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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마음 Oct 15. 2024

나의 뱅갈 고무나무


나의 독백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실 베란다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조금은 어두워진 하늘과, 울긋불긋 치장하기 바쁜 단지 내 고목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벌써 가을의 삼분의 일이 지나갔다는 사실에 문득 놀랐다.

커피 한 입 머금고 시선을 낮추니 작은 정원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주는 귀여운 다육이들, 그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해피트리와 호프셀렘, 그리고 뱅갈 고무나무.


아이비를 떠나보낸 후 나는 한동안 식물을 키우지 않았다.

늘 비워있던 화단을 보고도 그러려니 하며 살아왔던 나였는데, 무성하게 자랐던 아이비의 빈자리가 컸던 탓인지 아니면 내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다시 식물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안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였을까 언젠가부터 자그마한 다육이 화분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선물 받은 여러 개의 큰 화분이 자리를 잡아 나의 소박한 정원이 모습을 갖췄다.


식물계의 똥손이었던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이제 녀석들부터 찾는다.

굵은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돌돌 말려있던 어린 잎사귀가 하룻밤 사이에 여린 속살을 드러내며 활짝 펼쳐져 있는가 하면, 떨어진 다육이 잎에서 뿌리가 내려 깨알처럼 작은 새 잎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스로 잘 자라 주는 녀석들이지만 왠지 똥손을 벗어난 것 같은 지금의 내 모습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3월의 어느 날이었다.

따스한 햇살에 반들반들 빛나는 피부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은근슬쩍 내게 눈길을 주는 한 녀석이 있었다. 살짝 오동통한 두께에 윤기가 반지르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적절한 초록빛, 나는 그 녀석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녀석의 이름은 뱅갈 고무나무다.

녀석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남아있는 커피를 물처럼 마시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전부터 품어왔던 생각이었는데 바로 그날 나는 그 일을 실행하기로 했다.

예쁜 잎이 달린 가지하나를 잘라 물꽂이를 하고 뿌리가 수북해질 즈음 흙에 옮겨, 동생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검색창을 두드려 보니 뱅갈고무나무는 가지치기를 할 때 독성이 있는 수액이 흘러나오므로 면장갑 위에 비닐장갑 하나를 더 걸치고 작업을 하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지 하나를 자르자마자 하얀 수액이 뚝뚝 떨어졌는데 그 모습은 마치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고결한 예식과도 같았다.

그렇게 엄마의 몸에서 분리된 작은 가지를 미리 준비해 둔 물컵 안에 고이 담아주었다.

녀석은 두 달 동안 수많은 뿌리를 내려주었고 마침내 나는 하얗고 예쁜 화분에 녀석을 옮겨 주었다.

삽목 후 죽는 경우도 많다기에 나는 한 달 동안 온 신경을 쏟아 돌보았다.

정성 어린 마음으로 선물을 마련하는 과정은 작은 기적을 일으켜 하나의 잎사귀를 새로이 탄생시켰다.

그리고 나는 건강하게 자란 이 녀석을 동생집으로 데리고 갔다.

녀석을 보자마자 기쁘게 맞이해 준 동생에게 잘 키워야 한다는 말을 수차례 거듭했다.

석 달 동안 정성스레 돌보며 정이 든 데다 내가 탄생시킨 첫 작품이라서였는지, 동생 집을 나오는데 나의 시선이 자꾸만 녀석에게로 향했다.

'아프지 말고 잘 자라야 한다, 또 보러 올게.'


그리고 2주 뒤 동생집을 다시 방문했다. 신발을 벗자마자 달려들어가 녀석부터 찾았다.

"에구 내 새끼, 잘 자라고 있었구나."




나무의 독백


내 이름은 뱅갈 고무나무다.

나는 엄마를 쏙 빼닮아 도자기 피부를 타고났다.

나는 타고난 피부를 더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충분한 수면과 수분 섭취 그리고 적절한 만큼의 햇빛을 쬐어준다.

그날도 나는 가족과 함께 따스한 봄 햇살에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주인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시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런데 순간 나와 눈을 마주치시더니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신 주인님의 손에는 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한 손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가위가 들려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날카로운 가위가 스쳐 지나갔다.

'분명 내 몸을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말인가?

날마다 아침이면 나를 찾아오시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루만져 주시며, 언제나 나의 목마름을 먼저 아시고 조용히 물을 먹여 주시던 나의 주인님이 어떻게 나를...'

울분과 서러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부터 네가 살 집이야."

주인님은 슬픔에 잠겨있는 나를 토닥여 주시며 눈물을 닦아주셨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나를 들어 올리시더니 물이 담겨있는 투명한 컵에 나를 넣어주셨다.

'내가 살 집이라고? 그럼 내가 죽지 않는다는 거야?'

시원한 물속에 몸을 담근 나는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에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그래, 이제 난 어른이야. 모든 걸 스스로 해야만 하는 어른이 된 거야.

엄마가 땅 속에서 끌어올려 먹여주시던 물도 이젠 내 힘으로 마셔야 해.

나는 내 몸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정말 어른이 될 거라고!"


나의 노력에 주인님의 정성이 더해져서인지 몸에서 뻗어 내린 뿌리가 제법 덥수룩해졌다.

나의 공간이 좁다고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주인님은 이런 내 마음을 읽으신 건지 하얗고 멋진 화분에 나를 옮겨주셨다.

'음~ 얼마만인가, 이 그윽한 흙내음!'


내 몸에서 예쁘고 귀여운 어린잎이 탄생했다.

나는 이제 완전한 독립을 했고 가정을 이뤘다.

어린잎이 쑥쑥 자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그렇게 나는 매일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주인님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또 낮잠을 잤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늘 내가 있던 햇살 좋은 베란다가 아닌 그늘진 주인님의 차 안이었다.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나는 지금 주인님의 동생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낯 선 환경에 처음에는 많이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친구들도 몇 명 사귀었고 새로운 주인님의 세심한 보살핌 덕분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

새로운 주인님은 우리를 위해 매일 아름답고 멋진 음악을 틀어주신다. 가끔 주인님 생각에 울적해질 때도 있지만 음악으로 위로도 받고 행복을 느끼기도 하니 이곳에서의 삶도 훌륭하다는 생각이다.


오늘의 날씨에 어울리는 상쾌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새로운 주인님도 밝은 표정이시다.

누군가가 오기라도 하는 건지 새 주인님이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신다.

아니나 다를까 벨소리가 울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듯하더니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라! 내가 알고 있는 목소리다.

나의 주인님이다. 틀림없다. 어찌 내가 주인님의 목소리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에구 내 새끼, 잘 자라고 있었구나."

주인님이 나를 보고 '내 새끼'라 하셨다.

나는 벅찬 마음으로 주인님을 바라본다.

"네! 주인님,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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