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다”
처음으로 혼자 떠난 곳이 프랑스였다. 5월의 프랑스는 밤이 짧기 때문에 시곗바늘이 자정을 가리킬 때쯤에야 날이 어두워진다. 그것은 살면서 처음으로 겪었던 일들 중에 하나였다. 하얀 밤, 서울에서 멀고 먼 이국의 땅, 나 홀로 머무르고 있는 숙소에서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초록색 나무들을 보며, 영화 속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청승맞은 표정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곧 어둠이 오면 저 나무들 또한 자신의 종적을 숨기겠지.” 한 번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겠노라 다짐했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불현듯 삼십 년이 넘도록 한 곳에서 살아온 것이 지겹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모두 다 내 곁을 떠났으니 내 몸뚱이 하나 어디에든 싣고 떠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친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그날 나무들의 침묵 속에서 나는 흔들렸다. 하얀 밤동안에 눈동자 속으로 그동안의 모든 말들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닌 곳에서 나는 가까스로 당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저녁은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고 하늘이 듬성듬성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강, ‘모든 흰’, <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