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체육 복싱대회 후기

패배

by 연패맨
대회의 시작

내가 참가한 대회는 한 체육관에서 주최하는 작은 대회였다. 하지만 말이 작은 대회지 처음 참가해보는 나에게는 꽤나 큰 도전이었다. 계체량을 끝내고 아침을 먹은 뒤 할 일은 체육관에 앉아 기다리는 일이었다. 자주 이런 상황을 경험해봤는지 아예 돗자리를 깔고 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잠시 후 시합이 시작되었고 내 차례가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2분 3라운드라 생활체육 복싱대회 치고는 꽤나 긴 시간이었으나, 심판이 따로 카운트를 세지 않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시합을 중지시켜서 시합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 순서는 9번째였다. 5, 6번째 경기가 시작될 때쯤 시합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몸을 풀었다. 시간이 흘러 방송에서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링 바로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자 긴장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방송으로 다른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내 경기가 취소된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원래 신청했던 선수가 오지 못 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됐는데, 그 사람도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언제 올지 모를 상대를 기다리며 옷을 입었다 벗었다, 몸을 풀었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내 경기는 대회의 가장 마지막에 치러졌다.

언제까지 기다리냐.. / 출처 : 퍼펙트빅데이터



1,2 라운드


내 순서가 되자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크게 동요되지 않았으나 몸이 꽤나 긴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링에 올라가기 전 살짝 상대를 살폈다. 그는 얼핏 봐도 -75kg보다 더 나가 보였다. 나도 키가 꽤 큰 편인데 상대는 나랑 키도 비슷한데 덩치는 더 커 보였다. 종이 울리고 시합이 시작됐다. 나는 선공 잽을 날렸다. 상대는 몸을 낮추고 가드를 바짝 올려 나의 공격들을 받아냈다. 나의 공격들이 대부분 상대의 가드에 막혔다. 내 공격이 끝나자마자 상대가 빠르게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가 띵하고 울려대기 시작했다. 2대쯤 맞고 가드를 바짝 올리자 상대는 계속해서 펀치를 날려댔다. 가드 위에 맞았음에도 그 충격은 다랬다. '아 풀파워로 맞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리가 띵하게 울리도록 맞는다는 게 무엇인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졸라 아팠다. 끊임없이 치고 들어와 돌진하는 상대에게 가드를 올리며 뒤로 밀려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단 힘에 밀려 뒤로 밀려났으며, 들어오는 상대를 돌리거나 피하고 반격해서 때려야 한다는 내 머릿속 생각들은 상대의 고통스러운 주먹 앞에 백지상태가 되었다. "빠지면 맞는다고!!" 계속해서 소리치던 세컨의 말이 들려도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맞다 보니 정신이며 생각이며 하나도 없었다. 맞는 것도 맞는 것이었지만, 상대가 내 주먹을 숙이면서 꽤나 잘 피했고 또 숙인 채로 달라붙다 보니 거리가 안 생겨 원투나 원어퍼, 위아래같은 내 주기술이 제대로 들어가지가 않았다.

어찌저찌 1,2 라운드가 끝났다. 머리가 울리고 쌍코피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나중에 촬영한 영상을 보니 1,2라운드 동안 나도 꽤나 선방했었다. 맞은 만큼 때렸었고 엇비슷했다.

출처 : 미안하다 사랑한다



3 라운드

시작부터 나의 원투가 기 막히게 들어갔다. 하지만 맞을 때마다 얼굴이 살짝씩 들리는 나와 달리 상대의 얼굴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상대의 힘이 나보다 좋았거나 상대의 중심이 낮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 공격이 끝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상대가 치고 들어왔다. 연타를 날리며 힘으로 치고 들어오는 상대에게 나는 속수무책으로 가드를 하며 뒤로 밀려났다. 상대도 나도 체력이 방전되어가고 우리는 중간중간 클린치를 하며 버텨냈다. 마지막 30초를 알리는 알림음이 울리고 계속해서 상대와 주먹이 오갔다. 또다시 클린치를 하고 심판이 "브레이크" 외쳤다. 심판이 "복스"를 외치는 순간, 상대는 나보다 반 박자 빠르게 주먹을 날렸다. 퍽퍽 머리가 크게 두 번 울렸다. 가드를 올렸지만 상대의 연타가 이어졌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보면, 주인공이 엄청나게 맞을 때 눈앞이 까매지며 마치 편안해지는듯한 장면들이 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 계속 맞다 보니까 눈앞이 까매지며 오히려 고통이 줄어들고 정신이 아늑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드를 올리며 참아냈다. 하지만 한 순간 나는 상대의 주먹을 크게 허용했고 턱이 크게 들리고 말았다. 3라운드가 끝나기 약 3초를 남긴 시점이었다. 심판은 경기를 중지시켰다. 나의 패배였다.

약간 이런 느낌. 그래도 가드는 했었다 / 출처 : 더 파이팅



패배와 느낀 점


아쉬웠다. 마지막 그로기 상태만 아니었어도 판정까지 가볼만한 경기였다. 하지만 나의 패배는 확실했다. 체력, 가드, 스탭 등 부족한 것들이 확실히 보였다. 내 손에는 트로피 대신 상장과 메달이 주어졌다.

시합이 끝난 뒤 머리가(뇌가) 계속 울리고 얼굴의 많은 곳이 아팠다. 다음 날에는 목이 너무 아팠다. 주먹에 이리저리 얼굴이 돌아가고 또 버티다 보니 목 근육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헤드기어에 14온스 글러브를 끼고 맞았는데도 이렇게 아픈데, 밥 먹고 사람 때리는 기술만 연습하는 복서들은 10온스, 12온스 글러브로 풀파워로 치고받으면 도대체 그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해봤다. 나는 이번 기회로 복서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가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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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펀쿨섹좌(펀하고 섹시하고 쿨하게)'로 유명한 고이즈미 신지로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일을 한 번 해보세요. 다음에 할 때는 2번째가 되기 때문에."... 그런데 한 번 대회 나가서 맞아 보니까, 이게 두 번 해볼 만한 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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