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소유주의 삶

EP 01. 가전은 역시 LX

by 체리


결혼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일상 중, 내 마음에 쏙 드는 변화는 나의 가전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독립하기 전엔 엄마의 냉장고에 빌붙어 살았고, 대학을 위해 상경한 이후론 월세-전세방을 전전하며 그 방들에 풀옵션이란 이름으로 묶인 아주 작거나 성능이 부족한 냉장고로 꾸역꾸역 살아냈다. 그 작은 냉장고엔 주로 요거트와 우유, 한 번 쓰곤 안 써서 켜켜이 쌓인 새로운 종류의 소스가 넘쳐나게 들어 있었다. 냉동고엔 1분이면 조리가 끝나는 소스 닭가슴살이 소비기한을 무시한채 쌓여 있었다.


독립한 지 약 15년의 시간동안 내 명의의(?) 가전이랄 건 소형가전으로 취급되는 선풍기, 제습기, 드라이기 정도였다. 결혼이란 사건을 계기로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몇몇 가전과 내 냉장고가 생겼다. 10년이 훌쩍 넘는 독립의 기간 잔살림은 하나씩 불어나 짐덩이가 되는 동안 반대로 거대하고, 비싸지만, 어떤 집을 상징하는 가전은 단 하나도 소유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결혼한 친구집에 놀러가면 자가를 가진 이들의 능력이나 운보다, 가장 최신의 냉장고가 들어찬 모습이 그렇게나 부러웠다. 예전과 달리 세련되고 깔끔한 현대식 냉장고는 대게 시원하게 양편으로 문이 젖혀지는 형태의 최신식 냉장고! 한 층이 양 옆으로 뚫려 있다보니 무엇이든 예쁘게 넣을 수 있는 디스플레이 쇼윈도 같기도 했다. 양문을 열면 시원하게 칸칸히 뚫린 미학적이면서도 공학적 진수를 이뤄낸 냉장고는 뭐랄까, 나에겐 결혼을 상징하는 물질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결혼 준비중 수많은 일을 시원하게 결정해내는 남편에게 미뤄온 나였지만, 냉장고 결정만큼은 꼭 내가 해야만 했다.


신혼집에 들어가기 전 2개월동안 삼성, LG 공식몰을 오가며 냉장고의 세상에 발을 들였다. 냉장고 문의 질감을 살피고 문도 수차례 여닫아 보며 어떤 것이 내 냉장고가 될 녀석인지 진지하게 살폈다. 백색가전은 LG란 말을 워낙 많이 듣기도 했고, 실제로 풀옵션으로 구성된 집에서 살아보면 LG 가전의 만족도가 훨씬 높았던지라 LG로 마음을 굳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만듦새였는데, 이상하게도 LG전자의 그것이 마감이며 구석구석 신경쓰지 않은 부위가 없는 듯 해서 마음이 갔다.


가전 브랜드를 결정한 후로는 스펙의 문제를 따져야 했다. 크기도, 생김새도 비슷한 같은 브랜드의 냉장고인데 100만원 대에서 500만원까지 그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스펙란만 또 며칠을 살펴야 했다. 내가 명료히 이해한 냉장고의 스펙은 L 단위로 표시되는 수용 용량이랄지 에너지 효율 등급, 정수기 옵션, 얼음 생성 기능 여부 정도. 거기서 합리적인 금액의 모델로 고르기로 했다.


용량은 클수록 좋겠지?
정수기는 필터 관리가 어려울 것 같으니 빼자!
얼음은 꼭 나오면 좋겠어!

그 가전 하나에 나의 기대가 어찌나 많았는지, 흥분에 젖어 이런 저런 말을 공유하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웃었다. 몇 백만원 대의 결제 금액이 카드로 청구되던 날, 이상하게도 왜인지 제대로 된 살림이 될 것 같다는 믿음에 웃음이 헤실헤실 났다.


남편이 먼저 신혼집으로 짐을 들이던 날, 냉장고도 함께 도착했다. 이삿짐 업체와 씨름중인 남편을 뒤로 하고, 대형가전의 도착과 설치는 내가 진두지휘 했다. 우리의 신혼집은 엘레베이터 없는 구옥주택이라 대형 가전을 들이려면 사다리차가 필요했다. 그러니 더더욱 삼성이나 LG처럼 고객만족서비스 경쟁이 가열된 브랜드의 제품이어야만 했다. LG의 이름이 크게 적힌 아주 든든한 사다리차가 묵직한 소음을 내며 냉장고를 집으로 들여주었다.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함께 구매해서인지 무려 3명의 기사님이 방문하셨다. 뭐랄까, 나를 위해 완전히 타인인 3명이 별도의 금액도 요구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고 힘을 낑낑 쓰는 모습에 몸둘 바를 모르겠어서 괜히 가전 옆을 서성인다. 그 중 대장 뻘에 해당하는 기사님께서는 끝까지 가전의 기울기랄지, 사용법이랄지, 유의점 등을 거듭 강조하며 말씀해주셨는데 그 모습이 왜인지 아빠 모습 같기도 해서 감사했다. 불편한 점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달라며 건네준 그의 명함에는 ‘정OO 명장’이라고 쓰여있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멋진 일이 아니더라도 한 분야에서 제대로 해내면 이렇게 명인, 명장이 될 수 있나보다.


아직도 냉장고 한켠에 그의 명함을 붙여뒀다. 그러면 이게 더 든든하게 고장나지 않을까 하여-!

2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멋진 얼음도 매일매일 빈틈없이 만들어주고 오작동없이 구동해주는 냉장고를 가졌다. 냉장고 소유주가 된 이래 나는 자꾸만 좋은 음식과 제철 채소 따위를 채워두고 싶어진다. 그래야 언제든 나와 남편에게 건강한 음식을 턱턱 내어줄 수 있으니까, 냉장고 소유주의 의무는 주기적으로 좋은 음식을 채워 넣고 제때 비워주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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