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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곤잘레스 파파 Aug 01. 2021

고생은 사서도 한다더라 (한라산 등반기1)

2021년 5월 2일 (일) / 20일 차

202152, 일요일 (20일 차)  내 생애 첫 정상(!)


강정 아파트 관음사 탐방로 백록담 성판악 탐방로

구두미 연탄구이 (★★★) 강정 아파트


등반루트 (관음사 탐방로 IN > 성판악 탐방로 OUT)


 아침 8시 출발. 저녁 6시 하산.   

 관음사 성판악 (19km 코스)

 만성 운동 부족인 비루한 몸을 이끌고

 무리하게 밟은 코스였다.

 그래도 못 오를 것 같았던

 정상에 오르고 백록담을 보았노라!


 오르는 내내 구름이 잔뜩 껴서

 먼저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 등반객들이

 동네 뒷산 보고 오는 느낌이라길래

 나도 못 보면 어떡하나 오르는 내내 전전긍긍했다.  

 조금이라도 맑은 하늘이 보이면

 무리해서라도 아픈 무릎을 꾹꾹 눌러가며

 더 열심히 올랐다.


 관음사 코스는 말 그대로 계단 지옥이었다.



 09:17, 탐라계곡

 8시에 관음사 탐방로 입구에서 출발해

 3km를 내리 걸었다.

 이곳까지는 급경사도 없고

 동네 뒷산을 산책할 정도의 난이도였다.


 문제는 탐라계곡부터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계단 길은

 끝이 보이질 않는다.

 난이도도 빨간색 상급자용 코스로

 삼각봉 대피소까지 3km 정도 이어졌다.


 탐방로는 생각보다 좁아

 한두 명만 그 루트를 따라 걸을 수 있다. 

 게다가 관음사 코스는 하루에

 500명만 출입할 수 있다.

 성판악 코스가 1,000명인데 비해

 이곳은 등반객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한라산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겠지.

 

 오르는 길에 다양한 등반객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젊은 친구들은 가벼운 짐가방에 발걸음도 가볍다.

 중년의 빨간모자 아주머니는

 묵직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오르지만 쉬어가질 않는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오르는데도 

 한참 지나면 어느새 나보다 훨씬 앞서 계신다.

 산 타는 연륜이 대단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재촉하며 채찍질하고 밀어 올린다.

 

 나홀로 등산을 하면 좋은 건

 그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

 누구의 손을 잡아주지 않아도 되고,

 내 페이스에 맞게 적당히 오르다가,

 힘에 부치면 중간에 내려와도 되기 때문이다.



 아득한 산세에 현무암 동굴들이

 산 중턱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 옛날 일제 강점기 때,

 또 4·3 사건 때 다들

 이 깊은 산속 동굴들에 숨었겠지.

 영화 <지슬>을 보면 학살을 피해

 ‘큰 넓궤동굴에서 숨어 지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얼마나 두려웠을까.

 지금도 얼마나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제주 곳곳에 숨겨진 동굴들을 보면

 4.3에 대한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 같아 슬퍼진다.

 

 10:30, 개미등

 상급자 코스의 중간 지점이다.

 역시 가파른 오르막이 끝이 없다.

 숨이 차 10분마다 쉬어가며 천천히 올랐다.

 무리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이 페이스대로면

 정상까지는 제시간에 무난하게 닿을 듯하다. 

 꽤 힘들지만, 좋은 공기 마시니

 숨도 덜 가쁘고 몸도 건강해진 기분이다.



 11:13, 삼각봉 대피소

 구름이 가득 낀 날씨라 오르는 길에

 멋지다는 산세를 거의 못 만났다.  

 난이도 높다는 관음사 등반길을 경치를 보려고

 일부러 선택한 고생인데 아쉬움이 들 찰나

 삼각봉이 구름 사이로 비범한 장관을 드러낸다.

 구름에 가려진 삼각봉은 비밀스럽고도 웅장했다.

 이곳이 백록담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13:00 이후 이 문은 통제된다.


 

삼각봉 대피소


 대피소는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쉼터다.

 산장같이 생긴 쉼터 안은 찬 공기를 피하기에 적당했고,

 5월 초임에도 정상 부근은

 아직 눈이 녹지 않은 겨울 공기라 온몸이 시렸다.

 대피소 안은 추위를 피해 쉬는 등반객으로 가득했고,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했다.

 나도 탐방로 입구에 있는 매점에서 사 온 김밥과

 에너지바로 허기를 때웠다.

 추위에 몸 좀 녹일 수 있는

 따뜻한 라면 국물, 커피 한 잔이 아쉬웠다.


 

오월의 한라산 <1,800m 왕관릉> 정상으로 가는 길목


 12:53, 한라산 백록담 정상

 구름이 가득 끼고 세찬 바람에

 백록담 인근은 정상 표지가 없었으면

 여기가 정상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모여 인증사진을 찍는 정상이랄까.


 세상이 온통 안갯속이라

 구름 속 산책은 몽환적이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쉼 없는 오르막이었다.

 끊임없는 계단과 세찬 5월 한파로

 등반스틱을 쥔 손이 꽁꽁 얼어버렸다.

 몸도 지쳤는데 추위까지 엄습하니 난이도 최강이다.

 겨울산행은 정말 체력이 좋은 사람만 가능한 거였구나!  

 

 구름 속 설산이라 관음사 코스의 멋진 비경은

  오르는 내내 잠깐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그렇게 추위를 견뎌가며 어디가 정상일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갑자기 파란 하늘이 슬금슬금

 고개를 드민다.

 

 구름이 비껴간 자리에 살짝 얼굴을 비추는

 부끄럼 많은 파란 하늘에

 어쩌면 정상을 볼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르다 보면 어느새 인적이 많아지는 곳.

 그곳이 정상이었다.


2021. 5. 2(일) 12:53, 한라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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