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린이의 작은 꿈

EP 03. 집요한 아마추어

by 체리

몇 년전 아주 잠시 깔짝 배웠던 테니스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근수저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근력은 타고 났지만 운동 신경은 영 꽝이다. 그래서 30년 넘도록 재주가 필요한 운동, 가령 구기종목은 피해왔다. 심지어 2년 전에는 테니스 강습을 3개월쯤 들었지만, 영 늘지 않는 실력에 화딱지가 나서 그만둔 전적이 있다. 반면 남편은 타고나길 팔다리도 길쭉하고 운동 신경도 제법 좋아 테니스 8개월 구력에도 ‘잘 친다’는 칭찬을 자주 듣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친구네 부부가 테니스를 치러 함께 코트에 나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답지않게 나를 채근했다.

테니스 배우면 같이 치러 다닐 수 있고. 진짜 좋겠지!

좀처럼 뭘 잘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 뭘 하나 요청하면 그게 그렇게 마음 한 편에 콕 박힌 가시처럼 자꾸만 곱씹게 됐다. 주변 이야기를 넌지시 물어봐도 대부분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져야, 주말에 억지로라도 함께할 시간이 생긴다는 조언을 하니 배워야 할 이유가 늘었다. 그래서 비루한 둔한 몸뚱이를 이끌고 남편과 2:1 강습을 등록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발을 빼보려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나면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없지 않냐’ 묻는 나의 질문에도 생활체육인 특유의 호방함을 가진 강사님은 함께 많이 한다고 답했다.


옆에서 산책에 나온 강아지처럼 신나서 동동대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단단히 잡아본다.

그래, 나는 테니스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테니스 잘 치면 얼마나 멋져?

그렇게 다시 시작하게 됐다, 테니스는.


강습을 시작해보니 실력 차이는 생각보다 더 컸다. 원체 역량 차이도 있었겠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차이로 빚어지는 날아가는 공의 속도와 힘, 감 따위의 차원이 달랐다. 보통은 잘 하는 것만 죽어라 파고 들고, 흥미가 없거나 힘든 일은 안 할 수 있다면 피해가는 편인데… 번갈아 치는 공이 번번이 빗나갈 때마다 솟구치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남편과 한 주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테니스장으로 오가는 1시간 남짓이 즐거워 꾸역꾸역 강습을 나갔다. 한 주간 유일한 데이트 시간이라 더욱 귀했다. 연애를 할 때에는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 평일에도 얼굴을 봤는데, 막상 결혼을 하니 평일 맨 정신에 얼굴을 보는 일이 힘들어졌다. 한 쪽이 바쁘거나, 약속이 있거나, 운동 따위의 자기계발을 하거나 등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다보면 한 주간 미처 채우지 못한 애정을 주말에라도 옴팡 쏟아내야 했다.


억지로라도 꾸준히 하니 실력이 거북이 기어가듯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는게 느껴졌다. 그에게 방해가 되기 싫다는 마음으로 따로 평일 시간을 내 볼머신 기계로 연습까지 더해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연습을 한 주에는 확연히 나아진 임팩트* 소리 덕에 즐거움이 늘어났다. 신기하게도 점점 (남편 때문에)라는 말이 희미해지고 그저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났다.

*임팩트: 공을 라켓으로 때리는 것


내가 재미를 붙이는 것이 보이자, 남편은 본인이 더 신나서 당장이라도 장비빨을 세울 것을 종용했다. 그가 나의 소비를 종용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므로, 그 때를 놓칠세라 강습을 마친 뒤 당장 테니스 매장에 가 첫 라켓을 구매했다. 땀에 절어 꼬질한 모양새로 동대문까지 이동한다. 두 업체를 방문하고 라켓에 대해 이런 저런 설명을 들은 뒤, 결국 결정은 눈에 들어오는 예쁜 형태로 결정했다. 모든 운동은 장비빨이라더니 장비가 생기고 나니, 더 좋은 장비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잘치고 싶어졌다.


IMG_0678.heic


스스로만을 위해 살던 시절에는 나 혼자 결정하고, 나 혼자 포기하는 일이 참 쉬웠다. 그런데 둘이 되고 나니, 때로 어떤 결정은 더 쉬워지고, 반면에 도움닫기 한 결정을 포기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응원해준 이의 마음을 져버리는 것이 미안하거나, 그 마음에 부흥하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남편 S의 신남에 부흥하기 위해, 또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테니스 연습을 다녀왔다.


약 1시간을 꼬박 보라색 코트 위에서 형광빛 테니스공만 바라보며 샤라포바라도 된 것처럼 스윙을 휘두른다. 서너 번 중 한번 꼴로 괜찮은 임팩트가 나온다. 그 순간 자신감이 올라간다. 하지만 이 자신감에 집중을 놓치면 어김없이 제대로 된 임팩트가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까 약 1시간 동안 신나고, 실망하고, 손목이 아파 잠시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금 자신감에 찼다가, 울적해지는 혼자만의 테니스 롤러코스터를 타고 온다. 가끔 다가와 한마디씩 훈수를 두는 코치님의 말도 꼭꼭 다 소화해보려 눈을 크게 뜬다. 기계가 내주는 일관된 공만 곧이 쳤을 뿐인데 그 사이 온 몸에 열기가 돈다.


한시간 동안 쳐낸 공을 정리하는 것도 한 세월이다. 볼머신으로 연습을 하다보면 그걸 쳐내는 실제 운동의 시간보다, 공을 다 치고 치우는 시간이 더 힘들다. 이제 끝났다는 마음가짐이라 더 힘든걸까? 그래도 이를 이겨내고 깔끔하게 정리한 코트를 보면 묘한 쾌감이 든다. 열심히만 한다고 다 잘한 건 아닌데, 에너지를 끝까지 다 쓴 날은 왠지 무언가 달라질 것 같은 설렘이 든다. 문을 나서는 나에게 코치님은 [제법 집요하다]고 표현하셨다.

IMG_1412 2.HEIC


집요하다는 표현이 나쁘지 않다. 나는 집요하게 테니스를 잘 해내고 싶고, 남편과 합을 맞추어 테니스를 칠 수 있게 되고 싶고, 또 언젠가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는 날을 마주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더욱 더 집요해질 수밖에 없겠다는 예감이 든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