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무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마음을 살피면서 두려운 것들을 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단계를 지나면..."


무명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참모습과 근원으로서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말로는 설명할 길이 없군요."


무명은 깊은 내면의 샘물 속으로 침잠한 듯했다. 그러더니 차츰 목석 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형체만 뚜렷한 그림자 같은 모습이 되었다. 자아마저 사라진 듯한, 존재 자체가 옅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현빈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비볐다. 동시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방안 전체가 고요해지더니,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적에 잠겼다. 현빈은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 깊은 침묵 속에서 예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평온을 느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평화였다. 마치 그것은, 무명의 깊은 내면의 평화에 주변이 감응하는 상태인 듯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명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번화한 도시의 뒷골목에 위치한 원룸이기는 했지만 이상할 만큼 깊은 적막이 감돌았다. 무명이 눈을 감은 채로 말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닦고 또 닦아서 아주 미세한 마음의 흐름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도 악마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친 물질의 차원보다 훨씬 더 미세한 것이니까요."


현빈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방금 전 경험한 그 고요가 여전히 잔상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분명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현빈은 무명이 안내하는 대로 내면의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말이 여행이지 수행이나 다름없었다. 현빈은 당분간 그와 함께 암자에 머물며 개인적인 지도를 받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 현빈은 막내딸이 기적적일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무명과 함께 고요히 앉아 마음을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신기하게도 그는 가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점점 더 줄어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마음을 향한 여정의 시작은 그에게 새로운 빛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3장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여름을 지나 무수한 계절이 그렇게 흘러갔다. 현빈은 세월의 기약도 없이 그렇게 암자에 머물렀다.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또 살피고, 고요함을 밝히며 일어나는 미세한 흐름들을 지켜보았다.


아내 가영에게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그녀도, 장인인 우향도 모두 구도자였기 때문이었다. 우향은 '자네까지 그리 될 줄은 몰랐네'라면서 너털웃음과 함께 응원의 말을 전했다. 너무나 다행히도 가영 역시도 일상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또한 간호사였기에 현실적인 기반을 다지는데 능숙했다. 이런 이유로 현빈은 더더욱 자신의 수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세월이란 마주볼 땐 지겨울 수 있지만 돌아볼 땐 찰나와 같다. 얼마만큼의 세월을 인내하며 견뎌내야 한다는 무명의 언질이 미리 있었다면 이 같은 수행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수행이지 고행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순간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그러다 가끔, 대나무의 마디를 뚫는 듯한 고비가 찾아왔다. 무명은 온전히 집중하는 법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흔히들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그런 건 제대로 된 집중의 십 분의 일도 안될 겁니다. 온전히 집중하게 되면 평상시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변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삼매’라 부릅니다."


현빈은 먼저 어떤 대상에 집중할지를 정해야 했다. 돌, 나무 그루터기, 땅에 떨어져 있는 식물의 열매 등 적당한 크기의 정지된 사물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집중조차 쉽지 않았다. 집중한다고 마음먹으면, 평소의 온갖 잡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몸은 산속 암자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도심 한가운데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계절에 맞게 땔감을 구하고, 밥을 지어먹고, 빨래를 하고, 산속을 걸었다. 일상의 노동 외에는 좌선밖에 할 일이 없었기에 그는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여름밤이면 소쩍새 소리, 낮이면 계절마다 들려오는 온갖 새소리들도 마음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었다. 자연 속에서 마음은 저절로 비워졌고, 비움은 집중의 힘을 끌어올렸다.


어느 날 문득, 현빈은 툇마루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맑게 갠 청아한 가을 하늘, 부슬부슬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현빈은 텅 빈 마음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지복을 즐기고 있었다. 얼굴에 은근한 미소와 함께. 때마침 무명이 산책에서 돌아왔다. 현빈은 은근한 희열 속에서 그것을 깨지 않으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가… 쨍쨍한데… 비가 내리네요."

무명이 그의 말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

"비가 오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비인가 보지요."


나중에 무명은 그것을 천안(天眼)이라고 표현했다. 제3의 눈이 열리기 시작하는 초기 징조였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잘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면 됩니다.”

무명은 현빈을 격려했다. 그제서야 현빈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일곱 살쯤. 그가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양지 바른 담벼락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날은 맑았고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아이의 마음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친구와의 번거로운 약속도,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던 투명한 마음. 아이가 바라보는 맑은 하늘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맑은 날의 보슬비는 아이가 좀 더 크고, 열 살 무렵이 되자 사라졌다. 그렇게 그 일은 그의 기억에서 퇴색되었다.


무명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런 걸 보는 건 아니라고 했다. 수행에 맞는 몇몇 사람들이 타고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만 한다면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났다. 현빈이 툇마루에 앉아 풀밭에 놓인 바위에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바위 주변의 풀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불규칙하게 퍼져 있던 잡초들이 마치 인조잔디처럼 가로세로 줄을 맞추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것들은 쫙 펴진 천처럼, 초록색 스크린이 되어버렸다. 현빈은 자신이 눈 뜬 장님이 된 것처럼 느껴져 적잖이 당황했다. ‘어? 이런?’ 살며시 신음을 뱉으며 마음이 흐트러지자 스크린은 사라졌고 정상적인 시야로 돌아왔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다시 풀들은 같은 패턴을 이룬 후 초록색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눈, 귀, 코, 혀, 피부, 우리 몸의 다섯 가지 감각에는 각각에 해당되는 의식이 있습니다. 보통 기절을 하게 되면 모든 감각 의식들이 한꺼번에 다 꺼지게 되죠. 하지만 명상이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이 각각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끄고 켤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초기상태를 경험하신 거지요. 눈의 의식이 꺼진 겁니다."


무명의 설명이었다. 뭔가 더 생각났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깊은 삼매에 들면 다섯 가지, 모든 감각이 다 꺼지게 돼요. 그때는 지극한 행복의 느낌이 듭니다. 몸을 상하지 않고도 마약의 몇 백 배 환희의 상태에서 마음먹는 만큼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또 인도의 요기들처럼 체온을 조절하고 맥박을 거의 정지한 상태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죠. 하지만 그런 능력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명이 현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때가 된 것 같군요. 자리를 옮겨야겠어요."


그들은 산속의 암자에서 강가의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 단계의 수행에 필요한 곳이라 했다. 이번에는 강물이 현빈의 수행을 위한 방편이 되었다.


"흘러가는 강물에는 어떤 깨달음이 있나요?"

현빈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무명은 그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리 알고 얻으려 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생각의 앎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하면서 알게 되실 겁니다."

강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던 이전의 수행은 그나마 쉬운 편이었다는 걸, 현빈은 깨달았다. 드넓게,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잠깐 동안은 마음을 평온히 다독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초점을 맞출 포인트를 찾기는 힘들었다.


며칠 동안 구름이 짙은 날이 계속되었고 소득은 없었다.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지루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강물처럼 흘렀다. 강의 흐름은 고요했으나 어딘가 초점을 잡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소란스러웠다.


그렇게 또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여느 날처럼 대기가 맑은, 태양이 높이 솟아오른 시간이었다. 파란 하늘엔 뭉개구름이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렀다. 현빈은 평소처럼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캠핑의자를 펴고 앉았다. 5월의 햇살이 따가운 정오 무렵이었다. 산들바람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듯 스치고 강물에 닿을 듯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하늘거렸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태양을 지나는 순간, 강물에 은빛 물결이 펼쳐졌다. 너무나도 드넓게, 아름답게 빛나는 윤슬이 그 모습을 활짝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다이아몬드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듯 강물에 윤슬이 흩뿌려졌다. 현빈이 윤슬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수많은 윤슬들이 현빈의 마음에 훅- 하고 쏟아져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그는 무수한 빛조각들을 마음에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강 위에 펼쳐진 보석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그저 반짝이는 빛들이 아니었다. 무수한 빛들은 하나의 거대한 빛덩어리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듯이 그 빛과 하나가 되었다. 그의 마음 속 그늘, 수없이 세워져 있던 벽들에 빛이 스며들었고, 벽은 녹아내려 사라졌다. 그의 마음은 결국 하나의 빛이 되었다. 그 빛은 점점 더 확장되어갔다. 그것이 내면 깊은 곳의, 근원의 빛을 일깨웠고 더욱 강하고 밝은 빛이 되어 마음을 통째로 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졌고, 인식되는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나'라는 경계조차 완전히 녹아내리자 우주는 단 하나의 거대한 빛이 되어 춤을 추듯 너울거렸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오직 환희와 하나된 우주의 마음만이 빛날 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빈은 빛의 황홀경에서 깨어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드문드문 반짝이는 윤슬, 파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들바람과 나무들... 모두가 그대로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어느 선사의 말이 떠올랐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말이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지나간 일들이 모두 일장춘몽, 길고 길었던 꿈처럼 느껴졌다.



현빈은 얼마간의 시간을 참고, 또 즐기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명과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무명은 언제나처럼 입가에 미소를 띄고 물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현빈이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나 큰 것을 보았고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을 보았습니다.”


무명이 유쾌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 악마를 찾으셔야지요.”


현빈은 싱긋 웃으며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무언의 미소가 오갔다.


4장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반 년 이상 현빈 내면의 빛은 지속되었다. 처음처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깊은 여운으로 지속되었고 내면적 변화도 함께 남았다. 그는 일상 속에서도 누구보다도 평온했으며 사랑과 여유로움으로 충만했다.


현빈이 현실로 복귀한 후의 어느 화창한 가을날, 현빈은 민석과 은행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찻집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둘이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다."

민석이 현빈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 이후, 언제부턴가 빛을 잃은 듯하던 친구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유난히 생기 있고 맑은 빛이 도는 얼굴이었다. 산에 들어가 수행한다더니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고 짐작했다. 내심 반가웠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래. 그동안 참 많이 바빴지. 전보다 더 보기가 힘든 것 같아. 취업했다면서?"

현빈이 커피잔을 들며 물었다.

"그래. 반도체 쪽으로 가게 됐어."

"화학공학 박사학위 받더니?"

"교수 쪽으로도 알아봤는데 하늘의 별 따기였지. 그냥 취업했어.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쌀이라잖아. 대우도 좋고 전망도 밝으니까."


"한다던 연금술은 어떻게 됐냐? 나노 기술 쪽으로 생각한다더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해서..."

둘은 함께 소리 내서 웃었다. 현실과 이상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통해서였을까.


"산에 들어간다던 일은 어떻게 됐어?"

민석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민석도 어릴 때부터 진리를 찾는 것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늘 그런 주제의 책들을 탐독했고 바쁜 생활 속에서도 현실에 적용해보려고 애썼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친구가 갑자기 수행을 한다고 산속 암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교차했었다.


"응. 할 만큼 하고 나왔어. 답을 구했지. 말로 다 하기는 힘든데..."

현빈은 친구를 위해 나름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그의 깨달음에 의하면 우주만물은 거대한 하나의 흐름 속에 있었다. 궁극의 흐름 속에는 또한 수많은 작은 흐름들이 있었다. 따로 떨어진 흐름이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흐름들이 서로 이어져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각각의 흐름들은 개성을 가지고 있고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다고 했다.


민석은 공학도답게 여러 가지 이론들을 떠올렸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어. 미국의 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츠는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했지. 카오스 이론의 나비 효과라고 해. 삶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 흐름이라면, 어쩌면 우리들의 우연한 작은 움직임이 커다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현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바람을 타고 은행잎 하나가 카페 안으로 날아들었다. 은행잎은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은행잎 위에는 작은 곤충 한 마리가 웅크리고 붙어서 죽은 척하고 있었다. 곤충은 광택이 나는 녹색으로 덮여 있었다. 민석이 귀엽다는 듯 벌레를 이리저리 살폈다.


"무슨 벌레지?"

궁금해하는 민석에게 현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해주었다.

"그거 딱정벌레야. 우리딱정벌레."

"너희 딱정벌레?”

“아니. 딱정벌레의 한 종류야. 우리딱정벌레가 그 종의 이름이야."

민석이 현빈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 곤충 박사 됐어?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딸이 곤충을 너무 좋아해서. 함께 다니다 보니 알게 됐네."


그때 유리창 너머로 낮은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카페 앞 주차장에 초록의 둥근 차체가 천천히 멈춰 섰다. 폭스바겐의 녹색 비틀이었다.


"와아!"

민석이 탄성을 질렀다.

"왜? 뭔데?"

"녹색 비틀! 비틀이 딱정벌레라는 뜻이잖아. 게다가 녹색이라니! 이거 엄청난 동시성인 걸?"


"동시성?"

"응.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라고 하지. 정신분석 심리학자인 칼 융이 이야기했어. 그가 어떤 환자를 상담하고 있었대. 그 환자가 금색 풍뎅이에 관한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그때 창문에서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금색 풍뎅이가 있더라는 거야.”


민석이 팔짱을 낀 채 상체를 탁자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라고 해. 인간의 정신과 외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신비로운 끈이나 마찬가지지.”

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경험에 비춰봐도 이해가 돼. 정신과 물질이 함께 어우러진 세계의 본질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경계를 정하기 힘든 흐름이니까. 서로 이어져서 신호를 주고받는 일이 생소한 것도 아니지.”


말을 끝낸 현빈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 봄, 인수를 검토하던 회사가 있었어. 결론이 안 나서 ‘어떤 표지를 보여달라’고 마음을 모으고 잠자리에 들었지. 꿈에서 특이한 파란색 간판이 자꾸 깜박이더라. 다음 날 현장에 갔더니, 오래된 창고 간판이 딱 그 색이었어. 결정적인 단서가 됐고, 인수한 회사는 좋은 성과를 냈어.”


“정말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건 아닌 것 같아.”

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애들은 어때? 잘 크지?”

“그럼. 첫째는 벌써 자기 진로를 찾아서 한 길 진득하게 파고 있어. 근데 하필 컴퓨터 쪽이라 벌써부터 밤샘하고 난리야.”

“둘째는? 어릴 때 정말 귀여웠는데. 본지도 오래됐네.”

“여자애가 곤충에 미쳐서 맨날 산으로 들로 밖으로만 나다녀.”

현빈이 살짝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에는 애들을 키운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번에 몇 해 떨어져 지내면서, 또 내 마음을 비우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어. 나는 그저 애들이 원하는 대로 지원만 해주면 충분하다는 걸 알았어. 울타리만 쳐주는 거지. 나머지는 그 영혼들이 알아서 하는 거야. 아이들은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고 부모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나온 영혼들이니까.”


“너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민석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죽마고우로서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듯한 마음이 들 때도 많았다. 같은 나이지만 내심 동생처럼 느껴지는 친구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랬던 친구가 달라 보였다. 친구가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크게 성장하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달려가는 거인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길을 응원하면서 단단한 악수를 나눴다. 방향은 달랐지만 자신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 길을 걷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믿었다.


현빈은 인생의 매 순간을 주의 깊게 살폈다. 삶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도 그의 마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청명한 마음은 분별심에 흔들리기보다 직관의 흐름을 따라 진중하게 움직였다. 세상에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일상적인 사건들 하나하나에 모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격물치지라 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어지러운 마음과 함께 매순간의 일상을 주의 깊게 보지 않기에 놓치고 스쳐 지날 뿐이다.


일상의 사물을 눈여겨보고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더 높은 단계라면, 꿈이 보여주는 상징은 누구든 활용할 수 있는 쉬운 단계다. 그래서 현빈은 꿈을 꾸면서 경험하는 상징들을 주의 깊게 살핌으로써 현실적인 일들에 자주 활용하곤 했다. 중요한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할 때, 그는 성급하게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 원하는 질문에 정신을 집중하고 잠들면 꿈에서 그 해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무의식은 우주와 소통할 수 있고, 우리는 잠을 자는 동안에 의식과 무의식의 문이 열려 그런 정보들을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오랜 수행으로 청정한 마음을 가졌기에 현실적 측면들에 대해서도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다. 다시 적절한 중소기업을 인수했고 차근차근 키워 나가면서도 재물에 대해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합당한 만큼의 재물도 자연스레 쌓여갔다. 이것은 노자와 장자가 강조한 무위(無爲), 즉 행위자가 없는 행위이고 결과에 대한 집착 없는 일처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일이 순조롭고 쉽게 성취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위기의 상황들이 닥쳤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일들에 휩쓸리지 않고 차근차근 지혜롭게 정리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현빈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종종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과거를 떠올리곤 했다. 누구도 쉽게 경험할 수 없었을 법한 많은 일들이 짧은 영상으로 압축된 듯 뇌리를 스쳤다. 그러다 그는 젊었을 때 좋아했던, 때늦은 첫사랑인 여인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살짝 놀랐다. 그녀의 이름이 뭐였더라...그래, 소연이었지. 그리고 당시의 자신의 모습도 함께 떠올라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철없는 청년이었던가.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자신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빛과 하나된 깨달음 이후, 그는 비상한 집중력이 생겼다. 혼란스러운 일들 앞에서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또한 마음을 먹으면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볼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존재들에 연연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장난친 악마를 찾지도 않았다. 그는 그들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사춘기 시절의, 문학소년으로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섭렵했다. 그는 서가 앞으로 다가갔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 그리고 아내가 건네주었던, 보물을 찾아 자신의 길을 걷는 산티아고… 명작들의 주인공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그는 책들을 뽑아 어루만지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모든 책들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고, 그는 그 이야기들을 자신이 직접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부활.

그는 문득 부활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정말로 자신은 정신적인 부활을 겪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죽은 육신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닌, 정신의 재생이었다.



5장



시간이 흘러, 현빈은 크게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큰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모든 존재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있었기에 그의 노력들은 더 큰 성공으로 돌아왔다.


더더욱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어느 날, 그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20대 철없던 젊은 시절 돈과 물질적 가치만 밝히며 방탕하게 보낸 세월, 악마와의 만남과 거짓된 성공, 그리고 추락. 스스로 생명을 버릴 뻔한 잘못된 선택. 아내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은 마음의 법칙. 그리고 무명 선생과의 만남으로 이룬 참된 자아의 실현.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그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이룬 결과들… 많은 일들이 찰나의 기억으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그 모든 파란만장했던 일들이 돌아보면 한 순간의 꿈만 같았다. 더 이상의 여한도 집착도 없었다.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왜 사냐건 웃지요.’ 시 한 구절만으로도 그의 입가에 충만한 미소가 번졌다. 시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귀천(歸天).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구나.’ 죽음을 앞두었다고 생각하니 그의 마음은 더더욱 편안해졌다.


그의 눈 앞에는 싱그런 초록빛의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강가의 시골 농가를 리모델링한 별장의 테라스에 앉아있기를 좋아했다. 그곳은 종종 아름다운 윤슬과 함께 그를 명상의 깊은 평화와 희열로 데려다 주곤 했다.


그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때였다. 희뿌연 안개와 구름이 먼산 허리를 감싸 안고 촉촉한 이슬비가 내리는 상쾌한 오후였다. 갑자기 하늘이 새까맣게 어두워지더니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그’가 서있었다. 장대한 체격과 늠름한 자세, 젊고 잘생긴 얼굴도 옛날 그대로였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다.


“오랜만이군, 친구. 그간 잘 지냈는가? 자네도 꽤나 늙었구만. 희끗희끗한 흰머리와 주름이라니…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 나한테는 눈 깜짝하는 동안 지나간 시간 같았지만 말이야!”


현빈도 처음에는 흠칫 놀라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이미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이내 안정을 되찾은 그가 대답했다.


“그렇구먼.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야.”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네. 그동안 여러 인간들을 망쳐 놓았지. 너무 쉬운 일이었어. 그런데 자꾸 자네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찾아와봤네. 지난번엔 꿈에 나타나느라고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던 게 아쉬웠었지.”


놈의 말투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는 현빈을 보고서 오히려 악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악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어이! 이거 보라구! 지금은 상황이 좋아졌다지만. 과거를 떠올리면 화가 나질 않나?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울 텐데? 내가 얼마든지 다시 훼방을 놓을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런 악마의 반응에 대비된 현빈의 반응은 더더욱 차분해 보였다. 그는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마저 띄울 정도였다.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걸세. 안 그래도 마침 과거를 회상하던 중이었다네. 지금 나의 모습을 보게. 나는 자네 덕분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 하지만 자네가 준 시련 덕분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어. 결국 나는 큰 흐름을 따라 내 영혼의 길을 걸었어. 진정한 강함이란 영혼의 길을 따르는 데서 생기는 법이야. 자네 공이 컸다네.”


현빈의 말을 들으며 악마는 점점 더 풀 죽은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현빈은 더욱 단단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솔직히 한 번 생각해 보게. 자네는 정말로 자신이 악마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자네 덕분에 헛된 것에 집착하는 나 자신을 떨쳐냈다네. 허울뿐인 성공에 안주하려는 나 자신을 버리고 변화될 수 있었지. 나는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고, 참된 영혼의 길을 걸어서 진정한 성공에 이르렀어.”


“그만! 이제 그만해! 너는 희한한 방식으로 나를 고문하고 있어!”

악마의 소리치는 입술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머리를 양 손으로 감싸고 온몸을 웅크린 채 바닥을 굴렀다. 현빈의 말이 악마를 괴롭히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악마의 반응에 현빈은 웃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말을 계속해나갔다.


“나는 이제 자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네. 자네는 나를 도운 신의 사자일지도 몰라. 너는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하게 하는 존재지. 악마가 아닌 천사일지도 모른단 말일세.”


바닥에 웅크린 악마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자네 말이 맞아. 많은 인간들이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을 가지고 혼란스러워하지. 나 역시도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네.”


말을 이어가는 악마의 모습이 점점 더 초췌하게 변하며 그 특유의 번들거리던 빛이 사라졌다. 어느샌가 늠름한 젊은이 같은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새까맣고 꼬리 달린, 추한 악마의 모습만 남았을 뿐.


“대체 나는 뭔가? 내가 방해했던 많은 인간들이 인생을 망쳤지. 그들 중 일부만이 자네처럼 되었다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도 내심 혼란스러웠어. 어째서 나의 의도와는 달리 훨씬 더 나아지는 인간들이 있느냔 말이야! 도대체 나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일까, 아니면 악마의 탈을 쓴 천사일까?”


“난 너의 이름을 알아.”

현빈이 그런 악마의 모습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메피스토펠레스.”


이름을 들은 악마는 괴성을 남기며 자취를 감추었다. 몰려왔던 먹구름이 조금씩 물러가고 있었다. 그의 자취가 사라진 자리엔 밝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쳤다.



“내 인생에서 악마들을 몰아내면 천사들마저 도망가지 않을까 두렵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Duineser Elegien)』


에필로그


아주 짧은 순간, 아니 어쩌면 영원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빛 알갱이들이 그의 영혼의 전체를 관통하는 듯했다. 미처 다 떠올리지도 못할 것만 같은, 머나먼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밑바닥까지 일일이 훑고 난 뒤에야 현빈은 눈을 뜰 수 있었다.


잠깐 동안, 어리둥절하던 그는 그곳이 어디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든 영혼이 마땅히 거쳐야 할 곳.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다시 돌아왔구나!’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먼 여행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있었던 끔찍한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생명은 스스로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선택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그때, 그는 자살을 선택한 이들이 감당해야 할 미래를 보았다. 다행히도 악마의 농간으로 선택했다는 정상이 참작되어 다시 이승으로 되돌려 보내졌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의 길이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중간쯤 커다란 문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문의 뒤편은 위를 향한 계단으로 이어졌고 그곳은 또다른 세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많은 영혼들이 줄지어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은 문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곳에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현빈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것을 지켜봤지만 육중하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자 문열기에 실패한 영혼들은 실망한 표정과 축 쳐진 어깨로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현빈은 어쩐지 사람들을 따라 걸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다른 영혼들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곧 거대한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옆에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을 만한 거울이 걸려있었다.


그는 문득 오십 년도 더 된, 빛 바랜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젊은 시절, 한 바텐더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문의 거울에 관한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으로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은 겉보기엔 일반적인 거울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어릴 적, 젊을 적, 그리고 노숙한 지금의 얼굴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듯한 묘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드드드’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의 뒤에 줄 서 있던, 또 문을 지나쳐간 주위의 영혼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기쁨과 놀라움이 교차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문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섰다. 갑자기 온 우주의 오케스트라가 한자리에 모인 것처럼 큰 소리로 팡파르를 울렸다. 쭈뼛거리며 서있는 그의 직감에 메시지가 내리 꽂혔다. 문이 열리는 일은 전 우주를 통틀어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고 영혼이 다음 단계로 올라서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소식이었다.


계단은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다는 듯 저절로 움직였다. 그는 자동적으로 다음 세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제 돌아왔는가? 환영하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옆에 서있는 것은 우향이 아닌가!


“아이구! 장인어른!”

현빈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아니, 이 사람.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있으면 안 될 데라도 있다는 말인가?”

우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직 지난 생에서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영혼으로서의 모든 지난 생들의 기억이 잘 나지는 않겠지. 바로 이전의 생에서나 자네와 내가 장인과 사위 사이였지만 항상 그랬던 건 아니라네. 영혼의 차원에서는 모두 형제나 같은 셈이지.”


“이제 오셨습니까?”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무명이었다.


“아니, 무명 선생님!”

현빈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무명은 그가 수행을 마치고 헤어진 후에는 직접 볼 수 없었다. 다만 간접적인 소식에 의하면 현빈이 죽기 얼마 전까지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건재하다는 소식만 접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소식 들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뵙습니까?”

무명은 여전한 얼굴로 그저 싱긋이 웃고 있었다. 옆에서 우향이 대신 대답했다.


“이분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네. 천사이시지.”

“네?”

현빈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이분은 여기에도 계시고, 지상에서도 계시고, 음… 또… 지상에서도 여기 저기에 계시다네……”


우향의 말에 현빈은 문득 메피스토펠레스를 떠올렸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도 있고, 진짜 천사도 있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의미가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악마의 모습을 가장한 천사도 있겠군요?”


무명의 이름을 빌린 천사가 대답했다.

“세상에서는 나누기를 무척 좋아하지요. 한 그루의 나무가 뿌리, 줄기,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닌 것처럼, 근원의 차원에서 모든 존재는 하나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나와 너를 나누듯이 선과 악도 나누었습니다. 사실은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습니다. 모두가 변화해가고 발전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천사의 말은 너무나도 청아하게 울렸다. 그것은 목소리가 아닌 근원의 소리였다. 애써 집중하지 않아도 소리와 뜻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히듯 입력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때론 선이 악의 역할을 하고 또 악이 선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현빈님도 이미 충분히 경험하셨지요. 사람들은 길하고 복된 결과만을 바라지만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더욱 크게 성장하는 법입니다. 세상에 진정한 길흉화복이란 있지 않은 것이지요. 진짜 악마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친구들은 아직 자기 정리와 공부가 덜 된 존재들이지요.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과 경험을 통해 배움이 쌓이면 그들도 훨씬 더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현빈은 무명 천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작은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 영혼들은 정말 지옥에 가게 되나요?”


현빈의 질문에 우향과 무명이 함께 껄껄거리며 웃었다. 우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상상하는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어디선가 잘못 와전된 이야기를 듣고 온 모양이구만.”

“그럼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 길을 따라가서 도착하게 되는 곳은 어디죠?”

“그들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된다네. 진정한 자신의 길을 걷는데 소홀했기 때문이지. 지옥이라……”

우향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자네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네. 세상으로 되돌아간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지 못한다면,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들은 진흙탕처럼 욕망과 분노로 가득한 세상을 뒹굴다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내려가기를 끝없이 반복하겠지. 그들에게는 그런 세상이 지옥인지도 모르지.”


우향은 현빈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한동안의 가이드 역할을 맡았다고 했다. 현빈이 주변을 유심히 살피던 중 우향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선 뭘 하면서 지내죠?”

“이 사람! 세상에서 하던 버릇이 달라지지 않았구만! 힘든 여정을 마쳤으니 당분간은 좀 쉬도록 하게. 지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옆에서 빙긋 웃고 있던 무명 천사가 시계를 보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급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달려나가며 중얼거렸다.


“정말 인간이 부럽다니까!”




[로드시커 외전] 인간, 무한한 성장의 존재 - 천사가 인간을 부러워하는 이유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천국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디나 다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지 뭐. 그곳도 사람 사는 건 마찬가지일 거야.’


신기하게도 천국에서의 생활 또한 지상에서의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천국’이라 불리는 만큼 이곳의 사람들은 훨씬 더 순수했고, 거짓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영혼’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적절하겠지만 말이다.


또한 지상에서의 환경을 구성하는 질료가 물질인 반면 천상에서의 환경을 구성하는 질료는 훨씬 더 순수한 빛에 가까웠다. 나는 손을 뻗어 곁에 있는 건물의 벽을 짚어보았다. 물질의 감촉과는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은 물질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순수한 빛의 진동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하게 마음을 먹으면 통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자면 너무나 큰 에너지의 소모가 따랐다.


지상의 물질계와는 유사하면서도 또 다르다. 어떤 관점에서는 물질조차도 가장 투박한 빛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 E=mc2란 공식에서 볼 수 있듯이 물질은 결국 에너지로 변환 가능한 것이며 에너지는 빛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서 빛은 상황에 따라 입자이기도 파동이기도 한 것 역시도 마찬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상인들, 특히 특정 종교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천국에서의 생활도 지상에서의 삶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면이 많다는 점을 꼭 강조하고 싶다. 천국에도 지상에서의 건축물들, 개념들, 사회구조, 사람들의 직업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천국 또한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인간 영혼의 성장에 따라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거나 하위 층으로 강등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다시 지상인으로 퇴출될 수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거동에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천국이 지상 세계와 다른, 천국이라 불릴 만한 이유가 뭐가 있냐고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결정적인 차이로 천국에는 질병과 노화가 없다. 아무도 아프지 않고 늙지 않는다. 지상인의 삶에서의 가장 큰 괴로움 이 늙고 병드는 것인데 그 큰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천국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또한 천국에는 태어남의 괴로움이 없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 뿐, 모두 어머니로부터 ‘좁은 문’을 통과해서 태어난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태아의 출생의 괴로움은 산고의 50배에 달한다고 한다. 그에 반해 지상에서 죽음으로써 영혼이 지나는 여정은 빛의 터널을 지나 영계를 통해 천국에 도달하게 된다. 어떤 체계의 용어를 빌리자면 어머니의 자궁에 잉태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을 ‘태생(胎生)’이라고 하면 그러한 과정 없이 출생하는 - 나타나는 - 것을 ‘화생(化生)’이라고 부른다.


나는 여기서 생노병(生老病)의 괴로움이 없음을 강조해서 언급했지만 천국에서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에도 죽음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나의 스승이기도 한 무명 천사를 만났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의 깊은 차원의 수행도 없었을 것이고, 나는 평생을 악마의 농간에 빠져 세상을 떠돌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영혼의 길을 찾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삶들을 낭비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도 무명 천사와의 만남을 위해 마주 앉은 탁자 위에는 지상에서 내가 좋아했던 꽃이 꽂힌 화병이 놓여 있었다. 천국에서는 꽃조차 시들지 않았다. 항상 신선한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대신 이곳에서의 수명이 다한 존재와 교감하는 꽃은 얼마 못 가 시들어 죽게 된다고 한다. 그것이 그 존재가 천국을 떠날, 죽음에 이를 ‘징조’라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인간 영혼의 진화와 성장에 대해 수없이 많은 궁금증들이 해결되었다. 물론 아직 모자란 것도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는 천국에서 무명 천사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던진 말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물어보려 벼르다가 이번 만남에서야 제대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천사님. 전에 하셨던 말씀 기억나세요? ‘정말 인간이 부럽다니까!’라고 하셨죠.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너무 궁금해서요.”


무명 천사가 대답했다.


“현빈님도 아시겠지만 천사는 인간을 돕기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악마는 어떤가요? 직접적으로는 인간에 해를 주려하지요. 결국에는 이런 부정성을 극복하면 그 또한 성장의 디딤돌이 되지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명 천사의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천사와 악마의 의식은 고정된 패턴에 가깝습니다. 그건 강박이고 집착이지요. 선천적으로 주입된 프로그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패턴에서 전혀 벗어날 수 없는 건 아닙니다만….”


무명은 말끝을 흐렸다. 평소의 그 답지 않은 어조였다. 자신의 태생적인 한계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이 전해졌다. 이 또한 속을 완전히 감추기 힘든 천국의 파장의 특성이었다. 무명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많은 인간들 역시도 그렇습니다. 자기의식의 고정된 패턴을 파악하지 못하면 굳게 잠긴 변화의 문을 열고 나아가기란 쉽지 않겠죠. 그러나 깨어난 인간, 자신의 의식을 강하게 자각하는 인간들만이 강박적인 내면의 프로그램을 해체하고 무한히 성장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명의 말을 들으며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벅차올랐다. 지금까지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온 모든 여정들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질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마음의 힘을 터득하고서, 근원적 빛의 깨달음을 얻고 첫 번째 천국에 도달한 나였다. 하지만 앞으로도 더더욱 나아가야 할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여정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방향은 너무나도 뚜렷함을 느끼고 있다. 그건 나 자신을 가득 채우는 사랑,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넘어 온 우주를 가득 채우는 사랑, 그리하여 나 자신의 경계조차 완전히 녹아서 사라질, 경계를 넘어선 사랑의 방향임을.




[로드시커 외전] 천국의 도서관에서 만난 괴테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육중한 돌계단은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여긴 도대체 몇 층까지 있는 거지…”


현빈은 습관적으로 숨을 골라야 할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숨은 차지 않았다. 아, 이곳은 현실세계가 아니었지! 순간적인 깨달음이었다. 이 도서관은 단순히 층을 쌓은 건물이 아니었다. 물질세계가 아닌, 천국의 도서관. 각 층은 하나의 세계였고, 올라갈수록 더 깊은 사유와 의식의 장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드디어 발걸음을 멈췄을 때, 눈앞에 넓은 홀이 펼쳐졌다. 천창을 통해 눈부신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 밝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마음은 한없이 안온하고 포근했다. 그 신비로운 빛 속에서 한 인물이 거대한 창가에 앉아 있었다.


현빈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낯선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를 보는 순간 그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들이 현빈의 인식에 메시지처럼 내리 꽂혔다. 그렇게 그는 그 얼굴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은빛으로 물든 머리칼, 날카로운 눈매,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원고 뭉치. 그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눈빛이 마주쳤다.


“괴테… 선생님입니까?”

그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대가 여기까지 왔구나.”


유동적인 에너지와 정보의 교환이라는 천국의 특성으로 인해 괴테에게도 현빈의 정보가 전해졌을 터였다.

책상 위에는 파우스트의 원고가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새하얀 깃펜이 놓여 있었다.



현빈은 천천히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는… 살아 있을 때, 악마와 거래를 했습니다.”


괴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고정했다.

“이야기를 해보게.”

“그는 처음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제게 복권을 맞게 해 주고, 힘을 주고, 여자와 명예를 주었죠. 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마지막엔… 그는 악마임을 드러냈습니다.”


괴테는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고백을 이해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파우스트를 다시 보는 듯하구나. 그도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누리고 싶어 했다네. 그 순간 메피스토펠레스가 찾아왔지.”

“그때 제게는 공허만이 남았습니다. 돈도, 힘도, 사랑도… 결국 허망하더군요.”


괴테는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악마를 머리에 뿔 달린 괴물로 상상하지. 그러나 메피스토는 그보다 훨씬 교묘하지. 그는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그림자야. 우리 안에 내재된 탐욕과 분노를 부추긴다네.”


현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면… 저 역시 제 안의 악마와 계약한 셈이군요.”

“그렇다네. 메피스토는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 불러내는 그림자다. 네 욕망이 그를 불러냈고 붙잡아 두었다. 결국 스스로가 만든 파멸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실체가 없다는 뜻은 아니라네. 인간의 내면에는 커다란 창조성이 깃들어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그 마음의 그림자가 실재적인 존재로 현시하는 거야. 그렇게 악마는 재창조되는 거라네.”


현빈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괴테의 목소리가 더 단호해졌다.
“늦게 깨닫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끝내 깨닫지 못하는 것이네. 추락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지. 파우스트가 죽음의 순간, 천상의 힘에 의해 구원받았던 이유는, 그가 마지막까지 의미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괴테는 원고를 덮으며 말했다.
“나는 인간을 이렇게 보았다네. 인간은 스스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그 길에 반드시 어둠이 있다. 악마와 거래한다는 것은, 결국 어둠과 손을 잡는 것. 하지만 그 어둠을 마주하지 않고는 빛도 알 수 없지.”


현빈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괴테의 눈을 응시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서, 궁극의 빛과 하나 되고 지금 이곳 천국에 올 수 있었으니까요.”


괴테도 역시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천국에서 마주하는 눈빛 속에서는 크나큰 정보의 교감이 있었다. 현빈의 지난 일생, 그리고 수행의 깊이가 괴테의 영혼에 전해졌다.


“아… 자네는…”


괴테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날 때,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보았던 빛을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에 “좀 더 빛을!”이라고 외쳤던 그 빛이 현빈의 영혼 속에 살아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보통의 물질계의 빛이 아니었다.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깨어난 자의 빛, 물질 우주에서 빛나는 별과 태양의 근원인 영적 태양의 빛이었다.


괴테는 그 빛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저 죽을 때 잠시, 그리고 천국에서 거주하게 된 이후 간간이 스치듯 만났을 뿐이었다. 그 얼마나 열망하던 근원의 빛이었던가! 그런 빛을 바로 이전 생에서 현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이 영혼은 그 깊은 곳에 거룩한 빛을 품고 나타난 것이다.


괴테는 부러움과 동경의 마음을 담은 듯한 말을 이어갔다.


“자네에게 메피스토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겠구먼. 그는 더 이상 자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야. 숭고한 영혼의 빛은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니까. 내면의 그림자인 메피스토가 자리할 곳은 없지.”


괴테는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세계는 수많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인간의 세계는 그 세계대로, 또 이 천국 역시도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지. 자네와 나는 둘 다 인간계를 졸업하고 이렇게 천국의 첫 번째 세계로 들어섰지만 앞으로 올라야 할 더 많은 세계들이 있다네. 그리고 결국에는……”


괴테는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지만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결국에는요?”

“가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거기에 대해서 내가 미리 말하기는 힘들지. 나 또한 끝을 본 입장은 아니니까.”


현빈은 괴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느껴온 터였다. 세상에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아니, 말로 전하는 순간 왜곡되는 것들이 있음을.


두 영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악수를 나눴다.

둘은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서로의 갈 길이 다름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괴테는 펜을 쓰는 길이, 현빈은 깊은 명상의 길이, 그들 앞에 높여있음을 각자가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악수에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더 한층 밝은 빛을 발하며 비추었다. 마치 그들의 만남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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