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2. 침실엔 그림을
'우리'다운 것으로 가득 채운 신혼집에서
공간의 힘을 믿는 나는 신혼집을 꾸미는데 참 진심이었다. 하나하나 내 손이 닿길 바랐고, 그 손길이 매우 섬세하길 바랐다. 집에 드릴 무언가를 고를 때면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보니 수십여가지를 골라야 하는 신혼 살림 차림을 갖추는데 모든 기운을 쏟았다.
결혼 전까진 기껏해야 원룸, 운 좋던 시기엔 투룸 정도에나 살았으니 ‘침실’이라는 개념이 생긴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오래도록 꿈꿔온 유명 브랜드의 매트리스는 고민없이 결정했다. 그 안에서 어떤 기능의 모델을 살지, 언제 어떤 할인을 받아 구매할지는 고민했지만. 그 매트리스에 걸맞는 맞춤 프레임을 찾는데는 약 한 달을 쏟았다. 복슬복슬한 부클레 소재의 침대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맞췄다. 라지킹 사이즈라는 압도적인 사이즈의 침대가 결정되고 나니 침실의 큰 부분이 찬 덕에 거의 끝이 난 듯 했다. 침실만큼은 그 목적,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만 하도록 이 외의 살림은 최소화하기로 했다.
대신 침대 옆 벽에는 그림을 걸고 싶었다, 우리의 취향과 나의 안목을 담뿍 담은 작품이 하나쯤 있어야 비로소 나의 침실의 완성일 것 같아서. 신혼집을 계약하던 날부터 ‘침실엔 꼭 그림을 둘거야’라고 말했고 그래서 침실 인테리어는 맡겨달라고 졸라댔던 나기에, 이사를 한 이후로 한달이 지나도록 그림을 사지 않자 남편 S는 그림은 언제 사는거냐 넌지시 물었다.
변명하자면 나는 무슨 제품을 살 때면 그 카테고리의 제품을 낱낱이 살피고서야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림체며 크기, 액자의 스타일까지 선택해야 할 항목이 너무나 많은 방대한 그림의 세상에선 결정이 더욱 어려웠다. 내 침실이 생기기 전까진 ‘그림을 산다’고 생각했을 때 오늘의 집이랄지 29cm에 나올법한 포스트모더니즘, 바우하우스 따위의 느낌을 지닌 그림이 막연히 떠올랐다. 침대에서 컬러감을 최대한 줄였으니 대신 그 컬러감을 벽면으로 옮긴다면 - 강렬한 색채의 그림 덕에 공간이 풍성하게 채워질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이 담긴 수가지 포스터 작품을 장바구니에 한껏 담았다.
그런데 담긴 작품을 추리기 위해 볼수록 의문이 들었다.
이게 과연 나 다운가?
그냥 남들이 보기에 멋진 그림 아닌가?
내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좋아했던가?
이 그림이 볼수록 좋아질까?
이 모든 의문에 나의 답은 확고하게도 NO.
장바구니에 열심히 담았던 그림은 그냥 멋있는 것이다. 남들에게 멋지게 보여지고 싶은 그림들이랄까. 그래서 장바구니를 깔끔하게 비우고, 다시 새로운 유형의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나’, 그리고 ‘우리’에게 의미있는 그림을 걸고 싶어서.
일단 ‘우리’가 떠오르거나, 우리가 좋아하거나, 우리다운 그림을 찾고 싶어 네이버부터 오늘의집까지 더보기 란의 숫자가 끝을 볼 때까지 아이쇼핑을 했다. 그 결과 찾은 그림 1은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가 그렸다는 고양이와 강아지 그림이었다. 작가가 강아지, 고양이를 각각 한마리씩 함께 기르며 만난 영감들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그림이 시리즈로 펼쳐졌다. 어떤 그림에서 강아지와 고양이가 아이처럼 묘사되기도 했다가, 어느 순간엔 멋드러진 코트를 입고 겨울 나절을 산책하는 모습이기도 했다가, 다양한 표현의 대상이 된 일러스트였다. 왜인지 나와 남편 S의 성격이 드러나는 듯, 앞치마를 두른 강아지와 고양이가 팔짱을 끼고 서있는 그림. 그 그림으로 골랐다. 컬러 버전보다는 블랙으로 포인트룰 둔 안방에 어울리도록 아웃라인만 드로잉 된 작품이다.
덕분에 다음 그림을 고르기가 보다 수월해졌다. 어떤 컬러로 선택하든 그 그림에만 포인트가 될 것이므로. 다만 사이즈는 이전에 고른 작품보다 작은 사이즈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큰 그림 옆에 작고 아담한 그림이 놓여야 균형감이 생길 것 같아, 또 다시 인터넷 세상을 뒤졌다.
마음 같아선 신진 작가님의 오리지널 작품을 구해 걸고 싶은데, 0이 줄줄이 늘어선 금액 앞에 쉽게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대신 작가와 협의 하에 만든 포스터를 판매하는 아트 스토어에서 일러스트 작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고른 그림은 날카롭게 울부짖던 어린 아기 곰이 사랑을 받으며, 한도 끝도 없이 물러지는 4컷 만화 형태의 일러스트였다. 위협적이지도 않은 외관으로 세상과 맞서다, 사랑에 한도 끝도 없이 녹아내린 곰의 모습이 꼭 나 같았다, 남편 S 덕에 한도 끝도 없이 말랑말랑 해져버린 나.
고심 끝에 애타게 찾던 작품까지 침실에 채우자 비로소 그 공간이 나와 너의, 우리의 공간임이 실감이 났다. 어느 곳 하나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다.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나만의 공간에서 살아왔지만, 왜 이제야 비로소 나의 집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침실에 놓인 작은 그림을 하나 고르는 마음을, 온 곳에 쏟아서일까. 아직도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며 자연스레 시선이 가는 벽면에 걸린 그림을 보면 뿌듯하다. 매일 밤 침대에 몸을 눕히며 만족한다. 볼수록 우리 다운 그림이라 참 좋다. 언젠가 침실엔 더 의미있는 오리지널 작품을 구해서 걸어야지. 그렇게 미래를 일굴 수많은 목표 중 하나가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