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 스프링 섬 - 럭클 주립공원 #1
항상 그렇듯이, 연초에는 그래도 장구한 계획이 있다. 올 한 해는 어떻게 음풍농월할 것인가. 어떤 놀이를 즐기고, 어떤 술을 마시며, 어디 가서 캠핑을 할 것인가, 하는. 보통 아내가 1월 첫 두 주 동안 각종 인터넷 블로그 등을 뒤져가면서 구상을 하는데, 1월 중순 즈음 캐나다와 미국의 국립공원 캠핑장 예약이 시작되면 마음이 급해진다. 마음'만' 급해진다. 사실, 하는 건 없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아주 습관적으로 여름휴가와 가을휴가 동안 캠핑 갈 국립공원을 예약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 한 해 걸러 씩 들렀던 곳은 밴쿠버 섬 서쪽 해안 마을 '토피노 Tofino'와 앨버타 주에 있는 세계적인 관광지 캐네디언 록키. 하지만 트레일러를 끌고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것에 점점 피로감을 더 크게 느끼게 되면서, 작년에는 둘 중 아무 곳에도 가질 않았었다. 그래서인지 올 해는 두 곳 다 예약을 할 계획이었다. 여름에는 록키, 가을에는 토피노에서 캠핑, 뭐 이런 식으로. 아니면 순서를 바꾸든지. 하지만 아내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아내는 여름에 오카나간으로 캠핑을 가고 싶은 꿍꿍이가 있었는지, 록키와 토피노 모두 가을로 예약이 되었었고, 결국 9월로 들어서면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니, 사실은 7월에 오카나간에 갔다 온 후부터, 그리고 주유소에 들어가다가 트레일러에 굵직한 상처를 남기게 된 후부터, 가을 휴가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휴가의 주활동이 캠핑인 우리에게 있어서 날씨는 가장 중요한 요건 중에 하나가 된다. 날씨의 시뚝빼뚝 변덕 때문에 요즘 일기예보만큼 믿을 수 없는 건 없지만, 그래도 장기 예보가 나오는 2주 전이 닥쳐야지만 어디로 갈지를 보통 결정하게 된다. 어디로 가든지, 이번에는 카약과 전기 자전거를 가지고 갈 예정이었다. 밴쿠버 섬 서부 토피노와 유클렐레를 연결하는 퍼시픽 림 자전거 도로를 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 개인 차량 진입이 금지된 모레인 호수 (캐네디언 록키)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신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8월이 지나자 과연 내가 트레일러를 끌고 그 먼 곳까지 가고 싶은 걸까... 하는 회의가 진하게 들었다. 뭐 가믄 가는 거지, 못 갈 건 또 뭐람... 하면서 마음을 다지게 되는 때도 있었지만, 장거리 운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아내 때문에 또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과 같은 형국이 되면서, 점차 록키로 가는 계획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 와중에, 8월 중순경 자스퍼 국립공원에 큰 산불이 나서 주민들과 캠퍼들이 모든 걸 버려두고 몸만 빠져나오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아... 올해 록키는 그냥 포기할까??? 하고 결론 짓게 된 것이다. 결국 남은 옵션은 토피노.
그러던 중 비씨주에서 운영하는 공영 페리회사인 BC 페리에서 광고 이메일을 하나 받게 되었다. 여름철 성수기가 끝나면서 빅토리아나 토피노와 같은 밴쿠버 섬의 여러 관광지에 있는 숙박업소들, 그리고 밴쿠버 섬과 광역 밴쿠버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섬들 ('걸프군도 Gulf Islands'라고 합니다. 같은 위치에 있지만 국경너머 미국 워싱턴 주에 속하는 섬들은 '산후안제도 San Juan Isalnds'라고 하고요)에 있는 숙박업소들은, 9월이 되면 자연스럽게 가격 할인이나 1박 무료 추가와 같은 상품을 만드는데, 이를 BC 페리와 같이 프로모션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광고 메일에서, '솔트 스프링 섬 Salt Spring Island'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아, 맞다. 여기 좋았지... 하면서... (https://brunch.co.kr/@vanheading/82) 마침 또 추석이네....
그래서 이걸 넣어 같이 휴가 일정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솔트 스프링 섬의 백미는 럭클 주립공원 캠핑장 (Ruckle Provincial Park Campground)이 되겠지만, 해안가 따라서 만들어진 캠프 사이트에서 그곳 풍경을 백 퍼센트 즐기려면 트레일러가 아니라 텐트 캠핑을 해야만 한다. 샤워장도 없고 수세식 화장실도 없다. 천상의 풍경을 가지고 있지만 지옥의 캠핑 환경 역시 가지고 있다. 지난번에 갔을 때 아내와 처제는 섬 시내에 있는 공영 수영장에 가서 샤워와 화장실을 해결하기도 했었다. 그런 곳에서 아무래도 2박 이상의 캠핑은 어려울 테니, 이렇게 숙박업소를 연결할 수 있다면 차라리 잘 된 셈이었다. 그런데... 2주 치 일기예보를 보고 있자니 휴가 시작 날(캠핑장 도착 날)과 그다음 날에는 폭우가 내린단다. 도착 날이 주말인데다가, 일주일 남짓 시간을 가지고 예약을 하려니 샤워시설이 있는 민영 캠핑장도 예약이 다 차있는 상태. 아웅 정말... 그냥 토피노로 가야 하는가, 하며 봤더니, 365일 중 203일 동안 비가 오는 동네인 토피노는 휴가 일정 내내 폭우가 예약되어 있었다. 헛헛헛
그렇다고, 숙소에서 먼저 묵고 난 후 캠핑을 할 수는 없는 기분. 꼭 맛있는 걸 아껴뒀다가 나중에 먹는 성격이 아니더라도, 편한 곳에 있던 몸이 노숙이나 푸세식 화장실로 고생을 하게 되면, 왠지 더 쎄게, 더 지독히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 뭐 나름, 겨울 텐트를 가져갈 테니... 비가 오더라도 이틀 밤은 어떻게 버티겠지.. 하는 마음으로 BC 페리 상품을 예약했다. 첫 이틀 밤은 럭클 캠핑장 캠핑, 다음 사흘 밤은 섬 중앙에 있는 숙소 'The Cottage', 그리고 마지막 이틀 밤은 다운타운 갠지스 근처에 있는 민영 캠핑장 '모히나 크릭 캠핑장'으로. 그리고 모히나에서는 캐빈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출발 날. 일기 예보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화창해도 이렇게 화창할 수가 없다. 바람은 무척 불었지만... 뭐 이 정도는. BC 페리 관광상품을 구입하면 페리 예약이 포함되어 있어서, 터미널에 몇 시간씩 일찍 도착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래도 제시간에 출발하려는 배들은 보통 20분 전에는 터미널에 입항하기 때문에, 그 배에 탑승하려면 최소한 한 시간 전에는 가 있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남아서 대합실 구경을 느긋하게 해 본다. 앗. 내가 좋아하는 Parallel 49 커피를 파는 곳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두통도 없네. 매년 휴가를 출발할 때면 두통에 시달리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시작부터 조짐이 좋다. 이번 휴가의 상쾌한 시작은 이 커피 한 잔으로 완성될 것 같았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샷을 벌컥 마시고 나니 살짝 흥분되는 것도 같다.
승선 후 차량 주차 데크를 내려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이 늘었다. 자전거 여행을 즐기는 친구 한 명도 최근에 모임 사람들과 솔트 스프링 섬으로 일박 캠핑을 다녀왔다더니, 아무래도 전기 자전거가 활성화되면서 자전거 여행이 가지는 경계 자체가 좀 더 넓어진 것 같다. 로드 바이크에 간단한 장비만 달고 탑승한 사람들도 있지만, 캠핑장비들을 주렁주렁 매단 자전거도 많이 보인다. 럭클 캠핑장의 경우 9월 노동절 연휴가 끝나면 그 뒤부터는 예약을 안 받고 선착순으로 운영을 하는데, 저 많은 자전거들은 곧 우리와 캠핑장 바닷가 앞자리를 다툴 경쟁자가 될 운명이었다. 과연 자리가 남아 있을 것인가... 살짝 불안해지기도 한다. 캠핑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내에서 먹거리 쇼핑을 잠깐 할 생각이었지만, 그냥 다짜고짜 섬 남 쪽에 있는 캠핑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건가? 뭐.. 아무리 그래도... 자전거보다 늦게 가겠어.. 싶었는데, 막상 섬에 도착하니 이건 뭐, 거의 페리에서 내리자마자 끊임없는 교통체증에 시달리게 된다. 자전거 들은 그 옆으로 슉슉 지나가고.
게다가 한참 후 도착한 갠지스 다운타운에는 주말 장터가 열리는 바람에 도무지 주차를 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놔... 빽빽한 다운타운 골목을 몇 바퀴나 돌다가, 결국 내가 계속 도는 동안 아내만 내려서 생수를 사 오는 걸로 계획을 바꿨다. 주말 섬마을의 시내 교통 상황에 대해 너무 얕봤다고 해야 하나.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그래도 자리 하나는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리하여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전거 캠퍼들보다 먼저 캠핑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때가 12시 반.
일단 주차를 한 후 자전거를 끌고 캠프 사이트를 찾는데... 아... 눈앞에 인디고 블루의 바다가 주와아아아아악 들어오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곳은 다른 BC 주립공원 캠핑장과 달리, 캠프 사이트가 자갈 바닥이 아닌 야생 풀밭 위에 조성되어 있어서 초원과 바다의 조화가 무척 아름답다. 우와아아아아... 근데.. 성수기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주말이라서 그런지 제법 캠퍼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해가 잘 들고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사이트가 비어 있는 거지? 궁금했지만... 뭐 개이득, 이러면서 짐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잠시 후 사이트 바로 앞에 누군가가 만들어둔 샤머니즘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기겁했다. 근데 뭐. 캠핑장의 지박령...이라는 것도 제법 멋들어져 보이잖아?
처음에는 평소 워크인 캠핑 때 사용하는 웨건에 텐트 등 캠핑 짐들을 싣고 왔다 갔다 했는데, 왠지 저 웨건을 자전거에 달고 다녀도 될 것만 같았다... 싶어, 웨건 손잡이와 자전거 뒤쪽을 고무줄로 연결하니.. 어 이게 되네? 덕분에 꽤나 덜컹거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짐들을 나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주립공원과 계약한 관리회사에서 파견된 파크 레인저 외에도 캠핑장에 상주하고 있는 캠핑장 호스트 부부도 있었는데, 짐을 웨건에 실은 채 유유하게 자전거로 왕복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따봉을 날려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캠핑장 내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많이들 타고 다니길래 몰랐는데 ㅠㅠ 과연 그 따봉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짐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치고 나서, 저녁 찬거리와 마실 것 등을 사러 나섰다. 트레일러를 안 끌고 최대한 가볍게 모든 걸 현지 조달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컨셉 중 하나였기에 섬에 도착하자자 쇼핑을 좀 하려고 했건만, 문자 그대로 가는 날이 장날이라서 그냥 물만 한 통 사가지고 와야 했던 것이다. 오후에 섬 남쪽 항구 근처에 있는 식료품점에 들러 보기로 했다. 이렇게 화창한데, 이렇게 풍경이 좋은데, 오늘 또 보름에 가까운 달이 뜰 텐데, 그걸 맹숭맹숭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내가 예전에 일했던 B섬의 식료품점과 마찬가지로, 이곳 식료품 점 역시 주류판매 면허를 가지고 있었는데, 가게 주인 말로는 자기가 아는 소믈리에가 엄선한 와인들을 모았다고 한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BC주의 공영 주류매장에서는 잘 찾을 수 없는 와인들 - 특히 프랑스 와인들이 무척 많았다. 소믈리에가 적어둔 코멘트가 괜찮아 보이는 와인은 한 병 집었지만, 입맛에 맞을 만한 곁들이 안주 거리를 찾기는 힘들어서, 이 날의 와인 안주는 3분 카레와 소시지로 당첨되었다. 테이블 앞에 느긋하게 앉아서 와인을 홀짝거리며 저 너머 천천히 지나가는 배의 모습의 보고 있자니 BC 페리의 선박도 이렇게 보니 무슨 생물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마치 물을 뿜으며 느릿느릿 헤엄치는 흰 수염 고래처럼.... 그러면서 아 이게 정말 휴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부터 이틀간 100ml의 폭우가 내린다고 협박을 하더니, 이렇게 뻥을 칠 수가 있나. 그래도 명색이 기상청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말이지... 하는 생각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지나가는 배들을 보고 있자니 벌써 달이 나오면서 해가 지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어젯밤에 본 일기예보마저도 오늘 밤 비 올 확률이 100%로 되어 있었다. 이런 모지리들. 쯧쯧쯧... 하며 와인을 한 잔 더 하려고 했더니... 컵이 완전 젖어 있는 걸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테이블도, 스토브도, 마치 증기를 쐰 것처럼, 세세한 방울방울들이 빼곡하게 맺혀있다. 아니나 다를까 카메라 렌즈 역시 뿌옇게 습기로 덮여있었다. 비 올 확률이 100% 정도 되면, 비가 안 와도 이렇게 다 젖게 되는 거였구나.
다음날 새벽, 화장실로 향하던 아내에게서 카톡을 받았다. 사슴들이 길목을 막고 있어서 화장실을 못 가겠다고. 아, 맞다. 이 캠핑장에는 사슴이 있지. 6년 전에 왔을 때에도 어스름이 내리거나 여명이 다가올 때면 항상 사슴들이 어슬렁거리며 캠핑장을 활보했었다. 캠핑장뿐만 아니라 섬 전체 이곳저곳에 사슴이 많았었다. 그런데 어쩐지, 올 해의 사슴은 예전 그 사슴에 비해.... 뭐라 할까... 조금 무섭게 생겼다. 예전에는 갈색 가죽 위로 얼룩무늬가 있던 전형적인 꽃사슴이었는데, 지금은 회색 가죽에 뿔도 좀... 악마 뿔처럼 생겼다고 해야 하나? 가느다랗고 길쭉한 뿔이 휘어져있었다. 그렇다고 송곳니가 삐죽 길게 난 고라니는 아니었지만. 그렇더라도 사슴들이 한가롭게 어술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는 모습 뒤로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는 새벽, 바다를 가로지르는 페리, 그리고 그 위로 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걸 보고 있자니.. 이게 정말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가 싶어서, 새벽 요의를 참으며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가까운 시내 : 풀포드, 갠지
광역 밴쿠버로부터 접근성 : 1/5
이동통신 / 데이터 : 잘 되는 편
프라이버시 : 2/5 (RV 사이트), 1/5 (워크인 사이트)
수세식 화장실 / 샤워실 : 없음
시설 관리 / 순찰 : 1/5
RV 정화조 : 없음
RV 급수 시설 : 없음
캠핑 사이트 크기 : 2/5 (RV 사이트), 원하는 만큼 (워크인 사이트)
나무 우거짐 : 4/5 (RV 사이트), 2/5 (워크인 사이트)
호숫가 / 강변 / 해변 : 있음
햇볕 : 2/5 (RV 사이트), 4/5 (워크인 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