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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Aug 20. 2024

시그널 #1

골든이어즈 주립공원 - 노스비치 (North Beach) 캠핑장

하인리히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한 번의 대형사고가 터지기 전에 29번의 작은 사고들이 발생하고, 그전에 300번의 소소한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것으로, 미국의 보험회사에 근무하던 허버트 하인리히가 사고 통계를 연구하면서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재난이나 산업재해, 심지어 전쟁을 방지하는 데 있어서 아무리 사소한 조짐이라 할지라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 이런 소소한 사건들을 대형 사고의 징후로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영화 속에서야 (특히 공포영화) 이렇게 사소한 조짐에 일일이 겁을 먹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주인공의 걱정이 나중에 가서는 결국 다 들어맞는 것으로 드러나는 클리셰가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어디 그런가? 애초에 인생 게임이란 시작부터 불확실하고 소소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며 진행되는데. 어떤 사소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 이게 나보고 지금이라도 그만두라는 예언인가?' 하며 포기를 했다가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게다가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밥벌이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때마다 작은 조짐에도 주저하고 포기를 하는 것이 과연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나약함이나 게으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많은 것이다 (여담이지만, 아시아권 국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창의력이나 상상력, 그리고 소통능력이 떨어짐에도 북미, 유럽 국가에서 실제 사회생활을 할 때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어릴 적부터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해내는 훈련이 되어서 그렇다는 최근 연구가 있습니다. 슬프지만, 사실입니다).


여전히 싸움에 지기 싫어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나로서는 더 그렇다. 저런 사소한 조짐을 괜히 시비 털리는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포기를 하는 걸 지는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도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심박이 145가 넘고 물에 들어가기만 해도 숨쉬기가 답답한 적이 많았지만 그냥 F코드라고 생각했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때 가장 큰 장벽이었던 F 코드. 손가락에 쥐가 몇 번 나고 수많은 삑사리를 거치고 나서도 나의 F코드는 40년째 여전히 꼴사나운 채 본인에 대한 너그러움만 점점 커졌지만, 그래도 F코드를 짚고 나서 흉내 낼 수 있었던 노래가 화악 넓어졌던 걸 기억하면, 심박이 높게 뛰고 숨쉬기가 불편하다고 해서 수영을 금방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황장애 따위, 17대 1로 덤벼도 맞서 싸워주겠어...라는 심정으로 묵묵히 수영장에 다녔다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어서 이제 안 다닙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이번 캠핑만큼, 가지 말라는 조짐이 많았던 캠핑도 없었던 것 같다.






회사 사정으로 예년만큼 많이 못 가게 된 캠핑. 그래도 가능한 일정마다 예약 시도를 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번 8월에는 캠프 사이트를 못 잡았었다. 그나마 잡은 것도 8월 중순 주말에 워크인 캠프 사이트. 풍경은 좋은 곳이지만 차를 밖에 세워두고 짐을 날라야 하니 좀 귀찮아졌더랬다. 지난 7월 캠핑에서 폭염에 어지간히 고생을 했었고, 녹조류 때문에 몸에 알레르기가 생긴 것이 여전히 낫지 않아서 더 그랬다. 그래서 8월 캠핑은 아무래도 포기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는데, 갑자기 골든이어즈 노스비치 캠핑장에 있는 더블 사이트가 떴다고 공지가 왔다. 아... 더블 사이트는 사이트 두 개 가격을 내야 하는 건데... 이걸 하는 게 맞나? 게다가 노스비치에는 수세식 화장실도, 샤워시설도 없다. 때문에 좀 싸긴 하지만 (2024년 기준, 일박에  $23. 샤워시설이 있는 주립공원 캠핑장은 일박에 $35) 그래도 무척 불편할 것 같아 망설였다. 하지만.. 사이트를 보니 캠핑장 가장자리, 숲 쪽으로 딱 붙어 있는 곳이라 꽤 탐이 난다. 프라이버시도 좋고 조용할 것 같다. 또 이렇게 그냥 보내면 8월 달에는 캠핑을 전혀 안 하고 지나가겠구나 싶었다. 그게 뭐라고.


예약을 하고 나니, 겸사겸사, 지난 몇 주간에 걸쳐 수리를 마친 트레일러 상태도 체크를 해야겠다 싶었다. 더블 사이트라 지인 가족도 초대를 했더니 주저 없이 온다고 한다. 잘됐다. 같이 술 마신지도 오래된 지인인데. 그렇게 뭘 먹을지, 뭘 할지 준비를 하고 있다가, 출발 3일 전쯤? 사소한 일로 아내와 대박 싸웠다. 그리고 받은 한 통의 문자.





허이구우. 증말... 뉘에뉘에. 그동안 같이 캠핑 다녀 주셔서 무지무지 황송했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간만에 솔로 캠핑으로 바꿔 준비하게 되었다. 트레일러 대신 텐트를 챙겼고, 바닥에 까는 매트도 한 개만, 음식이나 주류들도 일 인분을 챙겨가면서. 불평 안 듣고,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도 즐기고, 부엌이 난장판이 되어 있는 걸 보며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어지고... 그렇게 이틀 동안 평온한 시간을 보냈는데...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잘못은 내가 했지. 평온한 생활도 좋지만 잘못에 대한 건 사과를 해야겠다, 싶었던가? 아무튼 출발 당일, 회사 근무를 마치고 집에 와서 화해를 하고, 또 급하게 추가로 아내의 캠핑짐까지 챙겨서 떠나게 되었다.  


캠핑장 입구에서 체크인을 하는 동안 캠프 파이어나 촛불처럼 금방 끌 수 없고 불씨가 날릴 수 있는 오픈파이어가 금지되었다는 얘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비씨주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 산불 때문에 더욱 강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곰 얘기를 안 하네? 그놈의 곰 두 마리 레퍼토리가 얘네들도 이제 지겹나? 하며 별생각 없이 노스비치 캠핑장으로 들어갔다. 아... 그런데 식수가 없다. 샤워시설이 없었던 건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수돗가가 없었다는 건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길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몰랐을까? 결국 다음 날 아침에 근처 골드크릭 캠핑장에 가서 물을 한가득 떠 와야 했다. 이날은 낮에 30도까지 올라갈 예정. 식수를 든든하게 확보해 두는 것이 뭣보다 중요했다. 이 정도로 시그널이 반복되었으면 알아채릴 법도 했건만, 이번에도 무시하고 굳이 차를 몰고 아래로 내려가 물을 떠 오는 걸로 극복했다.  


달고나는 달고나


로워 폭포 (Lower Fall) 산책로


밤늦게까지 마시고 떠들고, 달고나 만들고 하며 놀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캠핑장 근처 폭포까지 지인네 강아지 '조이'와 함께 산책을 다녀왔다. 누룽지를 끓여 해장을 한 후 자리에 앉아 지인들과 또 배우자 험담을 당사자 앞에서 화목하게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클랙션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 1~2분간 끊임없이. 이게 뭔가? 이 나라에서 이 정도로 클랙션을 울릴 일이 뭐가 있을까? 잘 들어보니 차량 알람 소리와도 섞여 있다. 사고가 났나? 노스비치 캠핑장은 말 그대로 해변과 가까이에 있어서 여름철 낮에는 대부분의 캠퍼들이 호숫가로 내려가 놀고 있을 텐데...  우리라도 가봐야 하는 건가? 이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다 보니 소리가 멈춘다. 일은 잘 해결이 되었나? 도대체 뭐였던 거지?


지인들이 이날 오후에는 밖에서 다른 일정이 있어서 점심을 같이 먹는 대신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팔라펠 랩. 지중해 지역이나 중동 지역에서는 매우 대중적인 도시락으로, 병아리 콩과 큐민 베이스의 반죽을 올리브기름에 튀긴 후 피타 빵에 토마토, 오이, 생양파를 놓고 타지키 소스와 허머스를 얹어서 싸서 랩으로 싸서 먹는다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56896). 개인적으로는 채식요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데, 큐민의 독특한 향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이다. 중동 사람 겨드랑이 냄새 같다는 얘기까지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이 친구가 채식주의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소개해줄 겸 도시락으로 준비했었다 (알고 보니 몇 달 전에 채식을 포기했답니다).


반죽을 만들어 10분 정도 불린 후, 완자를 빚어 기름에 던지고 있는데, 갑자기 공원 관리인 한 명이 트럭에서 내리더니 잔뜩 흥분한 채 뭐라고 한다. 곰이 다닌단다. 이 곰은 사람을 안 무서워해서 사람이 있어도 그냥 사이트로 들어온단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지만 순하지는 않단다. 아이스 박스 여는 법도 잘 안단다. 지금 요리 중인 건 알지만 빨리 마무리한 후, 음식 냄새나는 모든 걸 차 안에 넣고 잠가두란다. 차 문도 열 줄 아니까 꼭 잠가두라고, 순식간에 갱스터 랩처럼 속사포로 퍼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서둘러 지인의 강아지를 차로 먼저 옮길 때까지도 현실감이 없었다.  아이스 박스도 열고 차 문도 열 줄 안다고? 그럼 왜 곰을 하고 있지? 아니, 정말 곰 맞아? 곰의 탈을 쓴... 뭐 이런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계속 요리를 했다. 어쩐지. 보통 캠핑장 들어올 때 곰에 대한 경고를 한 번씩 받는데, 이번엔 그냥 산불 얘기만 하더라니. 이제 와서 뒷북을 때리는구먼, 또. 이러면서. 이때까지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친구들 몫의 팔라펠 랩 도시락을 만들어 건네주고, 나머지 반죽을 다 튀기고 있는데, 다른 공원 관리인이 트럭을 타고 또 나타난다. 바로 조 앞에 곰이 있단다. 그리고 또 똑같은 소리. 지금 요리 중인 건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한 한 빨리 마치고 차에 넣어두란다. 마침 튀김은 다 마친 상태였다. 이쯤 되니까 좀 불안해졌지만, 그렇다고 테이블 위에 먹을 걸 남기고 달아날 수도 없는 노릇. 시간이 되어 친구들은 불안한 마음을 남기고 먼저 사이트를 떴다. 아놔, 하필 이런 날 트레일러를 안 가지고 오고 텐트 캠핑을 해서... 우리도 서둘러 음식을 다 챙겨 차 안 아이스 박스에 다시 넣고, 프라이팬에 기름도 스토브에 기름도 닦아서 치운다. 가능한 한 냄새가 사라지도록 에탄올로 기름기를 박박 닦아낸다. 어느 정도 테이블이 정리가 된 상태에서 갑자기 아내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우리 사이트로 곰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 이번에는 분량이 길어서 1, 2부로 나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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