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
3일의 체코
유럽여행 20일 차, 슬슬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만 믿고 평소에 운동과 좋은 생활습관으로 체력을 단련시켜놓지 않은 탓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새로운 길을 1-2만보씩 걷고, 밤 10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오는 일정을 반복하다 보니 이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몸이 무겁고, 밤에 열이 나는가 하면, 졸지엔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무뎌지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첫 혼자여행에서 할 수 있는 정말 쉬운 실수 중 하나다. 무리하는 것.
매일 아쉬운 마음에 에너지가 고갈될 때까지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배 터질 때까지 포식하는 것과 같다. 매일 맛있는 음식을 배 터지도록 먹으면 과연 좋기만 할까? 분명히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는데도 물릴 수도 있고, 배탈이 날 수도 있고, 음식이 주는 행복감에 무뎌질 수도 있다.
나는 배탈이 났었나 보다.
몸이 아파오니 장시간 걷는 것도 훨씬 힘들었고, 체력적 고갈이 정신적 우울감으로 뻗어갔다.
유독 프라하에는 연인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이 손을 잡고 걷거나 카페에서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깊숙이 숨어있었던 깊은 구멍의 테두리가 시렸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 삶의 동반자를 찾는다는 것은, 내 평생의 숙제와도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잦은 이사로 주변 사람과 환경이 쉴 새 없이 변해왔고, 그 과정에서 나는 반대로 영원함과 변치 않음에 집착하게 되었다. 결혼이라 말하면 어른들의 세계 같았지만, 삶의 동반자를 찾는 것이라 하면 그것이야 말로 이번 생의 목적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지만 안으로는 지극히 외로운 아이였다.
그 외로운 아이는 씩씩하게 혼자 체코 프라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어먹었다.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넘어오면서 물가가 저렴해졌기 때문에, 그동안 가난한 여행자로서 누리지 못했던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2018년 기준 스테이크와 두 가지 사이드가 2만 4천 원 정도였다. 미디엄 웰던이었던 소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커다란 스테이크 조각으로 열심히 마음속 구멍을 메꿨다.
프라하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 구시가지 광장(Old Town Square)!
프라하의 상징물인 틴 성당(Church of Our Lady before Týn)이 있는 곳이 구시가지 광장이다. 여느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과 호객꾼들, 한탕해보려 하는 소매치기꾼들로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광장에서 빈티지한 틴 성당을 바라보다가 시계탑 전망대(Prague Astronomical Clock)로 올라갔다.
배가 든든해서인지, 시계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프라하와 틴 성당이 너무 아름다워서인지, 마음이 다시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평선까지 쭉 뻗은 빨간 지붕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에 진하게 물들어있었다. '이것이 유럽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어느 방향을 바라보든 산맥들이 보이는 한국과는 참 다른 풍경이다.
구시가지 광장보다 더 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까를교(Charles Bridge)였다.
다리가 다리지 뭐 별거 있겠어,라는 마음으로 도착한 까를교에서는 유럽 하면 떠오르던 모든 낭만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길거리 바이올린 연주자들과 잡상인들, 손을 맞잡은 채 노을을 감상하는 연인들, 적당히 취한 채 호탕하게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 그리고 완벽한 날씨. 없던 사랑도 샘솟게 만드는 파스텔톤 하늘과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여행하면 이런 순간들이 있다. 이럴 때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가족들과 친구들. 같이 오지 못해 보지 못하는 그들의 노을을 담은 눈동자와 환하게 지었을 미소들.
밤이 되면 까를교에도 불이 켜지며 또 다른 그림이 된다.
깜깜해진 풍경 속에 멀리 불이 켜진 프라하 성(Prague Castle)이 보인다. 필스너 맥주를 한병 들고 야경을 보고 있자니 이것이 내가 원하던 도시의 낭만이 아닌가 싶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서울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도 한강공원이었다. 환경은 바뀌어도 취향은 여전한가 보다.
존 레논 벽화(Lennon Wall)는 단순한 벽화를 넘어서 체코의 역사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장소다.
1980년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주의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비틀즈의 노래는 금기곡 중 하나였다. 수많은 통제와 억압 속, 존 레논의 '사랑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는 청년들에게 더욱 큰 영감으로 다가갔을 터이다. 1980년 존 레논이 암살된 후, 익명의 예술가가 이 벽에 존 레논의 초상화를 그리고 그의 노래 가사를 적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벽에 그려진 그림과 메시지는 공산주의 정권에 대한 청년들의 불만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정부는 벽화를 반복해서 하얗게 덮어버렸지만, 젊은이들은 밤마다 다시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체코가 민주화된 이후, 이 벽은 더 이상 저항의 공간이 아닌 평화, 사랑,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내가 도착한 저녁 시간에도 사람들은 그라피티가 한창이었다. 하루에도 벽에 그라피티가 몇 겹은 더 쌓일 것 같았다. 과연 벽화의 의미는 어느 만큼 남아있을까. 군데군데 레논의 얼굴이 보이긴 했지만, 남산타워의 열쇠고리 무덤이 생각나기도 했다.
프라하의 지하철도 인상 깊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아무런 광고 없이 오직 디자인과 기능만 있는 지하철역은 공산주의의 잔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023년 갔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지하철도 마찬가지였다. 검색해 보니 과거 공산주의 국가였던 나라의 지하철은 상업적인 광고 대신 체제 선전이나 국가적 영웅을 찬양하는 예술 작품들로 장식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벨시장(Havelské tržiště)에 있는 기념품들도 아기자기하게 귀여웠다. (물론 가격은 귀엽지 않았다.) 시계탑 천문시계 모형 냉장고 자석부터 목각인형, 알폰스 무하(Alfons Mucha)의 그림 등 볼거리들이 많았다.
하루는 날을 잡고 프라하 성과 그 근처를 둘러보러 갔다.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성당(Katedrála sv. Víta)은 특히 스테인글라스로 비치는 햇빛이 참 아름다웠다. 종교가 없는 나에게 성당이나 교회는 여행할 때만 방문하는 특별함을 가진 곳이다. 혼자여행 초기에는 그저 미적인 부분만 관심이 갔다면, 이젠 벽화나 모형들이 가진 의미에도 호기심이 생긴다. 대체 어떤 점이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게 하는 걸까?
프라하의 마지막 밤은 한국인 동행들과 함께 필스너 맥주를 마시며 마무리했다. 체코는 전 세계에서 맥주 소비량 1위를 할 정도로 맥주를 사랑하는 나라다. 그만큼 유명하고 맛있는 맥주 브랜드도 많다. 조금 아쉬운 점은, 맥주의 진정한 맛을 제대로 알기 전인 20대 초반에 체코를 여행했다는 점. 지금 간다면 라거와 에일, 흑맥주의 차이를 음미해 가며 맥주의 나라를 더욱 즐겼을 텐데.
언제든 여행은 떠날 수 있다지만, 어느 나이에 어느 나라를 가느냐에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른 건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지금 체코로 혼자 떠났다면 맥주의 맛을 더 느끼는 만큼 외로움도 더 느꼈을 것 같다. 22살의 나보다 더 많은 이별과 미련을 짊어지고 사는 29살의 나이기에.
Prague, Czechia_ Key Word
- Národní muzeum
- Václavské náměstí
- Havelské tržiště
- The Powder Tower
- Old Town Square
- Church of Our Lady before Týn
- Prague Astronomical Clock
- Charles Bridge
- Lennon Wall
- Prague Castle
- Katedrála sv. Víta
- The Royal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