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멋진 가을날에
나의 독백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보송보송 박혀있는 구름 떼라니 이래서 가을 하늘, 가을 하늘 하나보다.
나는 오늘 아침 맑고 화창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다 그만 최면에 빠지고 말았다.
'빨래해야지, 빨래해야지~'
서늘해진 날씨에 조금은 톡톡한 이불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그 일을 실행하기로 한다.
올여름 내내 기온도 높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습도 탓에 건조기에 빨래를 말려왔었는데
오늘은 눈부신 햇살찬스를 사용해 보기로 한 것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빨래 건조대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바람에 살랑이는 손잡이를 잡아당겨 천장에 매달린 빨래 건조대를 아래로 내려오게 한다.
그리고 베란다 구석에 세워둔 접이식 빨래 건조대를 가져와 녀석의 겨드랑이에도 시원한 바람이 오갈 수 있도록 활짝 펼쳐 놓는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이 두 녀석에게는 각기 다른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굵직하고 튼튼한 녀석에게는 크고 무거운 빨래가,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이 가능한 녀석에게는 작고 가벼운 빨래가 배당될 예정이다.
나는 갓 나온 신선한 이불 빨래를 가져와 천장에서 내려온 빨래 건조대에 펼쳐 널었다.
이 녀석은 아무리 무거운 빨래를 널어도 믿음이 간다. 듬직한 녀석이다.
잠시 후 두 번째 돌린 빨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씩 손바닥으로 두드린 후 빨래탑을 쌓아 가슴에 끌어안고 베란다로 향했다.
바지는 천장 건조대에, 나머지 가벼운 빨래들은 접이식 건조대에 가지런히 널었다.
깨끗해진 빨래 위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데 그들의 반짝임에 눈이 부셨다.
"빨래 끝!" 외치고는 돌아 나오려는데, 뭔가 깔끔하지 않은 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위쪽에 널어 둔 청바지가 아래로 떨어져 접이식 건조대 위에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구겨진 채 놓여있는 청바지를 두 손으로 툭툭 털어 듬직한 녀석에게 다시 널어주었다.
그리고는 천장 빨래 건조대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두 건조대 사이의 간격을 벌려주었다.
그 틈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그늘진 곳 하나 없으니 마음마저 상쾌하다.
"진짜 빨래 끝!"
형의 독백
나의 이름은 천장 빨래 건조대다.
예전에 나의 삶은 무지 바빴다. 매일 아침이면 주인님의 호출에 천장에서 내려와 하루종일 빨래를 말리느라 밤이면 녹초가 되곤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꽤나 한가한 편이다. 아니 일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
주인님께서 들이신 새로운 기계가 나타나고부터 나의 일은 줄어만 갔다.
처음엔 쉰다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쉼'이라는 것도 반복되다 보니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고 내가 그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나는 더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조금 전 주인님의 손길이 내게 닿았을 때 나는 살짝 설레었다.
나를 이곳 천장에서 내려주시려고 손잡이를 힘껏 당기시는 걸 보니 오늘은 내게도 일을 맡기시려나 보다.
높고 푸른 하늘에 따스한 햇살, 기가 막힌 날씨다.
'빨래 널기 딱 좋은 날이네~'
이렇게 모든 상태를 체크하고 있는데 주인님이 다가온다. 이불이구나. 내 어깨에 걸쳐진 이불에서 향기로운 꽃내음이 난다. 두 채의 이불이지만 그다지 무겁지도 않고 향기로운 이 이불이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지난겨울, 무겁기로 소문난 공포의 극세사 이불이 내게 주어졌을 때 나는 너무나 힘들어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었다. 그날에 비하면 오늘은 콧노래가 나올만한 가벼움이다.
주인님이 두 번째 빨랫감을 가져오시어 선별작업을 하신다.
문득 아래에 있는 동생이 걱정된다. 주인님의 빨래 속에서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만 동생에게로 보내졌으면 좋겠다. 무거운 건 모두 이 형이 맡을 테니 말이다.
나의 바람대로 바지는 내게, 작고 가벼운 양말은 동생에게 배분되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순간 내 몸에 걸쳐 있던 청바지가 중심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이를 어쩌지, 동생에게 청바지는 꽤나 무거울 텐데.
속상한 마음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주인님과 텔레파시라도 통한 걸까, 성큼성큼 걸어오신 주인님께서 청바지를 번쩍 들어 올리시더니 다시 내 위에 걸쳐주셨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주인님 덕분에 동생의 몸도 저의 마음도 가벼워졌어요~"
동생의 독백
나는 형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위치에 살고 있지만 늘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주고받는다.
나는 든든하고 믿음직한 형이 늘 자랑스럽다.
형은 아무리 크고 무거운 빨래라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강철 체력을 가지고 있다.
언제였던가, 한 번은 주인님께서 형이 아닌 내게 두꺼운 이불을 걸쳐 주셨는데, 나는 형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티다가 갈비뼈가 부러지는 대형사고로를 당했었다. 다행히 주인님의 집도로 나의 뼈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형은 나의 우상이 되었다.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햇볕도 따스하다.
이런 날은 빨래 널기에 딱 좋은 날이라고, 바람과 햇볕에 빨래도 잘 말라 우리의 몸이 금세 가벼워질 거라고 형이 내게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주인님의 생각도 우리와 같았나 보다. 이불빨래를 어깨에 둘러메고 오신 주인님께서 "으쌰!" 하는 기합소리를 내시더니 형에게 이불을 걸쳐 놓으셨다. 위를 올려다보니 두 채의 이불이 널려 있다. 형이 무겁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우리 형이라면 저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번째 빨래가 도착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지는 형에게 가벼운 빨래는 내게로 왔다.
그런데 갑자기 묵직한 무언가가 내 몸을 눌렀다. 순간 너무 놀라 눈을 질끈 감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의 어깨에 청바지가 놓여 있었다. 바지 중 가장 무겁다는 그 청바지가 형의 몸에서 흘러내려 내 몸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난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이렇게라도 형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괜찮다. 늘 형의 도움만 받고 살았는데 이제 내가 형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하지만 찰나의 행복이었다.
주인님은 기어코 내게서 청바지를 빼앗아 형에게 돌려주셨다.
'아~ 야속한 주인님, 내 마음도 몰라주고..'
"형! 힘들지 않아?"
"아냐, 난 괜찮아! 오늘은 바람도 시원하고 햇볕이 좋아서 일찍 퇴근할 수 있겠는걸~"
"사랑하는 내 동생! 좀 전에 많이 놀랐지?"
화창한 가을하늘이 저를 눈부시게 했던 날,
멋진 형제의 우애를 떠올리며 적어 본 글입니다.
그동안 연재해 왔던 <불완전한 작가 시점>을 오늘 날짜로 마무리하고자 했기에,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날의 기록을 하필이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오늘 올리게 되었네요~^^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날들도 많았으니 이 정도쯤이야...
저의 첫 연재 글에 함께 해주시고 공감해 주신 작가님들께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 주신 따스한 마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