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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시커[Road Seeker] 1부 욕망의 길

페이퍼북 스페셜 버전 (외전 포함) 통합본

로드시커 Road Seeker

- 길을 찾는 사람, 악마와 마주한 한 인간의 서사




프롤로그


이것은 내가 지켜본, 한 인간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욕망의 길, 마음의 길, 영혼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빛과 하나가 되었다.
이제 나는, 당신의 길을 지켜보려 한다.
그 끝에서 마주할 당신은 어떤 존재일까…

- 무명




로드시커 1부

욕망의 길을 달리는 이카루스


“고통이 제시하는 의문들에 답하기 전에 고통을 제거한다면,
당신은 그 고통과 함께 있는 자아를 제거하는 것이다.”

- 칼 융



1장


“세상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얻는 것이다.”
- 오스카 와일드, 『이상적 남편(An Ideal Husband)』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현빈은 오늘만큼 이 말을 자주 되뇌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말이 기적처럼 힘을 발휘해 주길 바랐다. 그가 가진 것 중 믿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그러니 그는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를 붙잡듯, 오직 이 말 한마디만 붙잡고 있었다.


거리에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고, 네온사인의 불빛은 흐트러진 시야 속에서 요동치듯 번졌다. 지하철역 출구를 나와 소연의 집을 향해 걷는 그의 발걸음은 떨리다 못해 풀린 듯했고, 가슴은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축축한 대기는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토해낼 듯 끈적거렸고, 그의 시야는 희미한 안개에 둘러싸인 것처럼 둔해져 있었다. 머릿속은 오직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은은한 향기가 그를 감쌌다. 그 존재는 마치 강력한 마취제처럼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몇 달 전, 학교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 시험기간이라 자리가 부족해 도서관에서는 번호표를 나눠주었고, 그와 그녀는 너무나도 우연히 일주일 사이 세 번이나 나란히 앉게 되었다. 첫날, 그는 그녀가 옆에 앉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현실과는 다른 먼 세계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오뚝한 콧날, 수려하지만 절제된 옷차림, 은은하게 스치는 향기까지, 그의 마음은 거대한 자석을 향하는 철 조각처럼 그녀에게 이끌렸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그를 알아본 듯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그것만으로도 그의 속은 타들어 갔다. 세 번째 만남에서 그는 이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믿었다. 캔음료를 건네는 그녀의 상냥한 손길, 따뜻한 눈빛, 환한 미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녀의 정보를 알아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이소연, 유명 대기업 계열사 사장의 외동딸이었다. 학교 안에서도 이미 유명 인사였고, 아버지가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배경은 금세 드러났다. 그 사실은 현빈에게 복잡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운명처럼 크게 느껴졌던 인연이, 이제는 감히 다가설 수 없는 거리로 멀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그는 소연의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길가의 꽃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그는 그녀의 나이와 같은 스물네 송이의 붉은 장미꽃다발을 샀다. 안개꽃을 곁들이라는 꽃집 주인의 권유에 가격은 더 올라갔다. 꽃을 사본 적이 없던 그는 계좌 잔고가 바닥나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렇게 비싸…’ 대학 시절, 그리고 졸업 후에도 어떻게든 대출 없이 버텨왔지만, 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부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돈만 있었더라면…’ 그는 그렇게 흙수저인 자신을 원망하며 소연의 동네로 들어섰다.


그곳은 적막이 감도는 부유층 주택가였다. 고급차들이 늘어서 있었고, 높은 담과 대형 정원을 갖춘 저택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속에서 그는 한없이 왜소하고 초라해졌다. 손에 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저장된 그녀의 번호를 누를까 수십 번을 망설였다. 결국 그는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장미꽃다발을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축 처진 어깨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돈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거겠지.’ 빗줄기가 거세졌지만 그는 뛰지 않았다. 세상과 자신에게 복수라도 하듯 빗물에 흠뻑 젖고 싶었다. 가슴 아린 감정이 빗물처럼 흘러내렸고, 눈앞을 가리는 물방울을 소매로 훔쳤다. 그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분노가 뒤섞인 빗물이고 눈물이었다.


지하철역 쪽으로 향한 그는, 젖은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꽃집 옆의 작은 복권가게에 들어섰다. 안에서는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뉴스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저 뉴스 좀 봐. 강도 전과자가 로또 1등에 당첨됐대. 참 세상 웃기지.”

현빈은 지갑과 주머니를 뒤져 잔돈을 꺼냈다.

“로또 자동 하나 주세요.”

TV 속 형사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형사 생활 15년에 복권 4등도 안 됐는데, 강도 놈이 1등이라니? 이게 말이 돼요?”


현빈은 그 말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복권의 숫자만 바라봤다. 연속된 번호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속 번호는 잘 안 맞는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는 복권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게 1등만 되면, 스포츠카를 몰고 그녀에게 고백하러 갈 수 있을 텐데.’


비 오는 밤거리, 복권, 그녀의 미소, 그리고 대문 앞에 남겨둔 장미꽃. 무거운 절망과 한없이 가벼운 희망이 교차하며, 그의 마음을 고문하듯 흔드는 밤이었다. 그의 세상에서, 우주는 그렇게 돈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2장


“부는 좋은 종이지만, 나쁜 주인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현빈이 쫄딱 젖은 채 지하철역을 나섰을 때, 비는 이미 그쳐 있었다. 아직 10월이었지만, 젖은 옷 위로 스며드는 바람은 매서웠다. 집까지는 빠르게 걸어도 15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어깨를 움츠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몸보다 더 추운 것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집 앞까지 갔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섰다는 자괴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추운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그는 화들짝 놀랐다. 습기 가득한 밤공기를 가르며 허공에서 울린 듯한 음성이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웬 남자가 인기척도 없이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허공에서 들려온 것처럼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190은 족히 넘어 보이는 장신에 회색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 입은 사내였다. 잔주름 하나 없는 얼굴은 가로등 불빛 아래 반들거렸고, 널찍한 어깨에 몸매는 조각상처럼 날렵했다. 그의 입가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묘한 위압감을 풍겼고 저음의 목소리는 뼛속까지 울리는 듯했다.


“바람도 찬데 옷까지 쫄딱 젖었으니 춥긴 하겠지. 그러게 오르지도 못할 나무에 마음은 뭐 하러 두나?”


오르지 못할 나무? 순간, 현빈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미행? 감시? 설마… 해결사? 부잣집 외동딸과 엮인 건달 하나쯤 처리하려면 이런 놈들이 제격일 테지. 그런데 왜 혼자일까? 혹시 다른 놈들은 집 앞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붙잡히면 어떡하지? 몇 대 맞고 끝나는 걸까? 아니면 높은 신분을 좋아한 죄로 쥐도 새도 모르게…


그의 상상력은 꼬리를 물고 질주했다. 어릴 적부터 만화와 영화에 깊이 몰두한 매니아였고 이런 상황을 가만히 넘길 리 없었다. 상상이 과열되고 생존 본능이 폭주했다. ‘도망쳐야 한다!’ 그는 돌아서서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공을 다루는 운동엔 젬병이었지만 달리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상대가 선수 출신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골목을 돌아서는 순간, 쿵!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부딪히며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들자 그 사내가 앞을 막고 서 있었다. 분명 외길만 내달려 왔는데 어떻게 앞질러 왔을까? 샛길조차 없는 길이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현빈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다시는 안 그럴 게요. 죄송합니다. 포기하겠습니다!”

“뭐 하나 지금? 쇼는 그만하고 일어나. 나도 바쁜 몸이다. 빨리 처리하고 가야 하니까.”


‘처리’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손가락이라도 잘라 가려는 건 아니겠지…


“이 멍청한 녀석!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누가 손가락을 잘라 간다고 그래?”


그가 버럭 소리치자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마치 그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어떻게 아셨어요? 생각만 했을 뿐인데…”

현빈은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일렁이던 짜증이 사라지고, 다시 잔잔한 미소가 돌아왔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요원도 아니고, 부잣집에서 사주 받은 깡패도 아니고, 네 손가락을 잘라갈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마치 선언하듯 위엄 있는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천사다.”



3장


“행복은 욕망을 충족하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을 다스리는 데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


“나는 천사다.”


그 말이 귓가에 울렸을 때 현빈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큼 황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순히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엔, 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어딘가 현실과는 미세하게 어긋난 듯한 존재, 그래서 더 비범해 보이는 기운이 풍겼다.


‘진짜 미친 사람인가… 아니면…’ 흠뻑 젖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현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무슨 천사가 정장 차림입니까?”

“천사라고 꼭 흰옷만 입으란 법 있어? 요즘은 우리도 스타일 챙긴다네.”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키득거렸다.


“날개는요? 날개 없잖아요.”

“걸을 땐 접고 다닌다네. 괜히 날개를 달고 다니면 사람들도 놀라고, 털도 빠져서 귀찮아.”


현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의 농담은 설득력이 있었다. 바로 그때 골목 저편에서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면접이라도 마친 듯 정장 차림의 여자가 다가오더니,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천사를 힐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지나쳤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저만 보이는 건 아니네요.”


현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사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도 있다네. 물론 너 같은 녀석한테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기절이라도 했을 걸?”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 눈빛만은 서늘하게 빛났다.

“믿기 어렵네요. 천사라면… 무슨 증거라도 있어요?”

“보여주지. 나의 권능을.”


그는 근처 짓다 만 빌라의 공사장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벽돌 더미에서 하나를 집어 들고 양손에 힘을 주자 순간 시간이라도 멈춘 듯 주변이 모두 얼어붙었다. 이윽고 그의 손아귀에서 둔탁한 갈라짐이 있었고, 벽돌은 산산이 부서져 조각조각 흩어졌다. 기적 같은 장면에 현빈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힘만 세도 저 정도는 가능하지 않아?’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천사가 말을 이었다.


“파괴는 쉬워. 중요한 건 그 다음이지.”


그는 손바닥 위에 부서진 벽돌조각들을 양손으로 쓸어 담은 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은빛 광채가 손 위에 일렁이며 잔물결처럼 퍼졌다. 부서진 조각들이 하나둘 붙기 시작했고, 마침내 벽돌은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현빈은 말문을 잃었다. 심장이 요동쳤고,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의 기적은 말 그대로 자연법칙의 위배였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게 나의 창조 권능이다. 지금은 벽돌 하나지만, 이 능력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지. 나는 파괴도 창조도 가능하다.”


천사는 벽돌을 내려놓고 현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저 높은 곳에서 파견된 수호천사다. 너를 돕기 위해 왔다.”


현빈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다. ‘나를 돕기 위해?’ 어깨가 으쓱하며 뿌듯해졌다가 이내 또 다른 의심이 따라왔다.


“그런데 왜 이제야 나타난 거예요?”

천사는 가볍게 웃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생각해보게. 우리도 다 담당 못 해. 요즘은 한 천사가 수백 명을 보기도 하고, 교대 근무도 한다네. 넌 이제 순서가 온 거야.”


현빈은 씁쓸하게 웃었다. 부모님이 떠올랐다. 평생 고생만 한 어머니 아버지,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안타깝지만, 그들은 다음 차례를 기다려야지. 누군가에겐 이 생이, 누군가에겐 다음 생이 있을 테니까.”


그의 말은 얄팍한 위로가 아니었다. 마치 정해진 질서를 전하는 공무원의 설명처럼 담담했다. 현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곧, ‘지금은 내 차례’라는 사실에 가슴이 감격으로 북받쳤다.


“그럼… 저를 어떻게 도와줄 건데요?”

“그건 네가 정하는 거야. 원하는 걸 말해봐. 하지만 두 가지만 기억해라.”


천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첫째, 나는 세상의 법칙 안에서만 개입할 수 있다. 인간 세상에도 법이 있듯, 우리 쪽에도 룰이 있지.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만 개입해야 해. 그걸 어기면 넌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게 될 거다. 둘째, 너와 나 사이의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한 마디라도 새어 나가면, 천계와 인간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세상은 큰 혼돈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넌 지옥행 특급열차에 오르게 될 거야.”


천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제, 자네의 소원을 말해보게.”


현빈은 문득, 눈앞의 천사가 동화 속 램프의 요정처럼 느껴졌다. 요정은 세 가지 소원만 들어주지만, 이 존재는 그런 제한조차 없어 보였다.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주머니에서 복권을 꺼내어 보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 복권, 1등 되게 해 주실 수 있나요?”

천사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하늘과 교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주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천계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정보를 검색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거액의 복권 당첨자 이름은 이미 명부에 다 올라가 있네. 한 번에 수십억 원을 받는 건 강력한 에너지 흐름이지. 그런 당첨은 대부분 전생에서 돈에 대한 집착으로 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네.”


현빈의 미간이 실망으로 찌푸려졌다.


“그렇게 큰 돈을 감당할 마음의 그릇이 안 되면 결국 깨지고 말지. 뉴스에서 보지 않았나? 당첨 뒤에 파산하거나 더 불행해진 사람들을 말이야.”


현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천사가 철학자야? 도덕 교사 같은 말만 늘어놓네…’ 그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사가 덧붙였다.


“자네 이름은 명부에 없었네.”

실망감을 뒤로 한 채 현빈은 머리를 굴리며 물었다.


“그럼 은행 같은 데서 돈을 옮겨 주실 수는 없나요? 아니면 아까 벽돌처럼 돈을 만들어내면 되잖아요?”

천사는 익살스럽게 웃으며 현빈의 이마를 튕기며 말했다.


“앞에서도 말했잖나. 돈을 새로 만드는 건 위조, 있는 돈을 옮기는 건 절도. 아무리 쉬워도 법을 어기는 방식은 안 되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현빈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두근거리며 날아올랐던 희망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천사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무 낙담하진 말게. 복권 2등 정도라면 크게 무리하지 않고도 이뤄줄 수 있어. 매주 2등에 당첨되도록 해줄 수 있다네.”


순간 현빈의 눈빛이 달라졌다. 2등이면 수천만 원, 매달 억 단위의 돈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한 방의 인생 역전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불어나는 돈이라니. 그의 심장은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제가 필요할 때는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지금처럼 그냥 나타나 주실 수는 없잖아요.”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곧 전송해줄 주문을 외우게. 다른 일로 너무 바쁘지만 않다면 곧바로 나타날 수 있을 거야.”


천사는 씩 웃으며 윙크를 날렸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영상이 페이드아웃 되듯 그의 형체는 서서히 사라졌다. 형체 없이 허공에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했다.


“천사는 본래 무한한 사랑의 존재라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뭐든 해주고 싶듯이, 나도 자네를 위해 기꺼이 뭐든 해주고 싶다네. 그러니 이제부터는… 행복하기만 하게.”


“천사님…!”

현빈은 갑자기 질문이라도 떠오른 듯 그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눈을 뜨자, 그는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창밖에서는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다. 꿈이었던 걸까? 그런데 어쩐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기이한 꿈이었다.


4장


"가난한 사람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너무 많이 갈망하는 사람이다."
- 세네카, 『도덕적 서한집(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천사와의 만남은 결국 현빈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복권 당첨에 대한 욕망이 빚어낸 개꿈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다가올 일을 미리 보여준 예지몽이었을까.


현빈은 며칠 동안 몽롱한 상태로 지냈다. 해야 할 공무원 시험 준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을 졸이며 토요일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고장 난 시계처럼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샀던 로또 티켓이 2등에 당첨되었다. 세금을 제하고도 71,258,354원.


“진짜야? 이게 진짜라고?!”

그는 방 안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지만 이내 심호흡으로 가라앉혔다. 공연히 소문을 내면 피곤해질 터였다. 그러나 이내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칠천만 원... 애매한데.’

아파트를 사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평소 꿈꿔왔던 포르쉐는 꿈도 못 꿀 금액이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경기도 변두리의 낡은 빌라 전세 정도만 가능할 뿐. 천사가 말했던 것처럼 매주 2등에 당첨만 된다면 희망이 있을 텐데… 하지만 문자로 보내준다던 소환 주문은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며칠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는 무료함과 답답함 속에서, 칠천만 원조차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간 침대 위에서 짧은 영상들로 시간만 때우던 어느 날, 갑자기 문자 알림음과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오… 신이시여! 아니, 천사님이시여!”

발신 번호조차 없는 메시지. 그런데 다소 황당한 내용이었다.


샟샳뗁먏늚 쾙춼촍
헫졏츛 눣읠쑱쉬밝
뗁㉨


도무지 읽을 수 없는 괴상한 문자. ‘시스템 오류인가?’ 화가 치밀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샛살뗀먈늠 쾔춸촌헷졋… 눡을쓸쉬발뗀…”


몇 번을 반복했다. 숨죽이고 가만히 기다렸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텅 빈 방안에 시계 초침 소리만 가득할 뿐. 다시 외워보고, 기다리고… 몇 번을 반복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개꿈이었구나…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며칠 전의 복권 2등 당첨조차 시시하게만 느껴졌다. 핑크빛 미래가 벽돌처럼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는 듯했다. 그는 체념하듯 읊조렸다.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어.”



현빈은 은행 본점에서 당첨금을 수령했다. 생애 처음 만져보는 거금, 칠천만 원. 그러나 마음은 텅 빈 공허함만 가득했다. 거금을 쥐고서도 우울증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스스로도 너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뭐지? 옷이나 바꿔야겠다.’


백화점에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품 매장에서 정장 세 벌과 구두, 넥타이까지 고르니 순식간에 천만 원이 넘어갔다. 직원들의 아부 섞인 환대에 그는 자신을 마치 왕이 된 것처럼 느꼈다. 입고 왔던 옷은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다시는 구질구질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의 뇌 속에서 분출된 도파민은 오랜 결핍 위에 쏟아져 내린 단비 같았다. 인간이 약 없이도 중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외부의 관심, 물질적 자극,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런 시간들이 지속되면 도파민은 스스로 자신의 뇌를 마모시킨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는 자신의 본질조차 달라진 사람처럼 느꼈다.



지하철 열차에 올라서자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는 그들 틈에서 우쭐한 마음을 느꼈다. 그러나 곧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불안한 감정이 꼬리를 물 듯 따라왔다.


‘복권은 한 번뿐이었고, 천사도 꿈이었지. 얼마 되지 않는 남은 돈도 금방 사라질 거야.’


그때, 뒤에서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현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천사가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천사님!”


그의 커다란 외침에 승객들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시선들은 부메랑처럼 곧 휴대폰 화면으로 다시 돌아갔다.

“진작에 소환 주문을 듣긴 했네. 다만 바빠서 좀 늦었지.”

현빈은 얼른 휴대폰을 꺼냈다.

“이상한 문자, 제가 제대로 읽은 건가요?”

천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의 언어지. 뜻은 ‘나의 수호천사님, 어서 나타나 도와주세요’ 라는 뜻이야. 마지막 글자를 빼먹긴 했지만, 내가 놓치진 않았어.”


그는 장난스럽게 마지막 기호의 발음을 교정해주었다. 천계의 언어는 하루에도 수억 개의 기도를 걸러내야 하니 복잡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그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커플이 내렸고 현빈과 천사가 나란히 앉았다.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천사가 말을 이었다.


“내 친구 중에 ‘아발로키테슈바라’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있어. 그는 나보다 더 밝은 귀를 가졌지. 그 이름은 ‘세상의 소리를 모두 듣는 자’라는 뜻이라네.”


현빈은 불교 집안에서 자랐기에 대충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의 소리를 모두 듣는 자라는 뜻을 한자로 하면 관음(觀音)이라는 것을.


“혹시… 관세음보살 말인가요?”
“맞아. 한국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


그때 현빈의 과거가 머릿속을 스쳤다. 어머니가 절에서 늘 외우던 그 말, ‘나무관세음보살.’ 그는 늘 궁금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부르짖었는데, 어째서 어머니의 소원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진짜 천사는 지금처럼 이런 지하철 한복판에서 살짝 지각하면서도 유쾌하게 나타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그럼… 앞으로도 매주 2등, 확실한 거죠?”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신뢰감을 주는 듯한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수호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는가. 너는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고 싶은 일,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쾌락까지… 뭐든 기꺼이 받아들여도 돼.”


천사의 말들은 그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 있었다. 그는 현빈의 마음속에 숨겨진 그림자를 읽고 속삭여준 것인지도 몰랐다.


열차는 한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들어섰고 천사는 다음 약속이 있다며 손을 흔들고 내렸다.

혼자 남은 현빈의 가슴에 벅찬 감정과 전율이 함께 차올랐다. 무엇이든 원하기만 하면 단시간 내에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가득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차와 여자, 그토록 꿈꿔왔던 포르쉐와 소연이 이미 자기 것이 된 것처럼 행복에 젖어 들었다.


5장


"너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것들을 원하는 마음이다."
-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Enchiridion)』, 『담화록(Discourses)』


“인간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릴 수 있다네.”


천사의 말은 현빈의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처럼 쉽게 떨쳐낼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믿어지지는 않았다. 천사가 중요한 한 마디를 빼먹은 것이라 생각했다.


‘돈이 있는 인간은 무엇이든 누릴 수 있다네.’

이게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천사는 이 세상의 룰을 모르는 거야. 모든 건 돈이 좌우하는데 말이야. 어쨌든 천사의 존재가 확실해졌으니 이제 실천에 옮기기만 하면 돼.’


현빈은 집으로 향하다 마음을 바꿔 포르쉐 전시장으로 향했다. 몇 달 전, 로또 1등 당첨을 꿈꾸며 문 앞까지 가서 발길을 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 안이 감히 범접하기 힘든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문 손잡이를 움켜쥐며 천사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얼마든지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말하자, 손과 마음에 기운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을 여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련된 정장을 입은 아름다운 여직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모델이 있으신가요?”
“911 타르가를 보고 싶어서요.”
“아, 타르가요. 잘 오셨어요. 저희 매장은 전국에 몇 안 되는 타르가를 전시한 곳이랍니다. 저는 김정은 대리라고 합니다. 우선 이쪽으로 앉으시죠. 커피나 녹차 드릴까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으며 그를 이끌었다. 약간의 형식적인 절차들을 거친 후, 현빈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타르가를 볼 수 있었다. 은빛 바디, 유려한 곡선, 고급 가죽 내장. 모든 것이 꿈에서 보던 장면처럼 완벽했다. 조수석에 앉아 설명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순간, 짧은 스커트 사이로 그녀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고, 현빈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가슴은 흥분으로 쿵쾅거렸다. 너무나 갑자기 다른 세상에 들어선 느낌의 설렘이 온몸을 가득 채웠다. ‘내가 이런 스포츠카에 이런 미녀와, 정말 꿈만 같다. 이 차를 몰고 소연 앞에 서면, 나도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911타르가는 프로모션가로 2억에 조금 못 미쳤다. 천사가 약속한 매주 복권 2등 당첨금으로는 일시불로 구입하기는 어려웠다. 현빈은 차량을 할부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고 무직이었기에 보증인이 필요했다. 결국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저예요. 저 이제 취직해서 돈도 잘 벌고 있어요.”

“취직했다고? 잘됐다! 그래 공무원 준비는 이제 그만두는 기가?”

“네. 그만뒀어요. 공무원 돼 봐야 월급도 쥐꼬리만 하잖아요.”

“그렇긴 해도... 요즘 세상에 공무원이 제일 안정적이라 카던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투박한 사투리,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아쉬운 듯한 목소리였다. 현빈은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살아온 시골 토박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제 제 걱정 마세요. 생활비도 더 안 부쳐주셔도 돼요. 그리고 회사에서 제출해야 할 서류가 있는데… 아버지 인감도장하고 신분증이 필요해요. 빨리 좀 보내주세요.”


그는 답답한 가슴으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를 보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내뱉은 거짓말들이 쇳덩이가 들어앉은 듯 마음을 짓눌렀다. 복권 당첨과 천사의 존재, 그 어떤 진실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지하실에 꽁꽁 숨겨놓아야 할 비밀들이 하나 둘 암세포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언젠가는 어차피 마주해야 할 상황이었고, 지금은 단지 한 번 넘기는 것뿐이라고. 불편함도 금세 사라질 연기 같은 감정일 뿐이라고.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작은 가시가 박힌 듯한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죄책감을 애써 억누른 며칠이 지나, 드디어 포르쉐 출고일이 다가왔다.


포르쉐 출고일. 은빛 타르가가 전시장 앞에 늠름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현빈은 자동차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김 대리의 안내로 운전석에 앉아 시동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엔진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포르쉐 특유의 계기판과 앰비언트 라이트가 아름답게 빛났다. 그는 꿈속에서나 그리던 장면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자 빈속에 소주 한 잔을 급히 쏟아 넣은 듯한 몽롱함마저 느껴졌다.


조수석의 김 대리는 현빈을 흘끗 살피며 묘한 의혹을 떠올렸다. 겉은 명품으로 번쩍였지만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지난 5년간 포르쉐 딜러로 수많은 고객들을 만났다. 젊은 전문직, 고소득 사업자, 차에 미쳐 사는 마니아들, 부모가 대준 돈으로 고급차를 몰고 다니는 철부지들… 그들 모두에게는 나름의 공통점이 있었다. 익숙한 부의 냄새. 하지만 현빈은 아니었다. 명품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 속엔 어색함이 숨겨져 있었다. 빛나는 껍데기 속에 불안한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혹시 우연히 현금을 잔뜩 담은 가방을 주운 건 아닐까? 은행이라도 턴 걸까? 그녀는 스스로의 상상에 웃음을 삼켰다.


“일반 세단만 운전하시던 분들이 포르쉐로 바꾸시면 처음엔 다들 조금씩 어색해하시더라고요.”

차의 실내장치를 살피던 현빈이 대답했다.

“괜찮아요. 몰다 보면 익숙해지겠죠. 매뉴얼도 천천히 살펴볼 게요.”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훈련된 미소를 띠었다.

“멋진 드라이브 되세요. 포르쉐가 고객님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드릴 겁니다.”


현빈은 조심스레 액셀을 밟았다. 부웅… 부다다다… 머플러에서 터지는 저음의 울림. 포르쉐의 배기음은 도심 속 소란한 소음조차 찢는 듯했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그는 긴장된 숨을 들이켰다. 컨버터블 탑을 여는 버튼은 일부러 누르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자신에게 쏠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 버튼은 안전을 위해 정차 상태에서만 작동된다는 김 대리의 설명이 떠올랐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차가 출발한 뒤, 김 대리는 천천히 전시장 안으로 돌아왔다. 넥타이를 매만지는 이 과장에게 그녀가 물었다.

“저 사람,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일 하는 사람일까요?”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다른 고객들과는 좀 다른 것 같더라고.”

“그렇죠? 집안이 부자인 것 같지도 않고…”

이 과장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글쎄. 복권이라도 당첨됐나 보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복권…? 1등이라면 할부로는 안 샀을 거고… 2등이면 포르쉐는 무리일 텐데…”


6장


“인간은 감각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으며, 그림자에 사로잡혀 산다.”
– 플라톤, 『국가(The Republic)』, '동굴의 비유'


“수업 끝나면 건물 앞으로 나와. 올 때까지 기다릴게.”

갑작스러운 메시지였다. 현빈이 먼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민석은 학과 랩에서 실험에 몰두하던 중 가운을 벗고 밖으로 나왔다. 수업은 없었고, 논문 실험도 한창이었지만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건 상관없었다.


어릴 적부터 현빈과 그는 절친한 친구였지만, 둘은 언제나 약속을 잡고 만나곤 했다. 그런데 ‘기다린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민석은 왠지 모르게 달라진 기류를 느꼈다.


건물 앞으로 나갔을 때, 현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낯선 은색 포르쉐 한 대가 조용히 서 있었고, 짙은 썬팅으로 차량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민석이 현빈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사이 포르쉐의 운전석 창이 내려가며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들었다. 현빈이었다.


“야, 이거 뭐야? 설마 네 차는 아니겠지? 빌린 거라 해도… 꽤나 용한데?”

민석은 놀란 얼굴로 차에 달려들었다.

“뚜껑도 열려? 이거 컨버터블 아니야?”

“당연하지. 볼래?”

현빈이 버튼을 누르자 20여 초 동안 지붕이 서서히 젖혀졌다. 파란 하늘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와… 이건 진짜 말도 안 된다.”

“나도 신기해. 네 덕에 지금 처음 열어본 거야.”


두 사람은 신기한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들처럼 천진한 웃음을 터뜨렸다.

2억 원대의 자동차. 평범한 서민이라면 평생 모아도 구입하기에 힘든 금액이었다.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즐거움을 넘어 부의 욕망 그 자체를 자극하는 물건. 어쩌면 극소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난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지금 바쁜 일 없지?”

“실험하다 나왔지만 급한 건 아니야. 너 만나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선배한테 미리 말하고 나왔지. 왜?”

“이렇게 멋진 말을 구했는데, 어디든 달려봐야 하지 않겠냐?”


현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르쉐가 저음으로 으르렁거리며 깨어났다. 그 소리는 자동차 엔진음이 아니라, 맹수의 포효 같았다.


“지금 막 출고 받고 오는 길이야. 조금은 낯설지만… 바다나 보러 갈까?”

포르쉐는 유유히 캠퍼스를 빠져나갔다.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선망, 질투, 거리감이 뒤섞인 눈빛들이 그들을 향했다. 민석은 그런 시선 속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지켜보며 관찰했고 현빈은 우쭐한 느낌의 쾌감을 즐겼다.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잠시 후, 시내를 벗어난 포르쉐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은빛을 뽐냈다. 마치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후 늦게 출발한 탓에, 두 사람은 해가 진 뒤 한참이 지나서야 경포대 근처에 도착했다. 내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민석이 경포호에 접어들 무렵 입을 열었다.


“잠깐 좌회전해서, 경포대에 들렀다 가자.”
“이 밤중에 누각에는 뭐 하러 가? 사람도 없을 텐데.”

현빈은 투덜거리면서 핸들을 돌렸다. 오랜 친구로서, 민석이 실없는 소리를 하는 법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밤의 경포대는 화사한 조명을 받아 단아한 자태로 그들을 맞이했다. 11월 초, 입동을 코앞에 둔 시기. 가을의 끝자락이었지만 밤공기엔 겨울의 차가움이 스며 있었다. 하늘엔 보름달이 은은히 빛났고, 경포호 위로 맑은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경포대 하면 해수욕장을 떠올리지만, 원래는 이 누각의 이름이야. 경포호의 ‘경’은 거울이라는 뜻이야. 호수의 물결이 거울처럼 사물을 비춘다는 뜻이지.”

민석의 말에 현빈은 자신이 그저 ‘바다’라는 목적에만 집착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그가 찾던 바다는 머릿속 관념 속에 있는 바다일지도 몰랐다.


“과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제가 아니라고 해. 시각이나 청각으로 들어온 정보를 뇌가 재구성해서 만든 이미지일 뿐이지. 그것마저 왜곡되기 일쑤이고. 결국 우리는 실재가 아니라 가공된 상이나 이미지를 보는 셈이야.”


민석의 차분한 목소리는 고요한 밤공기 속을 천천히 떠다니다 반딧불처럼 흩어졌다.

현빈은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렸다. 영화는 민석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었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 완전히 동일시하기는 힘들었다. 현빈은 숨을 가다듬고 눈 앞에 펼쳐진 경관을 새롭게 보려고 노력해보았다. 늘 당연하게 보던 호수, 보름달, 늦가을 풀벌레 소리라는 생각들을 내려놓고 숨을 죽였다. 그제서야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사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호수 위에 비친 보름달의 잔상이 물결에 부서지고 있었다. 옅은 바람에 스치는 호수의 잔잔한 떨림, 그 위에 스며드는 달빛. 달빛은 은은한 향기처럼 밤하늘에 빛났고, 물에 비친 자태는 아름다웠다. 누각은 목재 하나, 기와 한 장마다 오랜 세월을 품고 있었다. 마치 전설처럼, 고대에 잊혀진 이야기처럼. 오래전 선인의 속삭임이 바다내음 가득한 바람을 타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했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맑고 차가운 공기가 폐를 넘어 몸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정결한 기운이 영혼까지 정화해줄 것 같았다.


경포호의 밤 경관에 취한 정적을 깨고 민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들어봤니? 경포대에는 달이 다섯 개 뜬다는 이야기. 하늘의 달, 호수, 바다 술잔 속에 비친 달, 그리고… 님의 눈동자에 비친 달. 그런데 여기는…”


민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님이 없으니 친구 눈동자에 비친 달이라고 해야 하나? 느끼하다. 우웩!”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호수 위로 멀리 퍼져갔다.


웃음이 가라앉자, 민석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세상 사람들 마음이 저 호수처럼 맑았다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진짜 자기가 누군지 몰라. 마음의 표면만 보면서, 그게 자기 본질인 줄 알고 착각하지. 그러니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계속 괴로운 거야.”

현빈은 민석의 말이 마치 거울처럼 자신의 속내를 비추는 것 같아,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척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민석의 말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빈에게 마음이란 거추장스러운 주머니 같은 것이었다. 복잡한 생각들, 자신을 괴롭게 하는 감정들, 이러 저러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믿음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없으면 더 좋은 것들… 하지만 민석의 말처럼, 진짜 자신이 누구인가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당장의 즐거움을 주는 포르쉐, 사랑하는 여자, 무엇이든 살 수 있는 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명예 같은 것들만 중요하게 느껴졌다.


민석은 고개를 돌린 현빈을 보면서도 그저 빙긋 웃을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현빈은 그런 민석의 모습이 익숙했다. 언제나처럼, 밑도 끝도 없이 모를 소리를 하다가도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친구. 둘은 서로 정반대인 성향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우정만큼은 변함없었다. 그것이 인연이라는 걸까. 아직 30년도 채 되지 않은 인생이라,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을지도…


두 사람은 다시 포르쉐에 올라 경포대 바닷가로 향했다.



둘은 옛추억을 떠올리며 바닷가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도가 차갑게 밀려와 모래사장을 때렸고 부서진 물거품은 달빛을 머금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겨울처럼 매서운 바닷바람이 살을 에는 듯 옷깃을 파고들었다. 현빈은 목을 움츠리며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민석에게 건넸다.


“수능 끝나고 대천 갔던 거 기억나냐?”

“그땐 한겨울이라 엄청 추울 때였는데… 이상하게 지금이 더 춥네.”


민석이 인상을 찡그리며 소주를 삼키며 대답했다.

“우리 나이 탓이겠지. 벌써 십 년이나 지났으니.”


말을 멈춘 두 사람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민석은 묵묵히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고, 현빈은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소연을 떠올렸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그때 민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때 까지만 해도 네가 순수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돈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현빈은 자신을 방어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돈 있으면 원하는 거 다 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어.”

민석은 고개를 저었다.


“돈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그게 전부라고 믿는 게 위험한 거지.”

현빈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럼 넌? 현대판 연금술 연구한다고 대학원 간 거, 나노 기술이 필요하다면서. 그게 결국 금을 만들겠다는 거 아냐?”

“맞아. 금을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그 기술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은 거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어.”


민석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현빈의 마음 깊은 곳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 민석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붙든 것을 놓을 수는 없었다. 민석은 현빈의 붉어진 얼굴을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넌 지금 너무 쉬운 요행만 바라고 있잖아. 그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난 원하는 걸 얻고 있어! 저 차를 봐! 넌 평생을 노력해도 못살걸? 그게 현실이잖아!”

바다 위로 퍼져 나간 그의 외침은 어두운 바다 어딘가로 흩어져 사라졌다. 민석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되물었다.


“근데… 진짜로, 저 차 어디서 난 거야?”

현빈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천사와의 일을 민석이라면 이해해줄 것 같았다. 반드시 비밀로 해야 한다며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천사의 경고가 머리속에 어른거렸기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복권에 당첨됐어.”

민석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갑작스러운 큰돈은 재앙이 되기도 해.”


천사가 했던 말과 같았다. 경고의 말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어 현빈의 마음은 찜찜함으로 가득했지만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민석은 술잔을 채우며 대화를 돌렸다.


“괜히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분위기 망쳤네. 미안. 술이나 더 하자.”


현빈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한 느낌에 안도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전에는 없었던, 부모와 친구에게도 숨겨야 하는 비밀이 자꾸 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작은 균열이자 몰락의 전조인지도 몰랐다. 그는 애써 별일 아니라고, 마음에 구덩이를 파고 다시 덮었다. 언젠가는 모두 털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달빛을 머금은 파도소리만이 두 사람의 침묵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7장


"우리가 욕망의 주체인 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이나 평화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밤 10시, 현빈은 포르쉐의 운전석에 앉아 휴대폰 주소록에서 ‘1번’을 눌렀다. 소연의 집 앞이었다. 차 안은 고급 가죽과 새 차 냄새로 가득했다. 명품 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버튼을 누를 용기를 준 것 같았다. 전화는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벨소리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에게는 그 짧은 기다림조차 기나긴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통화가 이어지자,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여보세요.”

짧고 차분한, 감정 없는, 현빈이 기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목에 힘을 주었다.

“안녕하세요...”

수 없이 연습한 생각들이 태풍에 쓸려간 듯 흔적도 없었다. 텅 빈 머릿속 대신 입속에서만 수많은 단어들이 빙빙 맴돌았다.

“누구세요?”


그녀의 말에 현빈은 겨우 입을 열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에서 몇 번… 뵌 적이 있는데요… 저에게 캔음료를 주셨었죠...”

그는 겨우 한 단어씩 말을 이어 나가며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흔들림 없이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일들쯤 너무 흔한 일인 것처럼. 그런 그녀의 반응이 오히려 현빈을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성함이?”

“김현빈입니다. 제가 이름을 알려드린 적은 없어서, 아마... 모르실 거예요.”
“모르겠는데요. 혹시 전화를 잘못 거신 건 아닌가요?”
“아, 아닙니다. 소연 씨에게... 전화 드린 게 맞습니다.”


거기까지라도 대화가 이어진 게 다행이라 생각한 순간, 그녀의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날카롭게 꽂혔다.


“제 이름은 맞는데요. 전화하신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겠네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고, 무슨 일이시죠?”

현빈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던 걸까?’


친구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진짜 선수는 말이지. 딱 보면 알아. 그 여자가 넘어올지 안 넘어올지.’


지금의 상황을 보면, 현빈은 자신이 확실히 선수는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현빈은 연애 경험조차 거의 없는 모태솔로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차 한 대 믿고 들이댔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소연은 단순히 미인인 것만은 아니었다. 집안이 엄청난 부자일 뿐 아니라 법조계 인맥과 권력까지 얽혀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속담 하나를 떠올렸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그래, 찍어보기라도 하자. 지난번처럼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 소연 씨 집 앞입니다.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


말을 꺼내고 나서 그는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라니. 3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 같았다.


뚝.
소연은 아무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끊긴 통화음이 현빈의 귓속에서 한참동안 울리는 듯했다. 그는 울컥 솟아오르는 불 같은 분노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아닌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지난번엔 그냥 돌아섰었다. ‘또 그럴 수는 없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 이제 나에게도 돈이 계속 들어올 거잖아. 멋진 포르쉐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자신감이 생기는 듯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삐 소리 후…’ 이번엔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현빈입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소연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기고서 마냥 기다리기 시작했다. 연락을 기다리며 주문을 읊었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천사를 불러낼 요량이었다. 역시, 천사는 곧장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한참 늦은 시간, 갑작스레 엉뚱한 장소에서 나타나곤 했다.


‘천사에게 코리안 타임이라니, 그것도 지독하게.’

밤늦은 시간, 거리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라디오라도 켤까 하다 마음을 접었다. 그는 운전석 시트를 조금 뒤로 넘기고 등을 깊이 기댔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이 좁은 공간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감옥처럼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켜고 소연의 SNS를 열었다. 그녀의 모습들은 그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완벽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진들로 가득했다. 친구들과 웃고 있는 모습,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 사진, 어느 해외여행의 에메랄드빛 바다 풍경... 그 사진들을 넘겨볼수록, 차 안의 공기는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 우울한 공기 속에서 그의 마음도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똑똑.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든 현빈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설마 소연이? 현빈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밖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어두운 밤, 썬팅 때문에 얼굴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크고 체격이 단단해 보였다. 늘 바쁘다더니 다른 천사를 보낸 건가? 현빈은 경계심을 풀고 창문을 내렸다.


40대 초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눈빛은 송곳처럼 날카롭고, 몸 전체에서 살기 같은 것이 풍겨 나오는 것이 독사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 단련한 무술인 같은 느낌이 현빈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보게, 젊은이.”

그는 조용히 차창 너머 현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엄청난 악력으로 힘을 주었다. 그의 엄지는 어깨의 관절 사이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다. 그는 무술의 고수 답게 몸 구석구석의 뼈와 관절 사이의 고통스러운 급소들을 정확하게 꿰뚫은 듯했다.


“으윽...!”

현빈은 어깨에 구멍이 날 것만 같은 통증을 느끼며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독사가 독을 품은 혀를 낼름거리듯 말을 이었다.


“고통스럽지? 하지만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에서, 정말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겪을 고통에 비하면.”

그는 엄지를 지그시 누르며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올바른 선택을 하시게. 괜히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다가는, 목이 부러질 수도 있는 법이니까.”

말을 마친 그는 돌아서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몸을 되돌렸다. 약간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돈 좀 있다고 꾸는 허튼 꿈은 빨리 그만두게. 이 집 아가씨는 그렇게 상대할 분이 아니야. 자네가 내 조카 같아서 하는 충고야.”


그는 대궐 같은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사라진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황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골목 한 켠 끝에서 휭휭 소리와 함께 작은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철 지난 낙엽들을 빨리 사라지라는 듯 쓸어 올리고 있었다. 때마침 고장이라도 난 듯 가로등 하나가 깜박였다.


현빈은 탈진한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눈 앞의 광경에 시선을 두고 한참동안 그렇게 멈춰 있었다. 방전이라도 된 로봇처럼, 빈손의 청년으로 장미를 두고 돌아섰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이윽고 정신을 차린 현빈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 모자란 거야. 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한 거야.’


그의 포르쉐가 부촌의 골목을 떠난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포르쉐의 빈자리에 드리웠다. 어둠에 가려 얼굴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큰 키의 당당한 체격이 천사의 것과 닮아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현빈이 떠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을 흘리면서.



“어떠냐? 여기 물 괜찮지? 그래도 적당히 뺀찌는 놔야 해.”

정민이 웃으며 현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뺀찌’는 룸에 들어온 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쓰는 은어였다. 정민은 친구들 사이에서 화류계 쪽에 능통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유복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특별한 재력가도 아니었다. 대학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이쪽에 쏟아붓던 사람이었고, 놀 때는 끝까지 놀았지만 머리도 좋아서 결국은 제법 괜찮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평소의 현빈이었다면 그와 어울리는 일도, 이런 곳에 발을 들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연에게 거절당한 뒤로 그의 마음은 뒤틀렸다. 귓가에 맴도는 말 ‘오르지 못할 나무’ 라는 표현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홧김에 정민을 부르게 된 것이었다.


룸 안은 어두운 조명에 테이블 위 가지런히 놓인 술잔들, 노래방 기기, 그리고 얇은 원피스를 입고 짙게 화장한 여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녀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깊이 파인 가슴과 짧은 치마와 함께 순백의 허벅지가 너무나 눈부시게 드러났다. 현빈이라고 해서 전혀 알지 못하던 풍경은 아니었다. 실제로 마주하니 너무 생경하게만 느껴졌고 본능적인 욕구와 불편한 느낌이 공존해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본능과 허영이 함께 솟아나 낯섦의 자리를 대신했다.


“돈만 더 쓰면 탤런트나 모델급도 가능해.”

정민이 낄낄대며 말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세연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미영이에요. 오빠들, 잘 부탁해요. 호호.”

세연은 옅은 감색 원피스를 입고 조용히 현빈의 옆자리에 앉았다. 미영은 정민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자연스럽게 안겼다. 둘은 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자, 자! 오늘 이 멋진 오빠들과 함께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만들어 보자고!”

정민은 넉살 좋은 말투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아잉, 오빠 성질도 급하시다~ 호호홋.”

“그리고 말이야, 저 앞에 계신 오빠는 오늘 이런 데 처음 오셨으니까 잘 좀 부탁해. 하하!”

정민은 여유가 넘치는 반면 현빈은 바짝 얼어붙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에게 세연이 술을 따랐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는 과묵하신가 봐요.”

“아… 아니에요. 평소엔 안 그런데, 분위기가 좀 낯설어서요.”


현빈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귀 뒤로 넘긴 생머리가 목선을 따라 흘러내리고, 목 아래로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너무 과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은 표정과 단정한 인상.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였다.


현빈은 그 순간, 다시 소연을 떠올렸다. 그에게 이제 소연은 점점 더 멀어지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닿을 수 없는 동화 속 공주. 반면 세연은 지금 바로 곁에 있었다. 당장 어깨가 스치는 곳에, 살짝만 손을 뻗어도 닿을 거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배경만 바뀐다면 세연 또한 고귀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임이 틀림없었다. 외모만 본다면 소연에게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룸 안의 열기는 달아올랐고, 분위기는 뜨겁고 질펀하게 흘러갔다. 현빈의 정신은 점점 더 몽롱해졌다. 열기 속에서 시간도 공간도 모두 녹아 내리는 듯했다. 그는 세연과 술을 마시고, 팔짱을 끼고, 춤을 추고,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머릿속에서는 세연과 소연, 두 사람의 얼굴이 뒤섞이는 듯했다.


소연으로부터 비참하게 외면당한 기억이 간헐적으로 튀어 올랐다. 그것이 그의 상처를 마구 찔렀다. 본래부터 상처로 남아있던 자기비하, 낮은 자존감의 자리를 찔렀다. 새로 생긴 거절의 상처도 찌르고 또 찔렀다. 그녀는 그저 단 한 번 찔렀을 뿐이다. 그런 반면 현빈은 거절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찌르고 또 찌르는 셈이었다. 그는 아픔을 치유라도 하려는 듯 술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건 아픈 상처에 독한 알코올을 퍼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밤이 가장 깊어진 시간, 그들은 서로를 떠나지 않았다. 단지 장소만 바꾸어 또 다른 룸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채웠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땀을 흘리고, 야릇한 숨소리로 정적을 깨우며 깊은 새벽을 향해 나아갔다.


이후로도 그는 세연과 업소 밖에서 가끔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성격도 외모도 그의 취향과 잘 맞았다. 정상적인 첫 만남이었다면, 어쩌면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산책을 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호텔에 들렀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돈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돈을 바탕으로 유지되었다. 부유한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계약처럼 이어지는 만남이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만남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현빈은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돈만 있으면, 아름다운 여자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을. 세연과의 만남속에서 그는 웃었고, 농담을 나눴고, 때로는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은 늘 비어 있었다. 뭔가 빠진 듯했다.


그는 세연과 만남을 가지면서도 종종 소연을 떠올렸다. 소연에 대한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라고 여기던 그 감정조차 어쩌면, 그저 집착인 건 아니었을까. 일시적인 착각에서 시작된 사랑의 환상이었을까.


그는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깊은 혼란의 블랙홀로 빨려 들고 있었다. 생각만으로는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차, 돈, 여자… 분명 전보다 더 많은 것들로 삶이 채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처럼, 마음은 점점 더 공허해질 뿐이었다.




[로드시커 외전] 나는 성공하고도 왜 더 외로워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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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 통장에 억 단위의 잔고가 찍혔을 때,

나는 혼자 호텔 욕조에 들어가 샴페인을 따며 축하했다.


하지만 처음 느꼈던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 마음은 오히려 적막하게 느껴졌다.

영원할 줄 알았던 행복은

손을 뻗으면 꺼지는 물거품처럼,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명품 정장, 시계, 가방, 포르쉐,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까지

전부 손에 넣고 나니
사람들이 내게 웃는 이유가 내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 때문은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야. 내가 아는 누구보다 성공했어."

그 말이 날 위로하기는커녕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나를 본 걸까,

내가 쌓아올린 배경을 본 걸까.


오래전,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마주친 조명등 하나가 있다.
희미한 불빛 아래 새겨진 건, 두 손을 모은 천사였다.

처음엔 그 불빛이 좋았다.
나를 지켜주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빛이
숨이 막힐듯이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욕망을 이루었으니 이제 행복해져야 한다는 압박.
하지만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지는 느낌.


나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왜 나는 자꾸 공허하지?’


돈은 삶의 벽을 뚫어주는 열쇠였다.
하지만 나는 깨달았다.

그 벽 너머에는 정답이 없었다.
오히려 공허한 사막만이 펼쳐져 있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만이
내 우주의 전부인 것처럼.


이제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그 사막을 헤맨다.
진짜 나를,
오직 나를 찾기 위해.





8장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 구약성경, 전도서


새벽 3시. 현빈은 술에 찌든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고급스럽게 장착된 최신형 빌트인 냉장고의 문을 열고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심한 갈증에 급히 생수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달 넘게 같은 패턴의 생활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술, 여자, 그리고 광란의 밤들… 현빈은 생각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이었나? 그것에 빠져 있을 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슴 속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땅한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거실로 가 소파에 몸을 던지고 TV를 켰다. 100인치 대형 벽걸이 TV가 보여주는 화면, 연결된 다채널 오디오 시스템이 들려주는 소리가 넓은 거실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화면에서는 해외의 축구 경기 장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함성, 선수들의 몸싸움, 탁구공처럼 오가는 공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천사가 장담한 대로 복권은 매주 2등 당첨의 기적을 보여주었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은행의 당첨금 지급 담당자는 매번 놀라운 눈으로 현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액 당첨자의 신상은 대외비로 관리되어야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이 새나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1등이 계속 당첨되었다면 세무청의 의심을 샀을지도 모르지만 2등의 경우는 달랐다.


현빈은 소파에서 일어나 전망이 탁 트인 창 밖을 내다보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드넓게 펼쳐진 도심의 야경은 불이 꺼지지 않은 채 살아 숨쉬는 듯했다. 현빈이 초고층 최고급 오피스텔에 입주한 지 한 달, 처음 며칠간 황홀하게 감상하던 야경과 최고급 인테리어의 감흥은 벌써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화려한 조명이 넘실대는 도시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더 이상 그의 가슴을 뛰게 하지는 못했다. 공장에서 인공으로 빚어진 가짜 보석처럼, 잠시 반짝이긴 했지만 깊은 내면의 빛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고가의 헤어샵에서 다듬은 머리와 명품 셔츠의 실루엣이 예전의 자기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그는 돈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연극의 의상과 무대 장치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연극이 끝다면, 텅 빈 객석 앞 불 꺼진 무대 위에 홀로 남게 된다면… 모두가 너무 가볍게만 느껴졌다. 옷도, 집도, 차도, 세연과의 관계도, 매일 드나드는 술집도… 살짝만 훅 불어도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언제나 기분 좋은 말을 해주는 천사는? 그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조차 너무 두려웠다.


귀에 익은 멜로디와 함께 현관벨 소리가 울렸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현빈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이, 벌써 삑삑하고 현관의 도어록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거실 벽에 장착된 모니터가 낯익은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현관문을 연 천사가 실내로 들어섰다.


천사가 들어서는 순간, 현빈은 평소와는 다른 묘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모습은 지난번 만났을 때와 같이 깔끔한 정장 차림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기묘한 빛이 주변을 감싸는 듯했다. 희미한 그믐달 빛을 받은 듯이 어두운 얼굴, 지나치게 깊고 텅 빈 듯한 눈동자가 차갑게 반짝였다. 친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기이한 존재가 자신에게 향하는 동안, 현빈은 넋이라도 놓은 듯 그의 동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여어! 정말 멋진 집인 걸! 요즘 인간들은 이렇게 집을 짓는가 보군! 현관 바닥에도 천연 대리석을 깔았군!”

천사는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과장스러운 탄성을 질렀다. 현빈은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긴장을 풀었다. 조금 전 느낀 이상한 감각은 술이 다 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잊으려 애썼다.


“전능하다는 천사님이 뭘 그렇게 놀라는 척을 하세요? 그나저나 이 시간에 벨을 누르고 바로 들어오시길래 누군가 하고 깜짝 놀랐잖아요. 현관 통하지 않고 바로 나타날 수도 있으면서.”

“그런가? 난 또 갑자기 나타나면 놀랄까 봐 일부러 벨 누르고 들어오느라 신경 쓴 건데. 미안하게 됐구먼. 허허.”


천사는 TV를 끄고 오디오를 향해 다가갔다. 전원을 켜고 허공에 손짓을 하자 경쾌한 음악이 그들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낯익은 전자음을 들으며 현빈은 오랜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분명 낯이 익은 곡이었다. 뭐였더라… 마침내 묵은 먼지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시간의 강을 건너 곡의 제목이 떠올랐다. 유리드믹스의 ‘스위트 드림스’ 였다.


“왜 이 노래를 틀었죠?”

현빈이 묻자 천사는 음악에 맞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 노래 들어본 적 있나? 잘 들어보고, 가사 내용도 곱씹어 봐. 자네 삶의 길에 큰 힌트를 줄지도 모르니까.”


Sweet dreams are made of this
Who am I to disagree
I travel the world and the seven seas
Everybody's looking for something
Some of them want to use you
Some of them want to get used by you
Some of them want to abuse you
Some of them want to be abused
......


현빈은 가사에 집중하려 애썼다. 과거 자주 듣기는 했었지만 단순히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만 기억했지,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현빈은 곡의 반복되는 가사를 들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처음엔 의미 없는 반복처럼 들리던 가사가 점점 고막을 지나 뇌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널 이용하려 하고, 누군가는 이용당하길 원하고...’ 그는 문득 최근에 만난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정답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모르겠어요. 답을 알려줘요!”

천사는 대답 대신 묘하게 웃기만 했다. 입꼬리만 슬쩍 올린 채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천사의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무엇 같았다. 현빈은 섬뜩함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썼다. 아닐 거야, 술을 너무 마셨기 때문일 거야, 옆 건물의 파란 네온사인이 비쳤기 때문일 거야.


“갑자기 무슨 신소리세요.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제가 지난번에 부른 지가 언젠데……”

“이거 이거, 오랜만에 만난 천사 무안하게 만드는구먼. 미안하게 됐네. 내가 오죽이나 바빴으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타났겠나? 너무 바쁘다 보니 그런 거지. 나한테도 이건 밤샘 근무나 마찬가지니 너무 뭐라 하지 말게. 허허.”


현빈의 두려움을 무마하려는 익살에 천사 역시도 평소처럼 너털웃음을 지었다. 분명 천사의 미묘한 변화가 있었지만 현빈은 그런 섬세한 낌새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괜한 착각을 했다고만 믿었다.


“새로 주문할 것이 생겼는데 말이죠.”

현빈은 어느샌가 주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는 수호천사에게 하는 요구는 이제 더 이상 부탁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받아내야만 할 주문이 되기 시작했다. 현빈은 자신이 주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천사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성급함과 탐욕의 안개로 흐려져 있었기에 미묘한 변화를 알아내기는 어려운 상태에 놓여있었다. 천사는 적어도 겉으로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돈만 많다고 모든 일이 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이제 저에겐 당장 좋은 집안과, 좋은 직업이 필요해요. 아! 이왕이면 ‘사’ 자 들어가는 직업이면 좋겠네요. 검사나 의사 정도면 괜찮을 거 같은데.”


현빈은 이제 꽤나 많은 돈을 소유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는 사이 소연을 향했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사그라질 대로 사그라지고야 말았다. 급기야 현빈의 마음은 오기와 독기로 가득 찼다. 소연 집의 보디가드로부터 들었던 오르지 못할 나무, 상류사회에 오르고 말겠다는 욕망이 그의 마음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들어줄 수가 없네. 내가 처음부터 당부해 두었을 텐데.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때는 세상의 법칙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좋은 집안을 만들어 달라고? 그러자면 자네 부모의 직업과 과거에 대한 기억, 지식 등을 바꿔야겠지. 이것은 너무나 복잡한 작업이기 때문에 세상의 법칙을 다 고려해서 이루어 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네. 그나마 가장 쉬운 유일한 방법은 자네 부모를 죽이고, 조건에 적절한 새로운 양부모를 구해서 그들을 매수해 연기를 시키는 것이겠지. 어떤가? 정말로 그러고 싶은가?”


순간, 천사의 눈빛이 낯선 광기로 번득였다. 현빈은 그 찰나의 눈빛에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두려움에 떨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천사는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세 천사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고, 현빈 역시도 평소의 모습대로 행동을 이어갔다.


“자네의 직업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기는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걸세. 문서를 위조할 수는 없게 되어있으니 내가 자네가 공부하는데 필요한 기억을 좀 돕는다면 남들보다는 훨씬 쉽게 시험에 합격할 수는 있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반의가 되려면 6년은 걸릴 테고 전문의가 되려면 10년, 검사가 되려 해도 시간은 꽤 걸리겠구먼.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네.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어느 정도 이상은 스스로 해내야 하지.”


“아! 이거! 뭐가 늘 이리도 복잡해요? 이것도 문제다, 저것도 문제다 하시니. 제가 지금 와서 무슨 공부를 하겠어요. 넘치는 돈 술 마시고 놀면서 쓰느라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


성질을 내는 현빈을 보고 천사는 어이가 없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이 사람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천사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말없이 창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정장차림을 한 천사의 넓은 어깨와 날렵한 역삼각형 몸매의 뒷모습이 간접 조명을 받아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천사가 다시 현빈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왜 그리 급히 서두르는지는 나도 알고 있네. 미인인 데다 돈 많고 집안 좋은 여자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겠지. 더군다나 경험도 별로 없는 자네이니.”

천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여느 때처럼 무심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말을 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회사를 하나 인수해서 경영하도록 하게. 요즘은 창업자들이 회사를 매물로 내놓는 경우가 많아. 자네처럼 돈이 있는 사람이 그런 회사를 인수해서 대표가 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자네에게는 매달 수억씩 자금이 조달되고 있으니 말이야.”


“스타트업 같은 거 말씀이세요?”

“그렇지. 기술도 이름도 그럴싸한 회사를 하나 사게. 기업가치가 너무 높지 않은 곳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자네 명함에 대표이사나 CEO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어도 꽤 효과가 있을 걸세.”

그 제안은 꽤나 현실적이었다. 집안도, 직업도 없던 그에게는 돈뿐이었다. 이제 그 돈으로 '뭔가 된 사람'처럼 보이는 역할을 만들어내야 할 타이밍이었다.


며칠 뒤, 현빈은 인수 컨설팅 업체의 중개로 헬스케어 관련 소형 스타트업 하나를 인수했다. 회사의 매출은 미미했고, 직원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회사 홈페이지는 그럴듯했고, 무엇보다도 ‘대표이사’라는 명함은 기대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포르쉐에서 내리며 명품 정장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는 순간, 현빈은 진짜 뭔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는 자신이 자수성가한 사업가라고 믿고 싶었다. 새로 관계 맺는 이들에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것은 물론이었다.



현빈이 회사를 인수하고 경영자의 자리에 앉은지도 몇 달이 흘렀다.


‘회사는 돈만 있으면 굴러간다’

그가 가졌던 기존의 생각은 참으로 무지한 것이었다. 회계도, 마케팅도, 인적 자원관리도, 경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어느 날 아침, 부하 직원이 그를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덮어두고 넘어가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저절로 굴러가는 회사도, 권위로만 운영되는 사장의 자리도 없었다.


사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회사 안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장은 사장실에서 남의 눈치 볼 일이란 전혀 없는 듯이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지루하면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며 골프나 치러 다닐 수 있는 줄 알았다. 직원들을 뽑아 놓으면 회사는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그까짓 거 나라고 못하겠나 하는 생각으로 쉽게만 생각했다. 결국 깨달은 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착각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치명적인 오류였다. 결국 그는 경영과 관련된 전문적인 일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전문경영인을 고용해 CEO 타이틀을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 년 가까이 계속된 복권 당첨으로 쌓은 재력과 기업의 소유라는 기반을 바탕으로 어떻게든 상류층에 끼어 보려고 애를 써보았다. 하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상류층을 딱히 뭐라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류 사교클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집안 내력을 포함해 부모의 재산과 직업까지, 종합적인 고려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현빈의 태생적 조건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류사회에 들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완전히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진정한 상류층에는 끼지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 허들이 낮고 개방된 사교클럽을 통해 나름대로의 인맥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인맥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진솔한 교양이 부족한 졸부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물질적 풍요가 주는 안락함에 삶의 뿌리를 내린 이들이었다.


현빈은 소위 마담뚜라 불리는 부유층 대상의 중매쟁이로부터 미희를 소개받아 사귀게 되었다. 물론 시대에 걸맞게 결혼정보 회사도 성업 중이었지만 결혼이라는 목적이 부담스러운 이들은 많았다. 그렇기에 비슷한 부유층 간의 연애를 목적으로 한 소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미희는 한국의 80년대 강남 부동산 개발 붐 시대의 중심에 부동산 재벌로 자수성가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부유층에 소속된 부류 중 한 사람이었다. 현빈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소연이 이상향처럼 남아 있었다. 그는 가끔씩 소연을 떠올리며 아쉬운 미련과 감상에 젖기도 했지만 더 이상 실제로 접촉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저 가질 수 없는 아련한 미지의 여인으로만 남겨두었다.


“회사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이더니 요즘은 좀 어때? 괜찮아?”

“어. 이제 괜찮아졌어.”


현빈은 미희의 질문에 가능한 한 짧게 대답하려 애썼다. 회사만 떠올리면 점점 더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회사를 인수해서 망하게 생겼다는 불만이 직원들 사이에 가득했고, 교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월급 사장은 겉으로만 예의 바른 척하면서 은근히 현빈을 무시하고 있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치면 하루 종일이라도 미희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이미 자신의 신상과 관련된 많은 거짓말들을 늘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코 마음속 이야기들을 내보일 수 없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피로했던 현빈은 미희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잠깐 눈을 붙였다. 잠시 후 깨어난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어둠이 짙게 드리웠고 달리는 차량도 많지 않은 한적한 도로였다. 큰 강을 오른쪽에 두고 강변으로 이어진 도로가 낯이 익었다. 팔당대교를 지나 양수리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기다려 봐. 내가 멋진 곳을 알고 있으니.”


미희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빈은 그렇게 당찬 미희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미희는 모든 행동에 거리낌이 없고 적극적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 했고,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고야 말았다. 웬만해서는 자신의 배경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재력으로 못할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마찰과 충돌이 생기더라도 그다지 개의치 않고 해치워버리는 성격이었다. 어릴 때부터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집안에서 자란 환경 탓이 아닐까 하고 현빈은 생각했다.


미희는 외모로 보아서는 어디서도 빠질 일 없는 미인인 데다 패션 감각이 있고 돈을 들여 치장할 줄도 알았다. 현빈과 미희가 사교 모임에 동행할 때 꽤나 세련되고 조신하게 처신할 줄 아는 그녀였기에 남들로부터 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타인을 부리기만 하며 살던 그녀의 습관 때문에 가부장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던 현빈에게는 그녀의 그런 점이 그다지 편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빈에게 그녀는 그다지 싫지도 않았고 헤어질만한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물질적으로 든든한 배경이 지금처럼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불편한 그의 생활(천사의 희한한 방식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복권이 당첨되고 있다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이유가 되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에 대학 동창회에서 만났던 녀석들 어떻게 보였어? 너무 속이 들여다보여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더군.”

현빈은 최근 미희와 함께했던 자신의 동창모임에서의 일이 떠올라 물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현빈은 가난한 공무원 준비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명품 정장을 입고 포르쉐를 타고서, 부티나는 아름다운 여자와 연인이 되어 동창모임에 등장했으니 동기들의 눈은 충분히 뒤집어지고도 남았다.


이후로의 스토리는 너무나 뻔했다. 예전에는 그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던 이들이 다가와 친한 척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변화를 보며 현빈은 구역질이 나도록 역겹다고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면도 분명히 있었다. 그래, 그렇게 예전과는 다른 낯으로 살살 웃으며 내 돈을 보고 구더기처럼 꼬여 들어라. 그런다고 내가 빤히 들여다 보이는 네놈들 속을 모를 줄 아느냐!


현빈의 물음에 미희는 깔깔거리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현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덤덤하게 대답했다.

“인간이란 다 그런 거야. 강자에게 엎드리고, 뭔가 얻어 낼 것이라도 있을까 하며 빌붙지. 그러면서도 약자에겐 잔인하기 짝이 없어. 인간 사회의 법칙도 정글이나 똑같아. 약육강식이 통하는 곳. 나는 그걸 즐겨. 어차피 나는 강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순간, 현빈은 미희의 눈빛이 두렵게 느껴졌다. 단호하고도 냉정한, 먹이를 응시하는 맹수의 눈빛 같았다. 현빈은 잠깐이나마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꼈다.


“현빈 씨는 빈손으로 시작해서 사업을 키워왔다고 했으니 아직 익숙하지 않겠지만, 곧 익숙해져야 할 거야, 이런 약육강식의 논리에.”


현빈은 다시 한번 조마조마해지는 마음을 쓰다듬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사업을 통해서 지금까지 부를 키워왔다고 속여온 거짓말 때문이었다. 하려고만 들면 미희에게 타인의 뒷조사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닐 것이었다. 현빈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몇 달 전 민석과 만났던 때처럼 맑은 밤하늘에 떠오른 달이 강물에 비쳐 넘실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물결치는 호수 표면만 보며 그것이 자신의 전부인 줄 알지.’

그렇게 말하던 민석이 떠올랐다. 생경하게만 느껴졌던 말이 이제는 물질적 부의 이미지에 갇힌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 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물결 위의 그림자를 내 진짜 얼굴이라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빈의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듯 계속 이어졌다. 녀석이 말했던 물결치는 호수 표면이라는 건 나의 외적인 조건들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나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에 더욱 괴로워진다는 말일까? 나의 본질…… 하지만 돈이 나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 나를 행복하게 도와주는 도구다. 하지만 어째서 전보다 훨씬 더 큰 부를 소유하고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다지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은 것일까? 나의 본질이 다른 뭔가라면 대체 그건 뭘까?


현빈이 깊은 상념들의 성간을 헤매는 동안, 포르쉐는 넓고 매끈한 국도를 빠져나와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들어섰다. 미희는 넓게 펼쳐진 남한강이 마주 보이는 공터에 차를 세웠다. 아련한 달빛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속절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여기 어때? 너무 멋진 곳이지?”

미희는 조수석으로 고개를 돌려 현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끈적했고 눈빛엔 욕망이 짙게 고여 있었다.


“시트 좀 뒤로 젖혀볼래?”

현빈은 그녀의 의도를 짐작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선뜻 반응하지 못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당장은 그저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며 그저 달리고 싶었다. 그렇게 그가 주춤거리는 사이, 뒤에서 갑작스레 울리는 굵은 배기음이 정적을 가르며 덮쳐왔다.


브아앙!

3대의 오토바이가 도로를 미끄러지듯 가로질렀고, 양 옆과 뒤로 그들의 프로쉐를 에워쌌다. 앞에는 어두운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퇴로는 없었다.


“차가 참 멋지시네. 꽤나 부자인가봐.”

세 명의 남자가 헬멧을 벗으며 다가왔다. 굵은 팔뚝과 헐렁한 상의 사이로 문신과 흉터가 번갈아 드러났다. 현빈은 반사적으로 미희에게 소리쳤다.


“창문 닫아! 빨리!”

미희가 떨리는 손으로 차창을 올리려 도어 팔걸이의 버튼을 건드렸지만 창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는 시동이 꺼진 상태였고 모든 전기장치들도 멈춰 있었다.

“어, 어… 어떡해…”

그 순간, 한 남자가 열린 운전석의 창문 틈으로 재빨리 쇠파이프를 들이밀었다. 쇠파이프가 쇳소리를 내며 도어를 스치자 미희는 꺅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렸다. 차 안은 순식간에 거친 공포가 밀물처럼 들이쳤다.


“나는 체질적으로 돈 많은 양반들을 싫어한단 말이지.”

쇠파이프를 치켜든 놈이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잭나이프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칼을 접었다 뺐다 하는 놈이 거들었다.

“보아하니 우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시는 것 같은데. 무슨 수로 이렇게 돈이 많으신가.”

“부모를 잘 만나셨나.”

“우리 같이 가난한 서민들 등을 치셨나.”

세 명은 각각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듯 한 마디씩 내뱉었다. 현빈은 순간, 현실이 아닌 듯 멍해졌다. 주변의 소리는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리서 웅웅거리는 듯했다.


'제발 이것이 꿈이라면 당장 깨어나기를...'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악몽 같은 현실은 지속되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 얼어붙은 공포는 그 시간을 엿가락처럼 당겨서 길게 늘여 놓은 듯이 느껴졌다. 심리적 시간이 늘어난 만큼 공포는 훨씬 더 크고 깊게 덮쳐왔다. 냉정하고도 비참한 현실에 어떻게든 대응해야 할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냥 나가서 붙어볼까… 상대도 안될 것 같지만… 아냐, 가진 거 다 줄 테니 곱게 보내 달라고 싹싹 비는 게 낫겠어.’

쿵쿵쿵쿵.

그의 심장은 숨 쉴 틈 없이 빠르게 흔들리는 메트로놈처럼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생각은 토끼처럼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꼼짝없이 얼어붙은 몸은 거북이 같았다. 마음과 몸의 엇박자가 극에 달하며 머리까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내가 보기보다는 신사적이야. 여자는 안 건드릴 테니 걱정 말라고."

쇠파이프를 든 녀석은 소매가 거추장스러운지 팔을 걷어 올렸다. 울퉁거리는 근육으로 가득한 팔에는 흉흉한 문신과 흉터가 보란 듯이 드러났다. 그들은 차문을 벌컥 열고서 현빈의 셔츠 깃을 잡고 끌어냈다.


“이 새끼야, 빨리 나와! 네 년은 시동 걸고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마!”

거친 욕설에 미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술을 달달 떨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놈들은 지갑을 빼앗고 카드와 현금, 그리고 신분증까지 꺼내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현빈의 지갑 안에는 오만 원권 지폐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한 녀석이 중얼거렸다.


“돈 진짜 많네.”

미희의 얼굴에 칼날을 바짝 들이댄 남자가 으스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강도 아니야. 그냥 자릿세 좀 받는 거야. 나중에 신고라도 하면… 끝까지 찾아가서 예쁜 얼굴에 줄 몇 개 그어줄 테니까 조심해라. 알았어?”

“오늘 니들 운 좋은 줄 알아. 우리가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개망신살 뻗치는 건데.”

"우리만 아까운 구경을 놓쳤군!"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달빛이 아름다운 만큼이나, 그들이 부유한 데이트족들을 노리는 상습적인 표적이 되는 장소였다. 돈을 빼았겼으니 이제 해결된 걸까? 현빈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퍽!

그의 턱에 주먹이 날아와 꽂혔다. 턱이 돌아가고, 몸을 휘청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쓰러진 현빈에게 발길질하고 밟기 시작했다.


퍽! 퍽! 퍽!

한적한 시골의 아름다운 강변을 폭행하는 둔탁한 소리가 소란스레 울려 퍼지며 정적을 깨뜨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정당한 폭력이라 여겼고 현빈을 향해 사회적 불만으로 응어리진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원래 돈 세가며 만 원에 한 대씩만 패는데!”

“너 이 부자 새끼! 돈이 너무 많으니 이자만큼 더 맞아야지!”

"씨발, 여자 몸은 안 건드리는 걸 고맙다고 알아!"


현빈은 본능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팔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서 어떻게든 버텨야만 했다. 끊임없이 날아드는 발길질에 다시 일어설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그들의 발길질도 서서히 지쳐갔고, 마침내 멈췄다. 분이 다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입으로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바이크 시동 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들은 멀어져 갔다. 다시 찾아온 정적 사이로 미희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마치 자신의 나약함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돈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포르쉐도, 명품 옷도, 그 무엇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 결국 현빈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가 어지러움과 함께 통증이 느껴지는 머리에 손을 대자 피가 흐르고 있었다. 팔이 욱신거렸고 갈비뼈가 눌리는 듯한 감각에 숨 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몸보다 더 아프고 힘든 건 자존심과 후회였다.


‘왜 진작 천사에게 힘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돈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현빈은 입 안에 고였던 피를 뱉으며 다짐했다.

'반드시 다시 돌아와 복수하고야 말리라.'


9장


"다른 사람을 정복하는 자는 강하지만,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자는 진정으로 강하다."
- 노자


현빈은 그날의 굴욕을 결코 잊지 못했다. 천사를 다시 불러 물었다. 힘을 달라고, 놈들을 박살 낼 수 있는 육체적인 힘을. 하지만 천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게 무작정 힘을 쥐어 줄 수는 없네. 그건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지.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정상적인 몇 년간의 훈련을 아주 효과적으로 대신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어.”


이미 충분한 재력은 갖추고 있었기에 현빈은 쉽게 개인 훈련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천사는 현재 알려진 것 이상으로 발달된, 미래의 신체 발달을 위한 정보 같은 것들을 현빈에게 알려주고 직접적으로 적용시켰다. 그것은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천사와 함께하는 기술적인 대련들 또한 이미 이 세상의 기술들을 까마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현빈에게 미묘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건 중국의 기공사들이 운용하는 특수한 에너지라고 했다. 그렇게 효과적인 훈련으로 단 한 달 만에 그는 실전에 가장 효과적인 싸움 기술과 신체 능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혈혈단신으로 다시 찾았다. 역시 그날의 폭력배들이 그를 에워쌌지만 현빈은 단숨에 놈들을 제압했다. 전쟁의 신이 그에게 빙의라도 된 듯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쓸어버렸다. 그는 천사가 전해준 물리적 힘의 우월성을 완전히 확인했기에 모든 것을 다 이룬 듯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 돈, 명예, 힘까지. 나는 완벽하다.'

내내 마음에 걸렸던 과업을 마치고 자신의 애마 포르쉐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그는 기쁜 마음에 콧노래를 불렀다. 평소에는 잘 듣지도 않던 최신 걸그룹의 음악을 켜고 핸들에 탁탁 손짓을 하며 리듬도 맞췄다. ‘나는 완벽하다, 나는 완벽하다.’ 그러나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내면 어딘가 텅 빈 공간이 있는 느낌… 모든 것을 다 갖춘 듯한 이 순간에도, 그는 온전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문득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거의 모든 퍼즐을 다 맞추었는데, 그래서 기쁨에 가득 차기 일보 직전의 순간이었는데, 마지막 한 개의 퍼즐이 없었다. 온 방안을 다 뒤지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잃어버린 퍼즐조각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때 어린 현빈이 깨달은 것이 있었다. 모든 걸 다 이루더라도 끝내 마지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욱 괴로워진다는 사실이었다. 차라리 이루지 못한 것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처지가 딱 그때처럼 느껴졌다. 마치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비어 있는 그림처럼, 허전함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이토록 많은 걸 얻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과연 행복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현빈은 순간,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주름진 하회탈 같은 얼굴, 굵은 손마디,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내는 마, 지금 이대로면 행복한 기라. 따뜻한 밥 세끼 먹고, 아프지 않고, 하루하루 일할 수 있으면 됐다 아이가.”

절대로,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야. 그런 건 위선이야. 돈 없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어.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 모르는 거야.’

현빈은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도대체 뭐가 더 필요한 거지?’

잠시 잊고 싶었다. 행복의 정체, 퍼즐의 빈자리, 그 모든 생각들을.



그날 밤, 현빈은 발걸음을 돌려 익숙한 강남 골목 안쪽, 단골 바인 '아리엘’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술 한 잔과 함께 마음을 내려놓기엔 딱인 곳이었다. 너무나 익숙해진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재즈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바에서는 그를 알아본 바텐더 유민이 활짝 웃으며 반겨주고 있었다.

“오늘은 일이 많으셨나 봐요. 옷이 많이 구겨지셨네요.”


바텐더 유민은 현빈을 금세 알아보고 활짝 웃으며 반겨주었다. 현빈은 혼자서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찾아오는 단골이었다.


“네. 그럴 일이 좀 있었네요. 오늘도 늘 마시던 걸로 한 잔 주시죠.”

형편이 좋아진 뒤, 현빈이 새로 들인 취미는 술 아니면 여자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렇게 혼자 조용히 들르는 바는 그나마 건전한 편에 속했다. 현빈은 아리엘을 찾을 때면 늘 혼자였고 유민의 앞자리에 앉아 칵테일 두세 잔 정도를 마시곤 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현빈의 직업이나 성공의 비결을 묻지도 않았고, 노골적인 호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 유민의 편안함이 그를 아리엘 바의 단골로 이끌었다.


그의 태생이 부유했다면 사람들의 호감이 순수하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모든 게 변함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태도의 변화가 자신이 소유한 것들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갑작스레 생겨난 부의 소유 이후로 180도로 바뀐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경멸했다. 게다가 그는 그렇게 이중적인 가면을 쓴 자신에게도 남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이중적인 감정은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빈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 연기가 실내를 안개처럼 감싸는 가운데, 소니 롤린스의 'You Don’t Know What Love Is'가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흐르고 있었다. 그는 유민에게 주문했던 블랙러시안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진한 커피향이 코끝을 간지럽히고 보드카의 높은 도수의 강렬한 알코올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이럴 때면,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안개 같은 무언가 자신을 휘감는 듯했다. 그것은 때로는 과거에 대한 향수이고, 때론 현재에 대한 회피이기도 했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과거와 현재에 관한 그런 감정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는 몇 달 동안 천사와 함께한 이 놀라운 여정을 잠시 돌아보았다. 그 시작에는 그녀, 소연이 있었다. 그는 분명 그녀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도 닿을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일까? 늘 마음속 깊숙한 한 구석에 이상향처럼 자리 잡은 그녀였지만 이제는 안개에 가려진 존재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런 감정을 진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그저 집착일 뿐은 아니었을까?


진짜 사랑이라는 건 뭘까? 또 참된 행복은? 술잔을 홀짝거리며 만지작거리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테이블 너머의 유민에게 물었다.


“유민 씨는 사는 게 행복해요?”

뜬금없는 질문에 유민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혼란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색에 가까웠다.


그녀는 깔끔한 정장 유니폼을 입고, 긴 생머리를 단정히 묶었다. 외모는 단정했지만, 표정과 말투에서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동시에 단단하게 중심이 잡힌 사람이라는 인상도 주고 있었다. 현빈은 큰 기대 없이,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툭 하고 질문을 던진 것뿐이었다. 그의 질문은 그녀의 모습에서 풍겨오는 은근한 평온함 때문이었는지도, 이런 곳에서 일하는 그녀가 자신도 찾지 못한 걸 찾았을 리 없다는 자만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행복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집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네. 저는 행복해요. 적어도 지금은요.”

밝고 환한 웃음과 함께 그녀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현빈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정말일까? 아니야. 저건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보상심리일 거야.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저 있는 척하는 여자의 허영일 뿐일 거야. 어떻게 행복할 수 있지? 나는 이렇게 많은 걸 가졌는데도 너무나 공허한데? 현빈은 자신의 혼란이 표정으로 드러날까 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요? 멋진 일이네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잖아요.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돼도, 그건 행복과는 다른 것 같아요. 뭔가 항상 부족한 느낌...”

유민이 조금은 부러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뭐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나요?”


“그래요. 난 많은 돈을 벌었고,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요. 큰 힘도 얻었고요. 그런데도 행복하지 않아요.”

그는 감정에 휩쓸려 말을 하다 보니 너무 속을 내보인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울컥하고 목이 잠기는 듯했지만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것만으로는 행복해지지 않다는 걸. 그런데 유민 씨는 어떻게 행복할 수 있죠?”

그는 절박했다. 세상의 전부를 가진 듯한 자신이 왜 이렇게 허전한지, 어째서 행복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지, 그는 정말로 알고 싶었다.


“저도 방금 생각해 본 거예요. 제가 행복한지 아닌지. 그런데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알겠더라고요.”

“어떻게요?”

“글쎄요. 가슴으로 느껴지는 그걸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네요. 저에게는 꿈이 있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바텐더가 되는 거예요. 혼자 책을 읽으며 공부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요.”

“힘들지 않았나요?”

“물론 힘들죠. 하지만 즐거워요. 제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까요. 맛있는 칵테일을 내드리고, 손님들의 표정을 보는 것도 즐겁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해 드리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예요. 언젠가는 꿈이 이뤄질 거라는 믿음으로 매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지금이 참 행복해요.”

현빈은 문득 오래전 읽었던 시집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시인은 행복과 사랑을 함께 노래하고 있었다.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행복과 사랑, 둘은 결국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행복을 모르는 당신이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시인은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 홀로 선 자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런 행복만이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고.


'둘이 선 하나가 만나는 것이 아니다.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홀로 선다는 건 도대체 뭐지? 홀로 섰을 때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이지? 두 사람 모두 홀로 섰을 때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건? 어쩌면 꿈을 가지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유민은 홀로 서고 있는 중인 걸까? 현빈은 그 말이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듯 느껴졌다.

현빈이 유민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운동 꽤나 했을 법한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유민 앞에 앉더니 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민 씨,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너무 속상해서 술 좀 먹고 왔어요. 미안해요...”

유민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많이 취하셨네요. 자꾸 이러시면 곤란해요. 시원한 무알콜 음료라도 한 잔 드릴게요.”

사내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 보기보다 괜찮은 사람이야! 왜 자꾸 무시해!”

취기에 비틀거리던 그는 중심을 잡으려 테이블을 짚었지만 현빈의 술잔을 건드려 떨어뜨렸다. 술잔은 산산조각 났고, 계속 참고 있던 현빈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취객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왜 싫다는 사람에게 자꾸 귀찮게 굴어?”

현빈의 체격도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취객과의 체급 차이는 상당했다. 겉보기에는 커다란 곰 앞에 여우가 으르렁대는 것만 같았다. 두 사내가 서로 마주 보며 이글거리는 눈빛을 교환하던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유민의 말이 오히려 현빈의 타오르는 마음에 기름을 붓는 듯했다. 도와주려는 자신을 만류하는 그녀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때, 취객이 현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비아냥거렸다.


“아저씨는 상관할 바 아니니까 그냥 술이나 드시고 조용히 가세요. 깨진 술잔 값은 내가 낼 테니까.”

취객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현빈은 역겨움과 함께 짜릿한 우월감을 느꼈다. 과거의 무력했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판단은 사라지고, 오직 상대를 굴복시키고 싶은 원초적인 충동만이 남았다. 그는 충동의 흐름에 휩쓸려 상대의 팔을 잡고 비틀었다. '뚝' 하는, 둔탁하지만 선명한 소리가 그의 팔뚝에 만족스럽게 전해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취객을 향해 현빈은 명함을 꺼내 취객에게 던졌다.

“고소든 뭐든 마음대로 해. 합의금은 두 배로 줄 테니까.”

바를 걸어 나오는 동안 현빈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꼈다.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향으로 향하는 개선장군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뿐,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바를 나선 그의 마음은 집으로 향하는 내내 불편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고 했던가, 자신의 처지가 딱 그런 꼴이었다. 높은 사다리를 오른 만큼이나 더 어둡고 깊은 구멍으로 추락하길 반복하는 심정이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과 생각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원래부터 이렇게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었나? 왜 이겼는데 기쁘지 않은 거지? 그 놈을 완벽하게 짓밟았는데, 왜 마음은 더 깊은 구멍으로 빠져드는 것 같지?'

그는 자신이 휘두른 힘의 무게를, 그 뒤에 따라올 공허함을 아직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진정한 행복으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졌다는 막연한 불안감만이 그를 잠식할 뿐이었다.



[로드시커 외전] 아리엘에서 만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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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이름을 끝내 알지 못했다.
단골 바 아리엘에서 마주친 건 세 번째였지만, 대화를 나눈 건 마지막 한 번이었다.
그녀는 그날 유난히 붉은 립스틱을 발랐고, 자주 넋이 나간 듯한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붉은 와인잔을 비울 때마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착각은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외로움에 질식되어 가는 듯한 목소리처럼 들렸다.


“혹시… 소리 들려요?"

말을 건네고도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아, 당신에겐 들릴 리가 없죠."

“어떤 소리요?”

“밤마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요. 누군가 저를 불러요. 벽 너머에서도, 창문 너머에서도, 내 안에서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두 가지 생각이 뇌의 좌측과 우측을 동시에 잠식하는 것만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


나는 조용히 술잔만 들이켰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와인잔만 만지작 거렸다.


*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며칠 뒤였다.
극단적인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취방 침대 위에 숲 속의 잠자는 공주처럼 영원히 잠든 채로, 친구에게 발견되었다고 했다.

빈 와인잔과 함께 많은 수면제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녀는 유서를 통해 자신의 유품 정리를 나에게 부탁해 왔다.

바에서 그녀와 함께 어울렸던 지인의 말로는, 그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호감을 보였던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망자의 유언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처음 그녀의 방에 들어섰을 때 나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환기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창문은 닫혀서 잠겨있었고, 암막 커튼으로 낮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방 안은 묘한 한기가 들었고 옅은 향 냄새가 풍겼다. 디퓨저의 향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절에서 쓰는 향의 냄새가 아닌가 싶었다.


망자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큰맘 먹고 방문했지만 오래 머물기에는 뭔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서 정리해야 할 그녀의 유품들을 챙기고, 업자를 불러 가구들을 치울 수 있게 약속을 잡았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그녀의 방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한참 동안 나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를 잊을 거예요.”


꿈에서 깬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오싹한 느낌에 온몸의 털이 쭈삣 서는 느낌이었다.

남은 짐 처리는 업자를 불러서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 방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밤이면 누군가 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벽 너머에서도, 창문 너머에서도, 자신의 안에서도,

소리는 깨어서도, 잠든 후 꿈에서도 계속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는 향내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방에서 맡았던 향내였다.


나는 점점 더 그녀의 감각과 유사한 것들을 경험하고 있었다.

입맛을 잃었고 나날이 체중이 빠졌다. 미칠 것 같아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갖 병원들, 한의원들을 찾아갔지만 이상이 없다는 소견만 듣게 될 뿐이었다.


수소문 끝에 나는 용하다고 소문난 강남의 한 무속인을 찾았다.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여자 무당이었다.


“그건 기운이 전이된 현상이에요. 망자의 기운이 살아있는 자의 마음을 타고 옮겨 붙는… 한의 전이.”

무속인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혼에 접신한 무속인은 그녀의 목소리로, 마치 그녀가 된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늘 그랬죠.

나의 부모에게 조차도 난 사랑받지 못했어요."


그녀가 된 무속인은 잠시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죠?

내가 그토록 간절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봤는데도."


무속인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지만.


무속인은 그녀와의 교신, 아니 빙의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기 전, '영원히, 아무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절망'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었다고 했다.

굉장히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자신의 경험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단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그녀의 감정은 증오보다 무거웠고, 그래서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무속인의 말에 의하면 이 일은 뿌리 깊은 자기비하와 집착의 감정이 낳은 정신세계로의 투사였다.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이,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기던 고통이,
그녀의 마지막 집착의 대상인 나의 마음에 실체화된 화살처럼 날아와 꽂힌 것이었다.


*


사건의 전말을 이해한 나는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그녀의 짐들 중 뭔가 중요한 것이 남아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노트 한 권을 찾아냈다. 그녀의 일기였다.

노트에는 때로는 낙서처럼, 또 때로는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들이 쓰여있었지만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겨우 한 번 스쳐 지나듯 만났을 뿐이지만, 나를 사랑해 준 마음을 고이 간직해주고 싶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몰랐던, 세상의 어떤 누구보다도 자신부터 먼저 사랑할 줄 몰랐던 어리석은 사람...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만이 가득했다.


나는 그녀의 일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을 곁에서 보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어디선가 불어온 미풍이 가볍게 나의 뺨을 어루만지듯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노트에 불을 붙였다.

불꽃은 금방 타올랐고, 마치 그녀의 한을 정화라도 하는 듯 하늘로 날아오르며 흩어졌다.

나는 연기를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밤하늘에 별똥별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듯 떨어지고 있었다.




10장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성경, 고린도후서 11장 14절


경영에 뜻도 능력도 없던 현빈에게 회사 운영은 고된 짐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전문경영인을 들였지만, 갈등은 끊이지 않았고 임직원들의 시선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 내부 혼란은 지속됐고 CEO는 교체됐다. 결국 회사는 구멍 난 침몰선처럼 가라앉으며 장외시장의 주가는 연일 폭락을 거듭했다. 스트레스에 짓눌린 현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회사 경영에서 마음을 놓아버렸다. 어렵게 영입한 세 번째 CEO는 사세 확장의 욕심은 컸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무리한 확장에 나섰다.


무엇보다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일 년 가까이 매주 빠짐없이 당첨되던 복권이, 2주 전부터는 연속으로 당첨되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의 위기보다도 이 끊어진 ‘기적’의 흐름이 현빈에게는 더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는 몇 날 며칠을 계속해서 천사를 불러보았지만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천사가 몇 차례 늦은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무소식의 기간이 불길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결국 무리한 확장 끝에 회사는 유동성 위기를 맞았고,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빈은 미희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차가운 표정과 함께 돌아온 건 싸늘한 한마디뿐이었다.


'현빈 씨는 능력이 있으니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말은 얼음 조각이 담긴 선물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는 파산했고 현빈이 쥐고 있던 주식은 모두 휴지조각이 되었다.


천사가 사라진지 한 달, 현빈은 비싼 월세의 고급 오피스텔에서도 쫓겨났다. 이제는 편히 누울 잠자리조차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포르쉐 한 대뿐이었다. 그 차만은 마지막 자존심이자, 언젠가 천사가 다시 나타나 모든 것을 되돌려줄지 모른다는 상징처럼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결국 그가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부의 상징, 포르쉐마저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의 주변에서 기회를 엿보며 서성이던 미녀들도 아첨하던 이들도 모두 사라지고야 말았다.


그는 술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제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이도 없었다. 친구 민석의 얼굴이 종종 떠오르곤 했지만, 도저히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자기 삶에 진심을 다하며 살아가는 민석 앞에서 돈 좀 벌었다고 우쭐거리던 자신을 떠올리면 너무나 부끄러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는 싸구려 술집을 전전하며, 천사가 다시 찾아오길 바라는 희망 하나로 겨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천사는... 그냥 늦는 것뿐이야.’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진폭은 점점 더 잦아졌다. 하지만 천사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진창에 빠진 것처럼 헛바퀴만 돌았다. 희망은 마치 정오의 시계를 쫓는 그림자처럼 짧아지고만 있었다.



“어이, 아저씨.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

밤늦은 거리, 술에 취한 채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 사이를 정처 없이 떠돌던 현빈은 지나가던 무리와 어깨를 부딪쳤다. 비틀거리며 고개를 든 그가 마주한 건, 스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남녀들이었다. 남자 넷에 여자 하나,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과 건들거리는 태도는 누가 보더라도 불량 청소년들이었다.


“어린 것들이 어디 어른한테 반말이야! 까불지 말고 집에 가서 공부나......”

현빈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비를 걸던 녀석이 ‘지랄하네’라고 욕을 하며 주먹을 날렸다. 현빈은 날아오는 주먹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몸이 예전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어, 이상하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퍽! 번쩍이는 충격과 함께 정신이 아찔해졌다. 주먹은 그다지 세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몸이 무거웠다. 곧이어 주먹과 발길질이 연달아 쏟아졌다. 바닥에 쓰러져 밟히면서도 그는 계속 생각했다.

‘왜 이리 몸이 무거워졌지? 왜 이렇게 둔해진 거지?’


그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천사가 심어주었던 힘조차 사라졌음을.

그를 폭행하던 아이들은 지나가던 행인들의 인기척에 달아나버렸고, 텅 빈 거리에 그는 혼자 남았다. 얼굴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모노드라마의 독백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설마, 천사는... 완전히 사라진 걸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졌다. 절벽에서 실낱 같은 나무뿌리 하나에 매달려 있는 심정이었다.


“천사는 돌아올 거야...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살려달라는 듯이 외쳤다. 아니, 어쩌면 천사를 부르는 주문처럼 소리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희미한 별빛 같은 희망조차 사라진 순간, 그의 마음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 네가 원하던 대로 살아본 기분은 어때?”

고개를 떨군 채 흐느끼던 현빈의 앞에,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듯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 천사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여전히 검은 정장 차림이었지만 눈매는 매섭게 찢어져 있었고, 입가엔 사악한 웃음이 비죽 올라 있었다. 예전엔 온화한 빛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이제는 싸늘한 냉소와 조롱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현빈은 잠시 망설였지만 익숙한 존재에 대한 갈망이 앞섰기에 소리쳐 불렀다.


“천사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그 존재는 얼굴의 일그러진 표정에 걸맞는, 불쾌한 웃음소리를 낄낄대며 흘렸다.

“천사? 대체 누가 천사라는 거지? 나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였어.”

“악… 악마?”

현빈의 동공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분명히 천사라고 하셨잖아요!"

현빈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풀리는 다리를 애써 버티며 벽을 짚었다.

"이 순진한 친구야. 그 정도 거짓말에 넘어간 건 너의 욕망이 눈을 가렸기 때문이었지. 이제야 눈치챈 건가? 나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현빈은 넋이 빠진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악마가 머리에 뿔 달고 꼬리 달렸다고 믿나? 그런 건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야. 진짜 악마는 어디에나 있어. 겉모습만으론 절대 알아볼 수 없지.”


악마는 현빈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한 모습에 더더욱 신이 난 듯 힘주어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자네에게 나쁜 짓을 한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게.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빈 건 누구였지? 힘을 달라고 애원한 건? 폭력배들을 짓밟으며 쾌감을 느낀 건 누구였나? 나는 자네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야. 자네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잠자고 있던 진짜 자네의 욕망을 깨워줬을 뿐이라고.”

"......"

“자, 봐. 지금 자네가 빠져 있는 이 절망의 늪을. 누가 만든 것 같나? 자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작전 성공이야! 이렇게 어리석은 인간을 좀 보라고!"


악마는 기분이 최고라는 듯 목을 젖히고 크게 웃어댔다. 그 음침한 웃음소리는 허공을 가르며 퍼져나가, 땅속 깊은 어둠 속까지 스며드는 듯 오싹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당신은 날 도와줬잖아! 내가 원하던 것들… 그걸 이룰 수 있게 해줬다고! 그런 당신이 어떻게 악마일 수 있어?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전부 거짓말이야!”


“이봐, 세상 좀 분별하며 살지 그랬나? 지금 네 꼴 좀 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간, 바닥보다 더 아래에 처박힌 네 모습을 말이야. 난 처음부터 네 마음을 간파하고 있었어. 네가 탐욕에 눈이 멀어 제 발로 덫에 걸려들길 기다렸지. 그래서 널 일부러 가장 높은 곳까지 올려놨다. 그리고 손을 놔버렸지. 왜냐고? 넌 혼자 힘으론 날 수 없는 놈이었으니까. 네가 스스로의 날개로 날아올랐다면 추락할 일도 없었을 텐데. 넌 내 손에만 의존했고 그런 대가는... 바로 이거야.”


악마는 마지막으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더니, 연기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남겨진 현빈은 무너진 폐허 속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살아갈 용기도, 이유도 없었다. 한때 세상이 다 자기 발 아래 있는 듯했던 그가, 이제는 초라한 현실을 견디는 일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더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단 하루도 살 자신이 없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택시를 세웠다.

“한강대교 쪽으로 가주세요.”

택시에서 내린 현빈은 푸르스름한 조명이 빛나는, 아치형 교각이 펼쳐진 한강대교를 천천히 걸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늦은 밤, 도로에는 차들만 쌩쌩 달릴 뿐 주위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딱 일 년 전 이맘 때였지.’

그는 처음 천사, 아니 악마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들이 자신의 것들처럼 보였던 그때, 얼마나 헛된 희망으로 설레고 흥분했는지. 그런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니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달라질 수 있을까? 자신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을 떠올렸다. 그렇게 죽을 거면 죽기살기로 달려들라고. 그러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냐고. 이제 와서 민석이처럼 땀 흘려 돈을 버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피식, 웃음만 나왔다. 그래서 뭐? 뭘 할 수 있는데?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저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번 맛본 이 지독한 욕망의 독은 평범한 행복마저 시시하게 만들어 버렸다. 악마가 앗아간 것은 돈과 힘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 만족할 수 있는 마음, 그 영혼까지 전부 빼앗아 가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는 난간을 붙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고 깊은 물이 그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고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게 개인 가을 하늘임에도 어둠은 그믐달마저 삼켜버렸고, 도시의 매연은 별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했다. ‘그냥 끝내자.’


그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의 머릿속에서 아우성쳤다. 어머니, 아버지, 시골집, 아직은 꿈이 살아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물을 마시면 정신을 잃게 될까. 그건 얼마나 괴로울까. 잠깐만 참으면 되는 걸까……’

현빈은 깨달았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 결코 실행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는 난간 너머로 몸을 던졌다.


휙, 부웅.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느려지고 있었다. 그의 의식에서일 뿐이겠지만 몸은 아주 느리게, 마치 슬로우모션 장면처럼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 짧고도 긴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세월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지났다.


그리고, 첨벙!

차가운 강물이 마치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그의 몸을 받아치는 듯했다. 주위는 칠흑 같았고, 이윽고 물속에서 나온 검은 손들이 그의 온몸을 잡아당겼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결국 힘이 빠지고 몸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코와 입을 향해 물이 거칠게 밀려들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지만, 들이마신 건 죽음을 재촉하는 검은 물이었다.


빛도, 소리도, 감각도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점점 더 검은 물 속으로 깊이 빨려들어가면서, 아직 조금은 남아있던 의식이 느끼던 최후의 강렬한 느낌, 그것은 원초적인 죽음의 두려움이었다. 자살을 결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그는 잠시 죽음의 공포에 맞서보려 애썼지만, 결국 그것마저도 놓아버렸다.


그리고… 의외의 평온이 찾아왔다. 고통마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고, 어둠은 어릴 때의 담요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깊은 잠에 빠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듯이, 욕망으로 타오르던 의식도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아주 멀리서, 한 사내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청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명’. 이름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그저 멀리서, 그리고 조용히 그 청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만약 현빈이 천사라 불리는 존재를, 메피스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그토록 쉽게 욕망의 날개를 달아주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래도 이렇게 추락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로드시커 외전] 어느 융 심리학자가 본 『로드시커』 1부의 해석

욕망, 그림자, 그리고 내면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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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며 — ‘현빈’이라는 현대인의 자화상


『로드시커』 1부의 주인공 현빈은 평범한 청년이다. 돈이 없어 좋아하는 여성에게 장미 한 송이도 건네지 못했던 남자. 하지만 그로부터 그의 삶은 기이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꿈에서 나타난 ‘천사’의 도움으로 인생은 180도 전환되지만, 그것이 과연 축복이었을까?


융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현빈의 여정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성공담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 ‘그림자와의 대면’, 그리고 ‘자아의 해체’를 향한 깊은 내면의 여정이다. 이는 곧, ‘개성화(individuation)’라는 융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2. 천사인가, 악마인가? — 무의식의 유혹


1부의 중심 축은 ‘천사’로 등장하는 존재다. 그는 말로는 인간의 소원을 이뤄주고 삶을 변화시켜주겠다 말하지만, 그 실체는 끝까지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결국 1부 마지막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그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다는 것.

융은 말한다.


“무의식은 처음엔 돕는 듯 보이나, 그 본질은 의식이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지 시험한다.”


즉, 이 천사는 현빈의 욕망이 만들어낸 투사이며, 외부가 아니라 **현빈 자신의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Shadow)**가 만들어낸 존재다. 자신이 억압해온 욕망, 열등감, 자격지심이 의인화되어 그에게 ‘성공’이라는 미끼를 던진 셈이다.



3. 포르쉐와 명품의 페르소나


현빈은 성공하자마자 외적 상징들에 집착한다. 포르쉐, 고급 옷, 시계, 강남 아파트, 여성의 관심. 이는 융이 말한 **페르소나(Persona)**의 전형이다.
자아(Ego)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가면을 쓰고 사회 속에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그 가면이 지나치게 두꺼워지면, 진짜 자기는 점점 흐려진다.

현빈은 페르소나에 함몰된 채,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산과 절망, 그리고 자살로 이어진다.



4. 꿈과 상징 — 무의식의 언어


1부에는 ‘복권’, ‘천사’, ‘비’, ‘포르쉐’, ‘여성’ 등의 상징이 반복된다. 이것들은 모두 꿈에서처럼 무의식이 사용하는 상징 언어다.

비오는 날: 감정의 정화, 억눌린 감정의 표출

복권 당첨: 인생의 우연성과 내면의 욕망 충족의 판타지

포르쉐: 성공의 상징이자, 남성적 과시욕의 집약체

소연, 유민: 이상화된 아니마(Anima)의 두 양상 — 이상과 현실


융은 "무의식은 상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철저히 무의식의 상징들로 짜인 구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정서적 공명을 일으킨다.



5. 그림자와의 대면, 그리고 붕괴


현빈은 1부 후반부에 이르러 ‘천사의 정체’와 마주하게 된다. 이는 곧, 자기 자신 안에 있던 그림자를 보게 되는 순간이다.

그림자는 우리 안의 어두운 측면이며, 억눌려온 욕망, 분노, 열등감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와 대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거부하거나 도망치거나

압도되어 무너지는 것


현빈은 후자다. 그는 그림자와의 대면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아직 그는 ‘자기(Self)’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1부는 실패로 끝나지만, 실패야말로 진정한 여정의 시작이 될 수 있다.



6. 개성화 여정의 서막


융은 인간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무의식과 의식을 통합하는 개성화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드시커』 1부는 그 여정의 서막에 불과하다. 페르소나 붕괴 → 그림자 대면 → 자아 해체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앞으로의 2부, 3부에서 ‘자기’를 향한 회복과 통합의 여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단지 현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또 다른 ‘현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7. 맺으며 — 『로드시커』는 무의식의 여정이다

『로드시커』는 자극적 사건들로 포장된 현대적 이야기 같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정신의 원형적 여정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성장소설이나 자기계발 서사를 넘어, 융 심리학적 자기 탐색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자신 안의 천사와 악마, 그림자와 빛, 페르소나와 자기를 마주하길 바란다.
그 여정의 끝에서, 진짜 자신과 조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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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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