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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Oct 27. 2024

술의 섬

솔트 스프링 섬 - 럭클 주립공원 #2

벌써 24년 전,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아내가 모아둔 스톡옵션을 탈탈 털어서 떠난 세계일주는 무척 궁핍했었다.


벌이 없이 소비만 하게 된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여행 처음에는 하하호호 즐거웠지만, 점차 관광지 한 곳을 다녀도, 맥주 한 잔을 마셔도 과연 이게 나중에 쓸모가 있는 일인지 고민했었다. 꼬박꼬박 영수증들을 모으고, 노트와 카메라로 기록을 했다. 이렇게 큰돈을 써서 여행을 다니는 거라면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아웃풋이 나와야 한다고 조바심을 냈었다. 파리에서도 바르셀로나에서도, 뭐 하나 사 먹거나 공연 한 번 볼 때마다 많은 걱정을 했었고 종종 아쉽게 포기를 했었다. 당연히 여행 내내 아내와 징그럽게도 많이 싸웠었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의 경제 자치구 시티오브런던 (The City). 이곳저곳을 걷고 있는데, 스타벅스 에이프런을 두른 일군의 직원들이 나와서 무슨 음료를 한 컵 가득 건넸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아주 강렬한 브리티시 악센트를 구사하면서. 아… 이건 뭐람, 또.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런던 날씨 답지 않게 무척 맑고 뜨거웠던 여름, 그걸 받아 마시고 싶었는데, 솔직히 너무 마시고 싶었는데, 악명 높은 영국의 물가가 겁이 나서 받아 마실 수가 없었다. 여행지마다 잡아 둔 빠듯한 예산을 초과할까봐, 얼마인지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런 돌발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여름 한 낮 런던에서, 신제품 홍보차 나눠주는 무료 음료수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   


MBTI를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게 그 정도로 구분이 가능하고, 단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건 인정을 하지만, 그 성향을 판단하기 위한 설문은 신뢰할 수 없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 있게 알 수가 없고,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이 과연 나 자신인지, 아니면 내 희망사항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정확히 나를 표현하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P(인식형)와 J(판단형)를 구분하기 위한 질문은 허망하기 짝이 없다. 보통 '여행을 갈 때 자세히 계획을 짜는 편인가?', '무슨 일을 준비할 때 만일의 상황에 대해 대비를 하는 편인가?'라는 질문을 하는데, 내 경험에 의하면 이는 실패할 경우 내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지, 성격의 차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는 분 중에 여행 다닐 때 숙소 예약을 절대 한 적이 없다고 자신하는 분이 있는데, 만일 적당한 숙소를 못 구할 경우 그분은 약간의 금전적 손해를 감수한다면 어떻게는 찬이슬을 피할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전계획이라는 건, 최소의 비용 (혹은 최적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기 위한 것으로, 철저하게 개인의 경제 사정과 연관되어 있다. 가능하다면 전국의 P와 J를 다 모아서, 그들의 은행 잔고를 샅샅이 조사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어릴 적 미드 <맥가이버>에 감화되었던 소년 중 1인으로서, 자라면서 항상 P가 되고 싶었다. 순간순간 임기응변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그 정도의 지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많은 경우 주머니 사정이 걸림쇠였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 중에 2개만 꺼내서 먹는다면 뭘 먹을 것인가... 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먹겠다는 대답을 할 정도의 P는 될 수 있었지만, 올여름 휴가를 어디로 여행 가고 어디에서 묵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모든 비용과 변수와 효과를 계산했다. "어떻게든 넘어가겠지"라는 생각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성격'이 아니라, 짊어지고 태어난 '가난' 때문에 쉽게 할 수 없었던 것. 그랬던 내가, 이 섬에 와서 반쪽짜리 졸부 놀이를 하고 있다. 모든 음식과 주류는 현지 해결이라니 (그래도 사발면과 3분 카레는 가지고 왔지만). 마치 투스카니에서 우연히 찾은 장인의 구두가게에 들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포장해 주세요." 하는 기분이랄까. 이게 가능하게 된 것은 물론 예전에 비해 눈꼽만큼이나마 수입이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사실 전적으로 노화의 덕이 크다. 단지 늙었다는 이유 만으로 예전에 비해 많이 먹지도, 많이 마시지도 못하게 되었고, 외식에 대한 설렘도 줄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슬픈 일이지만, 이제 많이 돌아다닐 수 있는 체력도 없어져서, 아침에 나가 좀 돌아다니다가 저녁이 되기 전에 다시 숙소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허다해졌다. 때문에 아침 식사로는 빵 쪼가리 하나나 사발면 하나로 충분해진 것이다.








솔트 스프링 섬은 광역 밴쿠버에도 꽤 알려진 섬이고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편이지만, 섬에 있는 3개의 항구 중 2개가 밴쿠버 섬과 연결되어 있고, 그중 하나는 편도 30분 거리에 있을 만큼 밴쿠버 섬과 가까이 있어서, 걸프 군도 중에서도 비교적 (관광 산업을 포함) 여러 산업이 발전해 있다. 이곳 코스트코에도 입점한 '솔트 스프링 커피 (https://www.saltspringcoffee.com/)는 물론이고, '솔트 스프링 키친 (https://saltspringkitchen.com/)'에서 만든 잼이나 크래커 역시 밴쿠버 섬이나 광역 밴쿠버 여러 대형 상점에서 만날 수 있다. 그래도 가장 많이 알려진 상품 중 하나가 바로 '솔트 스프링 아일랜드 치즈 (https://saltspringcheese.ca/)'에서 만든 염소 치즈인데, 광역 밴쿠버 및 밴쿠버 아일랜드 어느 식료품 점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치즈로, 이곳 농장을 찾게 되면 실제로 염소 치즈를 만드는 모습을 창 너머로 견학할 수가 있다 (염소들이 박치기하며 싸우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카페테리아에서 먹었던 마가리따 피자는 약간 빈약한 인상에 비해서 바질 풍미가 무척 풍부해서 깜짝 놀랐다. 한눈에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바질을 동결 건조한 후 소스나 도우 반죽에 넣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선한 채소를 매번 즉시즉시 공급받지 못하는 지리적 한계를, 어떻게든 아이디어로 극복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관광객들이 오자 경쟁적으로 귀여움을 받으려고 하는 염소들



그러고는 와이너리에 잠깐 들러보기로 한다. 지난 오카나간 캠핑 이전에 우리가 이렇게 와인 시음을 다닌 적이 있던가? 모르겠다. 정말 좀 팔자가 핀 걸지도. '개리옥스 Garry Oaks' 와인 양조장은 10년도 채 안 된 젊은 와이너리로 피노그리스와 피노누와 품종의 포도를 중심으로 와인을 만든다 (https://garryoakswinery). 여기에, 북미에서는 흔하게 찾아볼 수 없다는 오스트리아 포도품종 '즈바이겔트 Zweigelt'를 도입하는 데 성공해서 2017년 캐네디언 내셔널 와인어워드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음했을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놀랍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아무리 성수기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왜 레드와인을 이렇게 차게 서빙하는가..라는 짜증만 먼저 났었던 것 같다. 양손으로 살살 데워가면서 마신 즈바이겔트에 약간 독특한 끝맛이 느껴져서, 그리고 4년, 5년 된 테이블 와인을 30불 대에 살 수 있어서 두 병 사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이 날 저녁, 캠핑장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셔 본 2020년 산 피노누와에 깜짝 놀라게 된다. 값비싼 브루고뉴 와인에서 천 가지 꽃향기가 난다는 얘기를 만화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장미향 가득한 피노누와는 실제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아니 이게 뭐지? 30불짜리 와인이 이럴 수도 있구나... 물론, 하늘 가득한 한가위 달과 그 위로 유유하게 지나가는 페리들을 보면서 분위기에 취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당장이라도 이 술을 친한 친구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는 심정. 그렇게 다음날 게리옥스 와이너리에 가서 덜컥 한 박스를 사버렸다 (그리고 여행 내내 와인 한 박스를 차에 싣고 다녔다).  


7 에이커 규모의 소박한 개리옥스 포도농장. 개리옥스 양조장에서 만들어지는 와인은 이 농장에서 재배된 포도만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쉽지만, 섬 밖으로는 유통을 안 한다.


사진 왼쪽부터, 피노그리스 포도, 피노누와 포도, 그리고 캠핑장에서 한 잔






3일 차는 캠핑장을 떠나 섬 중부에 있는 숙소로 옮기는 날. 보통 주립공원 캠핑장의 체크아웃 시한은 11시이지만, 이렇게 비수기 주중에 체크아웃하는 경우에는 좀 여유가 있다. 날은 오늘도 여지없이 화창해서 이틀밤을 신세 진 텐트를 바삭바삭하게 잘 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예약해 둔 숙소에 전화해 확인해 보니 그곳의 체크인 시간은 오후 5시.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까지 캠핑장에서 삐댈 수는 없을 것 같아 길을 나섰다. 일단 길을 나서서 점심을 먹은 후, 이 날은 맥주 양조장에 가보기 위해.


솔트 스프링 섬에 있는 사업체들의 한 가지 특이한 공통점은, 도무지 어디가 진입로인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물론 섬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들 자체가 그냥 숲이나 벌판 한가운데를 뚫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뭐라 할만한 간판을 달 수 없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솔트 스프링 치즈'처럼 유명한 비즈니스들은 진입로 100미터 전방 행길에 무슨 안내판이라도 세워둘 만 한데 그런 걸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구글맵 역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서, 구글맵을 안내를 받고 따라 도착한 어느 민가에는 작은 입간판에 "치즈 공장으로 가려면 오던 길로 50미터 더 가시오"라고 쓰여있었다.


솔트 스프링 맥주 양조장 (https://www.saltspringbrewing.com/)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냥 구글맵의 안내를 받아 진입로로 들어가긴 했는데,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서 이 길이 맞는 건지 끝까지 의심해야 했었다. 그래도 좀 더 올라가 보니 아주 귀여운 통나무 집이 눈에 들어온다. 음... 규모가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갔더니 맥주의 종류가 9가지나 된다. 경험상 이런 맥주 양조장은 숙성을 통해 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시장에 나와있는 맥주의 흉내를 내기 위해 향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도 그렇게 맥주를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포터와 스타우트에는 어디선가에서 이미 맛을 봤던 느낌이 나기도 한다. '퓨마' 대신 참치가 그려져 있는 '튜나' 상표의 츄리닝을 입는 느낌이다. 그런데, Hazy IPA라는 이름의 맥주는 매우 독특했다. 어쩐지 헤페바이센 맥주의 상큼함이 나면서 동시에 묵직한 뒷맛을 같이 가지고 있다. 도수도 다른 맥주에 비해 조금 높은 편. 조금 더 마셔보며 천천히 음미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당번 운전기사 역할을 맡은 처지라 신나라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종류별로 몇 캔씩 사서 일단 숙소로 향하는 수밖에.



 

솔트 스프링 맥주 양조장에서는 음식을 안 파는 대신, 손님이 직접 음식을 가지고 갈 수 있어서 점심 식사 때 남았던 감자 튀김을 들고 갔다.






4일 차 화요일, 이날은 갠지스 다운타운에 또 장이 서는 날이다. 외지에서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주는 토요일 장에 비해서는 규모가 무척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섬에서 유명한 농장이나 비즈니스들은 꼬박꼬박 참가를 한다. 장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곳이 있었는데, 바로 '제인스도 (https://www.janesdough.ca/)'라고 하는 글루텐 프리 빵집이었다. 글루텐에 민감한 사람들이 많은 북미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글루텐프리 음식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었는데, 아무래도 밀가루 음식의 쫄깃함을 담당하는 것이 글루텐인지라 나로서는 무척 먹기 곤란한 음식이라는 인상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 '제인스도'의 빵은 견과류와 말린 과일들을 매우 매우 풍부하게 넣어서 그런지, 아... 글루텐 프리가 이런 맛을 낼 수도 있는 건가, 하는 놀라움을 주었다.


몇 부스를 지나 한 구석에 소규모 증류소(https://www.saltspringshine.com/)에서 만든 술을 팔고 있었다. 아무래도 규모가 작을 경우 숙성보다는 증류기를 통해 만들 수 있는 드라이 진이나 보드카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BC 주에서 수확한 꿀을 넣어 만들었다는 '문샤인 Moonshine'이라는 술을 팔고 있었다. 으응? 그래도 30년 넘게 술을 마셨는데, 문샤인이라는 술은 듣도 보도 못했다. 살짝 맛을 봤는데, 목 넘김은 뜨겁지만 입 안에 오랫동안 달콤한 향이 남는다. 술이 아니라 뜨거운 기운을 삼킨 것 같다. 이걸 먹고 나니 다른 진이나 보드카는 그냥저냥 평범하게 느껴졌다. 한 병을 사들고 나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문샤인'이라는 주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금주법 시대 때부터 몰래 만들어진 밀주 위스키를 문샤인이락 불렀다고 한다. 요즘은 보통 소규모 증류소에서 3번 증류하고 나서 숙성을 하지 않은 채 판매하는 위스키를 말한다고. 그래서인지 희석하지 않은 캐스크 스트랭스 급의 위스키처럼 도수는 제법 높아 65도. 그래도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서 오븐에 구워 먹은 달콤 짭짤 마우이 립과도 무리 없이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6일 차는 갠지스 다운타운 근처에 있는 민영 캠핑장 '모히나 크릭'으로 또 이동하는 날이었다. 가끔 이렇게 리조트급 숙소에서 묵고 나오면, 나는 사실 캠핑을 좋아서 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마음껏 화장실을 즐기고, 마음껏 샤워를 하고, 뽀송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다면 풍경이니 공기니 분위기니 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 하지만 아직 복권에 당첨되지 못 한 관계로 그냥 노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래도 험악했던 일기예보 탓에 이번에 갈 민영 캠핑장에는 캐빈을 예약했다. 비록 매트리스는 없어서 침낭과 매트를 챙겨가야 하지만, 그래도 멀쩡한 지붕과 냉장고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캠핑에는 아예 큰 아이스 박스를 챙길 필요가 없었다. 첫 이틀밤만 버티면 되었기 때문에.


모히나 크릭 캠핑장의 캐빈



11시를 칼같이 맞춰 숙소에서 퇴실한 후 캠핑장 체크인 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서, 그간 벌려왔던 스윗워터 증류소(https://www.sweetwaterdistilling.ca/s/shop)에 가보기로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도 정말 첩첩산중 속에 있는 허허벌판에 있었다. 안내 표지판 따위는 전혀 없는. 증류소 앞에는 손바닥 만한 연못이 있는데 그걸 보고 스윗워터라고 하는 건가? 그런데 겉보기에는 황량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 근사한 구리 증류기가 있었다. 그 증류기로 섬에서 나는 사과와 함께 보드카와 드라이 진을 만들고 '오드비'를 만든다고 한다. 불어로 '생명의 물'이라는 뜻을 가진 오드비는 포도 이외의 과일로 만든 브랜디 원액을 말하는데, 이걸 숙성시키고 희석시켜서 브랜디라는 이름을 달고 시장에 내놓는다.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브랜디가 아직 출시되기 전이라는 말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는데, 섬을 떠나는 당일 갠지스 다운타운에 있는 주류판매점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아 정말. 이번 여행은 개이득으로 점철되는구나. 야호.



숲 속 벌판에 있는 증류소



다시 차를 돌려 캠핑장에 도착했지만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 문 앞에는 "체크인하기 전에 캠핑장으로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커다란 안내문과 "2시에 돌아오겠음"이라는 작은 안내문만 붙어 있었다. 이 때가 12시 조금 넘은 시간. 주차장에 차 대놓고 넋 놓고 기다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었는데, 마침 캠핑장 옆에 수제 사이다 양조장이 있었다. 서구권에서 '사이다'라고 하면 사과발효주를 말하는데, 아무래도 당분이 발효하는 과정에서 가스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주류매장에서 파는 대기업 사과 사이다 역시 발포주 형태를 띠고 있다.


시간이 남아서 찾아간 '사이다웍스 (https://www.ciderworks.ca​)' 양조장은 생각보다 근사했다. 섬에서 자란 유기농 사과만으로 다른 첨가물을 넣지 않은 사이다를 만든다는 이곳에는 자체적으로 사과농장도 보유하고 있었다. 점심도 할 견 간단한 피자와 타코를 주문한 뒤, 사이다 플라이트 (시험비행 Test Flight에서 나온 말로, 다양한 종류의 음료나 스낵 샘플을 조금씩 맛보는 걸 말한다)를 마셨는데... 아... 뭐라고 할까... 차게 식은 청국장 국물을 마시는 느낌이랄까… 정말 몸에 건강할 것만 같은 맛이었다. 설탕 무첨가 사이다라더니, 이렇게 안 달 수가 있나. 꼬리이이한 것이 무슨 가내수공업으로 만든 막걸리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피자랑 그럭저럭 잘 어울린다. 다양한 사이다 샘플들 중에서 특히 Bright Farm이라는 사이다가 잘 어울렸다. 김치부침개나 파전과 붙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또 두 병을 집어 들고 나오게 된다.  



신선한 경험이었던 유기농 무첨가 사이다 플라이트






7일 차인 금요일에는 그동안 안 가봤던 섬 북쪽 구석구석을 자동차로 점을 찍으면서 다녀보기로 했다. 지난밤 몸에 열이 조금 있고 오한이 나는 것 같았는데, 밴쿠버에서 우정 들고 싸 온 비비고 버섯 육개장으로 아침을 먹고 나니 속이 확 풀려버렸다. 아.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뚱이는 점점 까칠해진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금방 회복된 것이 어디야.


캐나다 검역 통관 과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고기가 포함된 한국 식료품들이 수입되는데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소고기보다 표고버섯이 더 나라이지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일단 섬을 관통하는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계속 올라간 다음 해안 도로를 타고 돌아보려고 했는데 몇 킬로 안 가서 해변 뷰는 사라지고 다시 내부 순환도로로 이어진다. 그러는 와중에 아주 당연한 듯이 사슴을 만나고, 오리 떼를 만나고, 섬에 단 하나 있는 영화관에 들렀다 (주중이라 오후 상영밖에 없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라벤더 농장 (https://www.lavenderandblack.ca/)에 잠깐 들러서 구입한 칵테일 용 라벤더 에센스는 실제 사용해 보니 단 한 방울만 넣더라도 너무 진한 화장품 냄새가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그대로 남아서, 이게 과연 제대로 맞게 쓰고 있는가 끝까지 의문이 남기도 했다.




평방 200 킬로가 채 안 되는 이 작은 섬에 와이너리만 4군데가 있다. 증류소 등을 포함하자면 10군데의 술 제조소가 있는 셈이다.  뭐 마음만 먹는다면야 이번 여행에 모든 곳을 다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연일 계속되는 음주로 이제 몸이 좀 피폐해지는 걸 느꼈다. 섬을 떠나기 전날 금요일, 어제 갔었던 사이다 양조장과는 또 다른 사이다 양조장에만 한 군데 더 들러보는 걸로 만족하자고 생각한다.


'스프링 와일드 사이다(https://saltspringwildcider.com/)'는 전날 갔던 '사이다 웍스'와는 달리 좀 더 기업화되어 있는 곳으로 이 양조장의 사이다는 광역 밴쿠버와 밴쿠버 섬에 있는 웬만한 주류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찾아가는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 이 정도 기업이면 도로에 입간판이라도 하나 세울 만한데. 점심시간 즈음에 도착해서 그런지, 아니면 금요일이라 그런지 제법 넓은 다이닝 공간 테이블은 많이들 채워져 있었다. 건물 뒤편으로는 더 넓은 피크닉 공간이 있었는데, 여기는 주류 서비스 라이선스가 안 나왔다는 이유로 이곳 테이블을 이용하려면 셀프서비스만 가능했다. 그래도, 저 아래 펼쳐져 있는 사과농장을 보면서 한 잔 하는 게 더 낫지.



'사이다 웍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종류의 사이다를 팔고 있었는데 10잔을 담은 플라이트의 대부분은 지극히 대중적인 맛. 그중 실험적인 사이다라고 하는 것들도 내 입에는 충분히 달디달았다. 그래도 시장기가 돌았던 참에 근사한 안주와 함께하니 왠지 입에 달라붙는 것 같아서, 이 역시 한 병을 집어 들고 나오게 되었다. 마침 이날 저녁은 김치볶음밥 예정. 왜 사이다들은 한식이랑 이렇게 잘 어울리는가?






이렇게 쭉 적어놓고 보자니, 졸부 흉내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여행은 결국 음주여행이었구나. 이 정도면 술에 미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뭐, 사 온 술을 단번에 다 마시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 여행지에서 찍은 스냅을 꺼내보듯이, 자기 전에 한 잔씩 하는 것뿐이니까 그나마 일말의 양심은 있는 것인가?


2024년의 휴가도 이렇게 끝이 났다. 파워 J인 아내는 벌써부터 내년 휴가 계획을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2024년의 휴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년 전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추석 보름달의 솔트 스프링 섬 휴가를, 올해는 아내와 그냥 단둘이 보냈다. 예전처럼 싸우지도 않고, 그냥 조용하고 무난하게 보냈다. 그렇다고 광기에 가까왔던 술 구매 폭주를 적적함의 반작용이었다고 변명하려는 건 아니고, 좋은 술도, 좋은 구경도, 여럿이 같이 하는 편이 더 재밌었던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는 이야기. 결혼 25년 차가 되는 2025년에는 과연 어떤 캠핑을 하게 될라나.  



출처 : saltspringadventurema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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