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오카나간 캠핑 #2
어쩌다가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었지만 사실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물론 누군가가 정량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다니긴 많이 다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 후, 여행보다 여행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고, 그보다 계획대로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 슈퍼 J 아내에게 끌려다닌 건 차치하고라도, 20대 싱글 때에도 수틀리면 종종 혼자 훌쩍 떠나곤 했었다. 하지만 그건 무슨 견문을 넓히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였다. 고속버스 옆자리에 앉은 근사한 여성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대한 적도 없지만,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소주를 까면서 싫다는 데도 굳이 오징어 다리를 건네주며 말을 시키는 아저씨와의 시간은 끔찍했었다.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 빙의되어 나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세상을 산다는 건 끈끈이주걱처럼 헤어나올래야 헤어나오기 힘든 인간관계에 적응하는 일이라는 것만 배웠었다.
그래서인가? 여행을 다니면 종종 아프다. 30년 가까이 살았던 한국 본가도 갈 때마다 아프다 (물론 과음이 원인 중 일부라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먼 곳으로 장기 캠핑을 갈 때는 운전하면서 두통을 종종 겪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두통약을 먹고 떠났습니다). 재작년 캠핑 때는 송충이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했고, 연초에 뉴욕에 갔을 때에도 독감으로 고생했었다. 심지어 예전에 포틀랜드에 갔을 때는 계단에 발을 찧어서 새끼발톱이 빠진 적도 있었다. 20여 년 전, 여생을 보낼 새 정착지를 찾기 위한 세계일주 여행의 첫 경유지는 밴쿠버였는데, 유스호스텔에서 그만 빈대가 달라붙어 영국에 갈 때까지 몇 주간 엄청 고생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쿠버로 정착했습니다). 그냥 여행이 팔자에 안 맞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물갈이 때문에 배탈이 난다고 먹고 마시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아프다고 여행을 포기하는 건 없었다. 과민성 대장 증상을 겪는 사람들끼리 동감하는 표현 중에 "각오하고 먹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소화가 안 되거나 알레르기 반응이 오더라도 일단 먹고 싶은 건 먹고 본다. 아프더라도 먹고, 아플 것 같아도 놀러 가고 본다. 그러다 보니 많은 캠핑 기록, 여행 기록에 아팠던 경험을 쓰게 되는데,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이건 여행기인지 투병기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낮기온 39도까지 올라갔던 이번 캠핑 기록도 예외는 아니다. 더위에 대한 대비는 꼼꼼하게 했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작년과 재작년에 그렇게 끌고 다니던 월마트표 22불짜리 보트가 마지막 캠핑에서 장렬하게 사망하여 대안을 모색하던 중, 11월경 코스트코에서 원래 400불에 팔던 카약을 180불에 떙처리를 하는 걸 발견했다. 매장에 전시해 뒀을 때부터 재질도 보트들보다 튼튼해 보이고 마감도 꼼꼼해서 눈여겨봐 뒀던 모델이었다. 인기가 많을 걸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재고가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인플레이터블 (Inflatable 바람을 불어넣어 사용하는) 카약이다 보니까 막상 앉아보니 엉덩이가 꽉 낀다. 덩치 큰 사람들은 좀 불편하겠다 싶다. 그리고 나중에 카약을 청소하고 말리면서 안 사실인데, 외부 충격에서 튜브를 보호하기 위해 나일론 헝겊으로 덧대둔 것까지는 좋았지만 튜브와 헝겊 사이에 들어간 물기는 도무지 꼼꼼하게 닦아내기 힘들었다. 저대로 뒀다간 곰팡이가 생길지도 모를 일인데... 관리의 난이도 때문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3일 차는 물놀이 날. 아침부터 카약을 끌고 호수로 나가 뱃놀이를 즐겼다. 육지는 벌써 더워졌지만 물 위에서는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햇볕과 공기 속 열기가 호수 수면의 냉기와 열교환이 이루어져서 그런 거겠지. 2시간 정도 탔나? 잠시 몸을 식힌 후에는 다시 호수로 나가 아내가 튜브를 타고 노는 동안 스노클링을 시도해 봤다. 작년에도 느꼈던 거지만 호숫물 속에서 스노클링 하는 건 별로 상쾌한 일은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물속 시야가 너무 안 좋고 부유물들도 많아서, 이게 잘못하면 입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밖에서 봤을 때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막상 안으로 뛰어들어가면 지저분한 현실이 보이는 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리발을 착용한 채 수영 도중 똑바로 서는 건 무척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려고 다리를 내리고 더듬더듬 걸을라치면 계속 앞으로 몸이 나가는 바람에 설 수가 없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니 뒤쪽으로 걷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여야 다리를 완전히 지면에 내릴 수가 있다고 한다.
시간이 좀 지나 4시가 가까이 되자 속이 좀 헛헛해서 저녁을 준비한다. 전날 굽고 남은 채끝 등심을 넣은 짜파구리. 짜파게티 2개와 볶음너구리 1개를 고기와 넣어서 볶는다. 이 정도 양이면 분명히 남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싹싹 다 비워버렸다. 캐나다 처음 왔을 때는 푸드코트에서 중국요리 콤보 한 접시를 시켜 둘이서 나눠 먹고도 배가 불렀는데 나이가 들면서 왜 먹는 양은 점점 더 느는 건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많이 먹는 건지 모르겠다. 연초에 뉴욕 갔다 오고 나서도 급증한 몸무게 때문에 발목이 아파 고생했는데, 이제 휴가를 마치고 또 일터로 돌아가면 여기저기 아플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휴가를 와서도 운동을 하기엔... 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캠핑장을 몇 바퀴 씩 돌면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어쩌면 이제 그런 게 필요한 나이가 되어버린 걸지도. 휴가지에서 때려 먹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는.
그러고 나서 잠시 후 온라인으로 출간 회의를 잠시 했는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몸이 슬슬 가렵기 시작해서 회의 내내 계속 북북 긁는 모습을 보이며 화상회의에 참가해야 했다. 회의를 마치고 보니까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아있었다. 녹조류 때문에 알레르기가 생긴 건지, 더위 때문에 땀띠가 돋은 건지, 아니면 볶음 너구리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벌레에게 물린 건 줄 알았는데, 양쪽 대칭적으로 두드러기가 돋고, 몸 중에 접힌 곳에 특히 - 심지어 손가락 사이에도 두드러기가 돋아 있었다. 샤워를 한번 더 했지만 나을 기미가 안 보인다. 이 날은 더 이상의 음주는 무리다 싶어서 일찍 잠을 청했지만, 밤새 가려워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모든 접힌 부분, 어딘가에 닿는 부분은 다 가려웠다. 심지어 발목과 손가락 사이까지.
다음 날 새벽 4시가 되면서 더 이상 자는 걸 포기하고 유튜브 용 일출을 찍으러 나섰다. 하지만, 날이 점점 밝아지면서 매뉴얼로 설정한 세팅들에서는 과다노출이 되어버린다. 내일 다시 자동으로 놓고 찍어야지. 새벽부터 수영을 나갔다가 해변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거위들이 나를 보더니 승질을 냈다. 아내가 타온 커피를 마시다가 결국 촬영을 접고, 아침에 화장실을 3번 정도 가서 속을 다 비우고 나니 가려움증이 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식중독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걸까?. 못된 볶음 너구리. 혹시나 해서 '농심 볶음 너구리 알레르기'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한국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판매가 중단되었다고만 나오고, 수많은 볶음 너구리 팬들이 그걸 아쉬워하는 간증만 남아있었다.
5일 차, 새벽부터 일어나 일출을 두 시간 정도 촬영하는 도중, 에구머니나, 무슨 악어 같은 것이 호수에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휴대폰을 꺼내 촬영을 할 것인가 0.5초 정도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먼저 꺼냈다. 알고 보니 비버였다. 양손으로 풀을 열심히 뜯어먹는 것이 꼭 수달 같았지만, 그러기엔 귀도 잘 보이고 얼굴도 수달에 비해 좀 긴 편.
이날도 아침부터 카약을 타러 나섰는데 이상 고온으로 호수에 녹조류가 무성하게 자랐으니 조심하라고 한다 (Blue-Green Algae Alert). 조심하라고? 수영하는 사람들 미끄러질까 봐 그런가? 녹조류가 피부 알레르기도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조금 나중 일이었다. 한 시간 정도 뱃놀이를 유유하게 즐기고 돌아오니 아직 아침 9시. 호숫가는 여전히 한가하다. 오늘은 이 호숫가에서 나무 그늘을 찾아 한번 뭉게 볼 생각이다. 카약을 해변에 묶어두고 사이트로 돌아가 돗자리와 모기장 텐트를 가져온다. 글 쓰고 노래 듣고 사람들 구경하는 동안 아내는 종종 호수로 나가 튜브에 몸을 싣었다. 어느덧 지면에 열기가 차오르자 인플레이팅 카약이 무척 빵빵해지는 바람에 종종 바람을 빼줘야 했다. 12시쯤 되어 조금 출출해지자 간식 아이디어를 냈는데, 해변에 앉아 물멍을 하면서 먹는 사발면의 맛은 또 각별했다. 그리고 솔로 카약킹을 시작한다. 돗자리와 책을 해변에 덩그러니 남겨두고 둘 다 나가서 물놀이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캠핑장에는 사소한 절도 사건이 없다고는 하지만 한국이 아닌 다음에야 소지품을 방치하고 다닐 수는 없다. 예전에 둘이서 2인용 카약을 타다가 하도 손발이 안 맞는데 질려서 각자 솔로 카약을 해야겠다고 합의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나 배를 나만의 의지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다시 돌아와 돗자리에 누우니 여기저기 또 피부에 뭔가가 돋기 시작한다. 아... 정말 뭔지 알 수가 없다. 엊그제처럼 더위도 있고, 조미료도 잔뜩 먹었고, 뱃놀이를 하느라 호수물에 적잖이 몸이 젖었기에 뭐가 원인인지 특정할 수 없다. 3가지 콤비네이션인가? 결국 나는 먼저 트레일러로 돌아갔는데, 찬물 샤워를 해도 두드러기가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한다. 보습로션과 버물리를 잔뜩 바른 후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긴다. 엊그제 밤에 고생했던 걸 기억하면서 이날은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아예 알레르기 약을 먹었다. '클라리틴 (Claritin)'. 상자에는 '졸리게 하지 않는 (Non-drowsy)'라고 쓰여있지만 어릴 적부터 판콜에이만 먹으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던 - 항히스타민에 과민반응하는 몸뚱이를 가진 터라 복용 후 30분도 안 되어서 졸리기 시작한다. 걱정순이 아내와 같이 살면서 전염된 습관 중 하나는 약을 복용할 때마다 설명서에 있는 부작용을 읽게 된다는 건데, 클라리틴의 부작용에는 가려움증이 있었다. 네? 뭐라 굽쇼? 가려워서 먹는 약의 부작용이 가려움증이라 굽쇼? 이건 무슨 <주성치의 북경 007>에 나온 햇빛이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태양열 플래시 라이트 같은 소리냐. 아놔. 에라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해라.
그리고 이 피부 발진은 6일 차 저녁이나 되어서야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즈음엔 이미 폭염주의보가 해제되고 저녁에는 밖에 나와 앉아있을 수 있을 정도로 선선해졌기 때문에, 그리고 녹조류 경보도 해제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원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기분이 좋아서 다시 호수로 나가 본다. 카약을 들고. 저 멀리 산등성이 위에 해가 걸려있다가 금세 저문다. 데워진 호숫물의 온기와 기분 좋게 서늘한 바람이 섞여서 카약을 가른다. 호수 표면은 벌써 검푸르게 어두워진 물색깔 위로 아직 밝은 톤이 남아있는 하늘을 반사한 물결이 흔들린다. 해질 무렵 뱃놀이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아쉽게도 카약은 오늘까지만 타고 내일은 하루종일 말릴 예정이다 (이때까지는 이 방법이 먹혀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한 시간 좀 넘게 카약을 즐기다가 돌아와서 간만에 야간 음주를 한다. 광역 밴쿠버 캠핑에서는 밤에 밖에서 술 마시는 재미가 캠핑의 백미였었는데, 여기서도 더위가 한 풀 꺾이니 밤바람을 맞으며 밖에 나와 앉아 있을 수도 있다. 가려움증도 훨씬 덜해졌다. 밤공기에 약간 온기가 남아있는 것이 한국의 시골 여름밤 같다. 어릴 적 방학 때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술을 마시던 와중에 옆 사이트 트럭 위로 수리부엉이가 날아와 앉는 걸 보게 되었다. 신기하다. 야생 부엉이는 난생처음이다.
2024년 8월 23일 추가 : 올 한해 기후변화로 인해서 오카나간 호수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많은 호수에서도 녹조류 경보가 내렸습니다. 녹조류에 있는시아노 박테리아라는 세균 때문에 피부질환이 발생할 수 있고, 복통, 두통, 설사도 유발할 수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몇몇 지역 보건당국에서는 아예 수영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카나간 뉴스
에드먼튼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