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오카나간 캠핑 #3
'오카나간 Okanagan' 지역은 캐나다 BC주 남동부에 있는 지역으로 오카나간 강과 오카나간 호수를 품고 있다 (오카나간 강은 국경 건너 미국 워싱턴 주까지 흐르는데 그 동네 이름도 오카나간 카운티라고 합니다). '오카나간'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 원주민 언어로 '산꼭대기를 볼 수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Okanagan). BC주 서부에 비해 강우량이 적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호수까지 연결되는 경사지역의 토지는 뛰어난 배수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BC주 과일 농사 - 특히 포도농사에 매우 적합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캘로나에서부터 오카나간 호수를 따라 수많은 와이너리들이 형성되어 있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부터 오카나간 캠핑을 꿈꾸던 아내에게는 캠핑지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한다는 거창한 계획이 있었다. 영화 <사이드웨이>에 감화를 받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슈퍼 J인 아내로서는 올여름 오카나간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어느 와이너리에 가볼지 이미 결정이 끝난 상태였을 거다. 슬쩍 떠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 와이너리의 이름이 술술 나온다. 하지만 이번 캠핑은 폭염경보와 함께 할 예정. 그리고 물놀이 계획도 있었기에 절충을 해서 두 군데만 가기로 한다. '퀘일즈게이트 Quail's Gate'와 '프린드 Frind' 와이너리. 밴쿠버에서도 우리가 항상 즐겨 마시는 퀘일즈게이트를 캠핑 2일 차인 일요일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름 주말이니 손님도 많을 테고 또 그만큼 서비스도 많겠지, 하는 곰살맞은 기대와 함께. 그래도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사발면 하나를 꺼내 아침부터 흡입한다. 아내는 칼로리바 하나를 먹고.
전날 장시간을 운전했던 터라 이날은 아내가 운전하기로 했는데... 음.. 운전자에게 제때제때 길을 가르쳐 주는 일은 운전만큼 힘든 일이라는 걸 계속 까먹는다. 일단 와이너리가 열기 전까지 캘로나 호수공원에서 잠시 시간을 때우기로 한다. 캘로나에 오면 꼭 빠지지 않고 제일 먼저 찾는 곳으로 오카나간 호수 해변을 따라 길게 산책로를 만들어 두었다. 천천히 걷는 사람, 뛰는 사람, 바로 옆 숲에 자리를 펴고 눕는 사람, 이곳 시민들이 다양하게 계절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름 휴일이라서 마침 파머스 마켓과 바비큐 페스티벌을 하는 것 같은데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파머스 마켓에서 안주용 아몬드 작은 봉지를 사는데 10불이란다. 비싸다. 그 옆에 일찍부터 문을 연 민영 술가게에 가서 작은 위스키도 한 병 산다. 여기도 비싸다. 그래도 여행을 오면 이렇게 가격 생각 안 하고 헛 돈을 쓰는 것에 너그러워진다. 그러니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거겠지. 취미가 여행, 혹은 하고 싶은 일이 여행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무전여행 옵션을 제시했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뜻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이쯤이면 취미나 하고 싶은 일 항목에 같은 여행이라도 '무전여행'과 '쇼핑여행'을 구분해 두어야 정당한 것이 아닌가도 싶다.
캐나다에는 공병을 주워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보통 새벽에 행인들이 많이 없을 때부터 휴지통 (Trash Bin)을 뒤져 공병을 줍기 때문에 비너 (Binn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침 일찍부터 행색이 무척 추레하고 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생활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일반적인 밴쿠버 사람들도 보통 추레하고 냄새납니다). 술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맥주와 보드카를 계산대에 놓고 동전들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그러더니 가지고 있던 돈이 생각과 안 맞았는지 거듭 세더니, 결국 보드카는 빼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러고는 나머지 동전을 모두 계산대 직원에게 팁으로 주고 유유히 떠났다. 캐나다 땅에 온 지 20년이 넘어도 가끔 이런 걸 보면 여전히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공원 잔디밭에 어떤 젊은 아가씨가 갓난아기를 안고 아침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카트에 공병을 잔뜩 싣고 다니던 비너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와 아내는 그 광경을 보고 순간 긴장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더니 서로 깔깔깔 웃다가 손을 흔들고 헤어진다. 비너의 행색이 어떻든, 그에게 어떤 냄새가 나든지, 갓난아기에게 어떤 전염병을 줄지 걱정을 안 하는 것일까? 저 사람도, 코로나 때는 아시아인 근처에 가는 걸 무서워했을까? 모르겠다.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건 여전히 정답이 없다. 그래도 이런 몸에 배인 친절이 사람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없애는 건 맞는 것 같다. 친절이 세상을 바꾼다.
와인을 <시마부장>과 <신의 물방울>로 접했던 나로서는 처음 밴쿠버에 왔을 때 프랑스 와인을 제대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놀란 적이 있다. 그나마 몇몇 보였던 프랑스 와인들의 가격도 프랑스 현지는 물론 한국이나 일본과 비교하더라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쌌다. 20대를 보낸 90년대 한국에서는 와인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까 나의 와인 경험은 밴쿠버에서 만난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산 와인이 주로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 예전에 "왜 미국이 한국보다 영화를 잘 만드는가?"라는 질문과 비슷한 이유인데, 미국 영화가 제작비나 기술인력면에서 태생적으로 우수한 것도 있겠지만, 잘 만들어진 미국 영화만이 한국에 소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크다. 마찬가지로 캐나다 와인이 그렇게까지 품질이 놓고 시장 경쟁력이 높다면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수입이 많이 되었을 텐데, 캐나다 밖에서 캐나다 와인을 언급하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비록 비씨주 사람들은 오카나간 와인에 대해 무척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VQA라는 생산지 인증 시스템 (프랑스 와인의 AOC와 비슷)까지 있음에도, 왠지 캐나다 산 와인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2009년에 '미션힐 Mission Hill' 와이너리에서 시음해 보기 전까지는.
고풍스러운 수도원처럼 고딕양식의 콘크리트 건물이 드넓은 정원과 같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와이너리 자체도 멋이 있었지만 , 여행 분위기에 휩쓸려 평소에 마시는 것보다 조금 더 비싼 와인을 시음했던 것이 신의 한수였다. 다시 말해, 20불 안쪽의 테이블 와인의 경우 오카나간 와인은 뉴질랜드나 호주 와인과 비교했을 때 뭔가 아쉬웠지만, 흔히 리저브 Reserve급이라고 해서 여러 군데 밭에서 나는 포도를 섞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한 군데 혹은 몇 군데 지정된 밭에서 나온 포도만으로 양조한, 30불에서 100불 사이의 와인의 경우 경쟁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날 시음했었던 2006년 산 피노누와 리저브는 주영 주류매장에서 30불 안팎으로 팔고 있는 와인이었음에도 깊고 깊은 부케에 깜짝 놀랐어서, 그 후 한 동안 뭔가 기념하고 싶은 날이 올 때마다 우리 집 식탁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
미션힐이 비씨주 VQA 와인을 대표하는 대기업이라고 한다면, 퀘일즈게이트는 진한 팬덤을 가지고 있는 와이너리인데 어떤 걸 골라도 실망시키지 않는 수준을 가지고 있다. 테이블 와인이라고 하더라도 보통 20불이 넘는 가격으로 동급의 VQA 와인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그 안정적인 품질 때문에 어떤 친구는 오카나간에 갈 때마다 몇 박스씩 사서 집에 쟁여두기도 했다.
캘로나 호수공원을 잠시 들른 후 시간을 맞춰 '퀘일즈게이트 Quail's Gate' 와이너리에 갔더니 아내는 벌써 배고파하기 시작했다. 미션힐 와이너리에서는 시음을 할 때 치즈 한 조각이라도 줬었던 것 같은데 이곳에는 그런 게 얄짤없다. 주는 대로 꿀꺽꿀꺽 마시다가는 꽐라가 되기 십상이겠다. 퀘일즈게이트의 와인 시음은 일반 와인 시음인 에스테이트 테이스팅 (Estate Tasting)과 리저브급 와인 시음인 컬렉터 테이스팅 (Collector Tasting)으로 나뉘는데, 본인이 고른 4가지 와인을 마시는 가격이 각각 (2024년 기준) 15불과 25불이었다. 우린 둘이니까, 에스테이트 테이스팅과 컬렉터 테이스팅을 각각 골라 총 8잔의 와인을 아내와 나눠 마셨고, 뭐 역시, 리저브급 와인의 풍미가 탁월하다. 특히 스튜어트 패밀리 리저브 샤도네와 게부르츠트라이머는 상상을 뛰어넘는 와인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드라이하면서도 깔끔한 게부르츠트라이머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테이크 저녁을 위해 추천받은 블렌디드 레드인 '큐 Queue'는 무척이나 복잡한 부케와 입안에서 시간에 따라 변하는 맛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하지만 저녁에 고기와 먹었을 때는, 그 훌륭한 경험을 재현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허겁지겁 먹느라 ㅠㅠ). 흥이 나서 리저브급 샤도네와 '큐'를 한 병 샀는데... 아... 우리가 평소에 먹는 것보다 훨 비싼 와인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운전하기 전 알딸딸한 기운을 없애려고 와이너리에 있는 스낵코너에 들른다. 난 치킨 샌드위치를 얼른 집었고, 아내는 그곳 주방에서 일하던, 젠다이아를 닮은 직원의 추천을 받아 (왠지 몸에 좋은 것들만 모아놓은 것 같은) 파워보울을 하나 집었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먹을 것 추천은 절대로 빼빼 마른 사람한테 받는 것이 아니다.
캐나다에서는 일반적으로 각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주류매장에서만 술을 살 수가 있었는데, 각 주마다 여기에는 다양한 예외사항이 존재한다. 비씨 주의 경우에는 (보통 펍과 연결되어 있는) '콜드 비어 스토어'라는 이름의 민영 주류매장이 오랫동안 주류 소매 허가를 받아왔고, 그 외에도 지난 십여 년 동안 여러 가지 다른 민영 주류매장이 등장해 왔다. 주정부와 민간 자본이 합자한 '비씨리커 시그니처 스토어'도 많이 생겨서 이제는 제법 다양한 주류를 섭렵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인 커뮤니티인 우리 동네 비씨리커 시그니처 스토어에는 각종 한국술이 실시간으로 진열된다 (원소주, 화요도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미국계 자본 슈퍼마켓 체인인 '세이프 웨이'도 주류매장을 설립했다 (앨버타 주에는 코스트코나 '리얼 캐네디언 슈퍼 스토어'가 운영하는 주류매장도 있습니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슈퍼마켓 내부에 주류코너를 만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슈퍼마켓에 붙어 있는 별도 건물에서 운영하는 식이었는데, 아무래도 미성년자의 접근성을 떨어뜨리려는 정책일 것이다. 하지만 켈로나 시에 있는 '세이브온푸드' 슈퍼마켓에 가면 매장 내에서 VQA 와인을 파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가 있다. 게다가 슈퍼마켓답게 세일도 많이 한다. 오카나간 지역 와인 판매를 활성화한다는 명분으로 벌써 10년 가까이 된 것 같다. 닭고기와 알레르기 약과 와인을 같은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캐나다에서는 무척 낯선 일인 것이다.
금요일에 가 본 '프린드(Frind)' 와이너리는 와인 자체로는 아직 그렇게 명성을 쌓지는 못했지만 와이너리 자체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와이너리다. 그들에 의하면 북미에서 유일하게 해변을 가지고 있는 와이너리라고 한다. 그에 걸맞게 해변 앞에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선베드가 놓여 있고, 그 옆 잔디밭에서는 요가 수업을 하고 있다. 예전에 BC주 수상이었던 베넷 가족의 저택과 대지를, 온라인 데이팅 서비스 사이트 (POF.com)로 떼돈을 번 비씨 주 밴처사업가, 마커스 프린드가 구입하였고, 동시에 오카나간 다른 지역에 있는 포도농장들을 인수하면서 2020년에 창립된 새내기 와이너리인데. 창립자 프린드의 배경이 그래서인지 이곳 와인 양조 역시 컴퓨터로 엄격하게 관리된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되면 빈티지별 와인의 특성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좀 아쉽기도 하지만, 20불 미만의 테이블 와인에 균일한 품질을 기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도 같다.
마치 캐리비언 어느 해변의 리조트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와이너리를 천천히 구경하다가 10시쯤 되어 테이스팅 룸에 들어갔다. 15불, 35불 옵션이 있었던 퀘일즈게이트 와이너리와는 달리, 이곳은 $10로 균일한 가격에 5잔 테이스팅을 할 수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가성비는 퀘일즈게이트보다 좋았지만, 신생 와이너리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뭔가 놀라움을 주는 와인은 없었던 것 같다. 베리류 과일향이 많이 났던 샤도네는 밸런스가 깨진 느낌이었고, 리즐링 역시 새콤달콤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했다. 반면에 '더프리미어 (The Premier 주수상)'라는 이름의 블랜디드 레드는 상당히 풍부하고 복잡한 향과 맛을 보여줬다. 아니나 다를까 젤로 비싼 와인이었네.
퀘일즈게이트와 달리 이곳의 구독 서비스 멤버십은 배송이 무료라고 한다. 그리고 반년에 최소 6병만 구입하면 된다고 해서, 게다가 멤버십에 가입을 하면 시음을 공짜라고 해서, 아니 물론 그것보다 술김에 지른 게 더 크겠지만, 덜컥 가입을 했다 (나중에 비씨주 주영 주류매장에서 파는 가격이 이곳 와이너리에서 파는 가격보다 더 좋다는 걸 발견하고는 무척 슬퍼지기도 했습니다). 시음은 공짜였지만 선물용으로 와인을 두 병 사고 소믈리에께 팁까지 드려서, 영수증에 찍힌 금액을 보고 화들짝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애초에 계획했던 프린드 와이너리 명물 화덕구이 피자 구입은 패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장거리 운전을 대비해서 오는 길에 기름을 만땅 채우고 10리터짜리 기름통도 가득 채운다.
캠핑장으로 돌아오니 이날부터 캠프파이어 금지령이 내렸다고 한다. ㅎㅎㅎ 오늘 밤부터는 창문을 좀 열고 잘 수 있겠구나. 그렇게 더웠는데도 그동안 밤마다 모닥불 연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두지 못했었다. 뭐,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을 왔다면 장작도 좀 패고, 밤에 모닥불 피우고, '스모어' (S'more 비스킷과 초콜릿 위에 장작불로 갓 구운 매시멜로를 얹어서 먹는 북미 전통 캠핑 간식)도 함 만들고 하는 것이 필수 코스라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알고는 있지만.
낮기온이 또 오르면서 에어컨을 돌리고, 트레일러 안에 들어와 겸사겸사 와인도 한잔 하려고 하는데, 아까 사 온 과일향 나는 샤도네... 이건 뭐, 어떤 안주와도 궁합을 맺기 힘들다. 그래도 달달하니 맛나네. 조금 마신 후 낮잠을 청한다. 휴가가 뭐 별거냐. 편하게 쉬면 다 휴가지. 아내가 자는 동안 최근에 출간한 책의 출간기를 좀 더 쓰다가 6시쯤 되면서 저녁을 한다. 어제 먹은 김치찌개 나머지를 사용한 김치볶음밥. 여기에 소시지 남은 것과 피망, 양파 등 이것저것 넣다 보니 또 무척 많아진다. 그런데 어떻게 저 많은 게 다 뱃속으로 들어가냐고. 정말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