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감각

복싱과 현실

by 연패맨
복싱의 거리 감각


복싱에서 가장 기본 공격은 잽다. 잽의 목적에는 견제, 블로킹, 거리 잡기, 정타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로 거리를 잡아 뒷손을 먹이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정타보다는 시야 흐리기나 간접 공격용으로 많이 쓰인다.

머리로는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 스파링을 할 때 나는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상대의 앞손을 잽으로 블로킹하기는 했지만, 그저 어떻게 하면 상대의 안면에 잽을 정타로 찔러 넣을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상대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고, 또한 곤충의 더듬이처럼 앞손으로 나의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하며 시종일관 자잘한 움직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가드를 바짝 올린 사마귀를 보는 것 같았다. 도저히 길이 안 보였다. 잽을 찔러 넣을 길이! 이때 나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는 움직이는 상대에 대해 아직 거리 감각이 없구나.' 적당한 스탠스를 유지하며 다가오는 상대가 아니라, 통통 뛰거나 앞손으로 견고한 가드를 유지한 채 다가오는 상대를 보니 내가 제대로 때릴만한 거리와 내가 피할 수 있을 만한 감이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 따라서 잽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공격인 원투도 제대로 쓰지를 못 했다(생각해보면 여태 원투를 제대로 노려서 성공적으로 공격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빠른 스탭으로 원(잽)을 내며 상대를 칠 수 있는 거리로 들어가, 투로 정타를 먹인다.' 이것이 원투인데, 거리 감각이 없던 나는 여태껏 제대로 써먹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정말 복싱을 한지 얼마 안 됐거나 스파링 경험이 나만큼 없는 사람에게는 원투를 제대로 먹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세와 스탭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람에게 지금의 나는 원투를 정타로 먹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현실의 거리 감각


당연한 소리지만, 거리 감각을 익히려면 사실 스파링을 많이 하면서 맞아보는 게 좋다. 싱, 태권도, 축구 등 뭐든 실전에서 부딪히며 익혀보는 게 좋다. 상대도 나도 계속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서로서로 수를 재고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타이밍을 누가 잘 빼앗느냐의 싸움이다). 뭐 사실 맞는 게 영 좋은 경험은 아니다. 특히나 격투기 종목은 얼굴이나 복부에 주먹이나 발이 들어오는 위험이나 공포를 견디며 맞서야 하기에 더 어렵다. 본인은 태권도, 택견, 복싱 전부 다 경험해봤는데 실력자들과 대련을 할 때면 하나같이 공격들이 너무 빨라서 알고도 맞거나 당최 어디서 날라들어오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격투기 대련을 할 때는 처음부터 본인보다 높은 수준의 실력자랑 하면서 뚜까 맞는 것보다는 본인의 실력과 비슷하거나 살짝 높은 수준의 파트너와 대련을 하며 자신감을 쌓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맞아 봐야 알고, 겪어봐야 안다. 냉정하지만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아 저 정도야 뭐, 나도 가능할 것 같은데?', '와.. 겁나 지옥 같은데.. 가도 될까?', '힘들겠지? 그래도 함 해 보자. 잘 할 수 있을듯ㅋ.' 겉으로 보기만 하고 판단하면 이런 생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진실을 확인하고 싶다면 용기 내서 발을 담가봐야 한다. 막상 링에 올라가서 스파링을 해보니 생각한 기술은 먹히지도 않고 자세도 흐트러지며 엉망이었다. 막상 해병대를 가보니 역시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긴 했지만 견딜만했다. 막상 알바를 해보니 스트레스를 한가득 받으며 고통을 느꼈고 내 성향에 맞는 일과 내 부족한 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결과야 어찌 됐든 해본 사람만이 알고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해봐야지 내가 견딜 수 있는 일인지, 내가 더 성장할 만한 일인지, 나한테 맞는 일인지, 그 현실의 거리 감각을 익힐 수 있다. 내 경험상 내가 감당 못할 만큼의 리스크가 아니라면 뭐든지 고통과 리스크를 감내하고 발을 담가봐야 하는 것 같다.

사진 출처 : 짤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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