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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Nov 04. 2023

예술이자 산업으로서의 영화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 맺음말

**** 이혁래 감독의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의 넷플릭스 개봉을 축하하며, 예전에 브런치에 연재했었던 '90년대 한국 영화 이야기'를 재편집 / 연재합니다. <노란문>에서 봉준호 감독이 언급했던 '거대한 라쇼몽의 용광로'라는 표현처럼, 이 글도 많은 부분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오류가 확인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최초로 제작에 참여하고 직접 배급한 한국 영화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원작으로 1989년에 나온 이세룡 감독의 <내 친구 제제>입니다. UIP 직배를 앞장서서 받아들여 완전 매국노 취급을 받았던 우진필름에서 UIP의 투자를 끌어들여 미국영화 직배사가 한국영화 진흥에도 기여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만들었다죠. 흥행성적은 참담했어요. 서울에서는 당시 우진필름이 소유했던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 <씨네하우스>에서만 상영했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아마도 국내 최초 교차상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도 아침에만요. 그러다가 어느 날은 한 두 명 있던 관객을 내쫓고 다른 상영관으로 보내기도 했다는 후문입니다. 전기값도 안 나온다고 하면서요. 너희도 더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 더 좋은 거 아니냐라는 강변하는 뻔뻔함도 빠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한국 영화의 할리우드 최초 직배작은 아쉽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30년 후, <기생충 (2019)>의 오스카 석권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곧이어 이정재 배우와 정호연 배우가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배우조합상을 탔습니다. 미국의 메이저 영화 배급사가 투자 / 배급한 한국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90년대 영화인들 중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1989년, UIP 직배에 반대하면서 당시 <레인맨>과 <인디아나 존스3>를 상영하던 극장에 뱀을 풀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불을 지르고 했던 사람들 역시, 한국영화가 수많은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아 가면서 결국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룰 거라는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 영화가 위기라고 합니다. 사실 거의 매년 듣는 얘기인 것 같아서 언제가 마지막으로 위기가 아니었나 기억이 가물하지만요. 전반적인 투자가 줄었을 때에도,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히어로 영화들이 극장을 장악해서 한국 영화가 스크린 확보가 어려웠을 때에도, 한국산 텐트폴 영화들이 천만을 못 넘기거나, 소규모 독립영화 상영기회가 줄었을 때에도 항상 한국 영화의 위기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OTT 시장성장으로 인해 극장수입이 줄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코로나와 OTT로 인해서 극장 관람객 수가 줄어든 건 한국 만의 일은 아닐 테지만, 한국의 경우 여기에  극장관람료 인상까지 가중되어 더 타격이 컸던 건 사실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한국에서 1인당 연간 4회에 상회하는 관람 횟수를 기록한 건 부담 없는 관람료 탓이 컸었죠. 적당한 비용으로 시간 때우기 좋았던 오락거리가 영화관 이용이었던 거죠.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다른 선진국들 수준으로 관람료가 현실화된 지금이, 오히려 한국 영화 시장의 민낯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극장 관람객이 줄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영화가 위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단적인 예로 2021년 <오징어 게임>흥행 성공 이후 OTT를 통한 이른바 K콘텐츠 제작 편수와 투자액은 증가하고 있거든요.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했던 2016년 이전에는 연간 90편 내외였던 제작편수는 2021년 연간 140편 규모에서 2022년 160편으로 증가했고, 2016년에는 회당 4억 원이었던 드라마 제작비도 2020년에는 회당 8억 원, 2022년 <수리남>6회 미니시리즈가 350억 원의 제작비가 들었다고 하죠. 무엇보다, K팝 이후 K콘텐츠의 저력이 전 세계로 뻗어나갔잖아요. 이제 지구촌 많은 사람들이 아주 손쉽게 K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에 익숙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외에 살고 있는 저로서도 최근 몇 년 간 제 한국 악센트가 강한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사는 게 무척 편해졌습니다. 그럼에도 극장관람객수의 저하로 인해 영화의 위기가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극장상영업이 한국 영화산업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에 있을 겁니다. 그동안 한국의 영화산업은 전 세계에 유래 없을 정도로 급성장을 했는데요. 2013년에 연간 관객 수가 2억 명을 돌파하기도 했고, 2019년 기준, 북미, 중국과 일본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시장(영화산업 주요 부문 총매출 19억 불)이기도 했죠. 이게 코로나를 겪으면서 2020년 기준으로 6천만 명, 8억 불 수준으로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2022년에는 1.1억 명, 13억 불로 약간의 회복기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2019년의 68% 수준에 머물면서 과거의 영광을 따라잡기는 요원해 보입니다. 16억 불 시장을 기록했던 2019년을 기준으로 보자면 전체 32,566명 영화산업 종사자 중에서 극장상영에 22,386명이 종사하면서 68%의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6조 4324억 원의 주요 부문 매출규모 중에서 극장 상영업 매출이 3조로 48%를 차지했지만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2020년에는 극장상영업의 매출비중이 26.5%로 줄면서 전체적인 영화산업 매출이 줄어들었습니다. 이렇듯 극장 관람객 수가 줄어든다면, 전체 한국 영화 산업의 한 축이 무너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거죠


물론, 구독기반 OTT 산업이 성장하면서 영화 / 드라마 제작업종이 동반 성장했던 것은 인정해야 하겠죠2016년에 한국 콘텐츠 제작업의 전체 매출 1조 4천억이고 종사자가 7,670명이었던 것에 반해, 2019년에는 3조, 13,453명, 2021년에는 4.5조, 13,568명으로 각각 두 배가 넘게 성장했으니까요. 무엇보다 예전에 비해 더 다양한 상상력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죠. 한 연구에서 2020년 넷플릭스 드라마를 제작한 제작진 18명을 심층 인터뷰했는데, 18명 중 15명이 향후에도 넷플릭스 드라마에 참여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유로는 안정적인 제작비, 오픈된 소재, 짧은 러닝타임, 시청률 부담 해소, 글로벌 진출 등을 들었다고 해요(유건식,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시장을 바꾸다', 임지영, <오징어 게임> 이후 1년, 드라마 판이 바뀌었네, 시사인 2022년 10월 786호 기사에서 재인용). 쉽게 말해 다른 걱정 없이 다양한 소재, 포맷으로 작품의 퀄리티에만 신경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솔직히 <노란문>의 경우에도 넷플릭스가 없었다면 과연 이만큼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의문이긴 합니다. 


하지만 영화 감상 방식의 변화를 통해서 콘텐츠의 구성이나 연출에 심각한 제한이 생기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3시간 반짜리 <대부 II>의 경우 영화 한 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그 감상 가치가 절반이하로 줄어들 텐데, 어두운 공간에 강제로 갇힌 채 대형 스크린에만 몰두해야 하는 감상 환경과 생활소품이 가득한 장소에서 소파에 앉아 보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느냐는 거죠. 당연히 OTT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영화는 점점 더 빠른 속도의 편집과 자극적인 화면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최근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된 <무빙>의 경우에도 원작에는 없는 '프랭크'라는 캐릭터를 초반에 투입해 잔인한 살육 장면을 넣은 것도, 그리고 첫날에 7회가 한꺼번에 공개된 것도 그 일환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겠죠. 이런 변화는 비단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TV가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워크맨'이라는 개인용 음향기기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인터넷 뉴스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신문 구독을 끊기 시작했을 때에도, 앨범시대가 저물고 음원 사이트의 1분 미리 듣기 시대가 되었을 때에도 예술문화의 감상 방식의 변화가 작품의 내용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그냥 불평만 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죠


TV가 등장했을 때에도, 지역 유선방송과 가정용 홈 비디오가 나왔을 때에도 극장 산업은 위기를 이겨내 왔습니다. '시네마스코프'니 '스테레오스코프'니 하는 기술적 차별성을 가지려고도 노력했었지만, 그보다 극장 관람이라는 행위가 어떤 예술 매체를 감상한다는 것 이상을 제공해 왔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극장에서 다같이 모여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사회적 트렌드에 참여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온 국민이 TV에서 <허준><무한도전>을 보고 다음날 이야기 꽃을 피웠던 것처럼, 5천만 인구의 한국에서 천만이 넘는 사람이 같은 영화를 본다는 건, 사회적으로 어떤 트렌드를 쫓기 위한 행위라는 것 외에는 설명을 할 수 없겠죠. 1993년 단성사 1개 관에서 196일 동안 상영했던 <서편제>가 103만 명의 관객을 몰았던 기록을 세운 이후, 2004년, 서울극장-합동 라인으로 배급된 <왕의 남자>가 73일 만에 전국 1200만 명, 그리고 2014년 CJ가 배급한 <명량>이 60일 만에 1700만 명 관객을 동원했었죠. 2023년에 메가박스에서 배급한 <범죄도시 3>는 상영 32일 차에 천만을 돌파한 것을 보면, 아무리 OTT가 극장시장을 잠식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어두운 공간에서 타인의 감정에 동조하며 함께 울고 웃고, 그러고나서 영화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경험을 잊지 않았다는 걸 반증합니다. 


물론 천만영화가 지속적으로 나와주는 것이 한국영화가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는 징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술이자 동시에 산업의 얼굴을 하고 있는 영화는, 여전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진정한 발전인지 의문이 있습니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스크린이 수십 배로 늘어난다고 해도, 그 모든 스크린을 할리우드 산 히어로 무비들이 죄다 장악하고 있는 현상을 보면, 이게 과연 발전인가 싶을 때도 있죠, 물론 또 한 때, 한국 자금으로, 한국 스테프들이 모여서 만들고, 한국 배우가 한국말로 연기를 하는 영화들이 국내 극장 시장의 50% 이상을 장악하고 있을 때조차, 죄다 그 나물의 그 밥 격인 조폭 영화나 최루탄 멜로물들만 가득했던 상황도 과연 이게 한국 영화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말, 정부 주도 한국산 콘텐츠 개발에 큰 힘을 보태준 이른바 '신지식인' 센세이션은, 지식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한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한국 사회에 '교양'이나 '인문학'이 멸종된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논란이나 비난들 역시, 자국 영화가 살아있을 때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 대사로 연기하는 영화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더 좋은 대안영화도, 자본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립영화들도 꾸준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반복되는 한국 영화의 위기 속에서도, 꾸준하게 작품을 만들어내고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한국 영화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종종, 홈비디오 2차 판권 시장의 몰락이나 OTT 시장의 성장 등 현실의 변화를 못 쫓아가면서 그 옛날의 낭만을 그리워하는 순간을 마주치는 일이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밌는 이야기 들은 결국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읽기 좋은 글 :



2019 한국 영화 산업 실태 조사 (2021, 영화진흥위원회, PDF 다운로드)


2020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2020, 영화진흥위원회, PDF 다운로드)


2022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2022, 영화진흥위원회, PDF 다운로드)


글로벌 OTT 동향분석 (2023, 한국 콘텐츠 진흥원, PDF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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