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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마음 Oct 11. 2024

리모컨 실종사건


나의 독백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남편의 설거지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 나는 약간의 과일과 차를 준비해서 거실 테이블로 가져간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우리는 영화 한 편을 골라 함께 보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아주 오래된 명화나, 본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한 영화, 혹은 아이들이 추천해 주는 영화 중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맞는 한 편을 골라 '오늘의 영화'로 선정한다.

자,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편이 거실로 나오면 OTT채널을 찾아 영화를 고르기만 된다.


앗, 그런데 리모컨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일이 너무 잦아 몇 년 전부터 트레이까지 마련해 항상 그 안에 담아두는 데도 가끔 이렇게 찾아 헤맬 때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 제자리에 두지 않아 생기는 빈번한 사고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으로 실종된 리모컨 찾기에 나섰다.

리모컨 트레이 속 당연히 없다. TV 아래 위치한 서랍장 위, 남편의 리클라이너 소파와 그 옆 작은 테이블, 눈으로 스캔할 수 있는 곳은 모두 확인했으나 실패.

다음은 소파다. 가장 유력한 장소다. 리모컨 실종 시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찾게 된다.

리모컨이 있다는 걸 모른 채 눕거나 깔고 앉아서 생기는 사고다. 

모든 틈새에 손을 넣어본다. 그런데 찾아야 할 리모컨은 바로 나오지 않고 잡다한 물건들만 줄줄이 나온다.

우리는 잠시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망각한 채 보물 찾기라도 하는 듯 신이 나 있다.

머리 끈 두 개, 100원짜리 동전, 클립, 면봉 하나. 

도대체 얘네들은 언제 어떻게 여기로 들어가게 된 걸까?

100% 확신한 장소였는데 리모컨이 없다. 우리의 얼굴은 이제 점점 어두워진다.

우리에게 리모컨 없이 하루 살기란, 휴대폰 없이 하루 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시련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소파 위에 놓인 담요, 쿠션 밑, 소파 아래 바닥, 거실을 온통 다 뒤져도 보이질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방으로 달려가 본다. 가끔 거실에서 TV를 보며 운동을 할 때 채널 변경을 위해 손에 쥐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하필 그때 목이 말라 주방으로 갔다가 물만 먹고 두고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주방에도 없었다. 도대체 이 녀석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훑어왔던 모든 영역을 재탐색하기로 한다.

나무 트레이 안에 없고, 서랍장 위 없고, 여기도 없고 저기도..


그때  남편의 외침이 들렸다.

"찾았어! 담요 속에 있었네~"


조금 전 분명히 담요를 펼쳐 봤었는데.. 없었는데...


가끔 어떤 물건을 찾을 때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하다가 두세 번째 시도로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처럼 말이다.

    



리모컨의 독백


나의 이름은 TV 리모컨이다. 내가 나의 이름을 밝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에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이름의 리모컨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해 에어컨, 서큘레이터, 건조기, 셀카봉 등등.


그 리모컨 친구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소유의 멋진 집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들의 집은 그들이 조종하는 몸체에 안전하게 붙어 있어 길을 잃거나 사고를 당할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의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인님 가족이 나를 내려놓는 곳 바로 그곳이 그 순간 나의 집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한 지 몇 년이나 지났을까 주인님께서는 나를 가엾게 여기시어 나무향 가득한 넓은 집을 내게 선물해 주셨다.

나만의 집이 생긴 첫날밤 나는 그야말로 꿀잠을 잤다.

나도 행복이라는 걸 느꼈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핸드크림이라는 녀석이 나의 공간에 와서 살림을 차리더니 이후로 포스트잇과 볼펜이 들어왔고 연이어 안경 닦는 수건까지 들어와 동거를 하게 된 것이다.

나의 공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녀석들은 나를 누르고 찌르기까지 했다.

어느 날은 볼펜이란 녀석이 나의 하얗고 말랑말랑한 배꼽에 검정물을 들여 나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도달하기 도 했다. 다행히 주인님께서 발견하시고 말끔히 닦아주셨지만 말이다.

소중했던 나만의 집은 어느새 모두의 집이 되어버렸고 이제 나는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오히려 자유롭고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사람들처럼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


하지만 바깥세상 역시 나에게 녹록지만은 않았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엉덩이에 짓눌려 소파 틈새로 빠지는 바람에 숨이 막혀 저 세상으로 갈 뻔했다.

또 한 번은 담요에 말려 있다가 주인님이 펼치시는 순간 바닥에 내동댕이 쳐져 뇌진탕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주인님 가방에 들어가게 되어 성당미사에도 참례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주인님은 레지오 회합실 책상 위에 교본과 나를 꺼내셨는데 화들짝 놀라던 주인님과 나를 보고 박장대소를 하던 친구분들로 인해 나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지기도 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의 몸을 단단히 휘감고 있는데 예전에 느껴본 감촉이다.

서늘해진 날씨에 얼마 전 주인님께서 꺼내 놓으신 바로 그 녀석, 담요다.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내게는 지극히 위험한 존재다.

아, 이런. 지난번 보다 더 똘똘 말린 것 같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 그래, 주인님 목소리가 들린다.

담요를 펼쳐보시는지 담요 속으로 거대한 바람이 들어왔다. 이렇게 탈출하나 싶었는데 내 몸을 말고 있는 담요 끝자락이 제대로 펴지질 않았다. 나는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주인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숨이 막혀온다.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의식이 사라져 간다.


"찾았다!"

커다란 외침과 함께 나의 눈이 떠졌다.

어둠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어서인지 LED 불빛에 눈이 부셨다.

토네이도에 휩쓸려 뇌진탕을 당할뻔한 오늘의 상황이었지만 모든 것이 비켜 지나갔고, 그렇게 살포시 소파 위에 안착한 나를 주인님은 따스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셨다. 왠지 귀빈 대접을 받은 느낌이다.


운수 오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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