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 초창기 원형인 70년대 생인 난, 시조에 걸맞게 잔소리에 치를 떨고 간섭에 소름이 돋는다. 나 자신도 내 입에서 나오는 잔소리는 철저히 간섭으로 분류하고 간섭의 단어들에 경고를 물린다.
잔소리와 간섭을 매우 싫어한다.
호불호가 확실하다.
사회적 문화에 길들여질 만도 한 유교의 인의예지신의 잔여물 속에서 성장했지만 난 그 모든 것을 서서히 거부하며 성장했다.
오죽하면 “왜요?”를 달고 사는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 왜는 일본 요다.” 하시며 잠자리에 까는 일본 요로 일축하셨다.
그렇게 성장한 나는 90년생을 둘이나 낳고 ⌜90년생이 온다⌟는 임홍택 작가의 주인공 세대를 키우며 내가 겪었던 성장의 억압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부모로서 자연스럽다 여기는 통념의 간섭을 조심스러워하고 권유가 경고가 되지 않도록 심사숙고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란 흔한 말은 식상함에 비하면 가치가 매우 크다.
어릴 때 하던 욕구들은 원초적인 선택들이고 아이가 하는 선택들을 부모나 어른들이 쉽게 안전과 유용, 편리의 용도로 적절히 걸러준다. 좀 지나친 어른들은 아이들의 선택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을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선택은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의사결정이며 책임의 선험이다.
또한, ‘선택이란 상황’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해 보는 것이 자신을 사용하는 기술의 개발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과 세상인 외부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선택이다.
그런데 그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어른들은 어른이라고 부모는 부모라고 친구는 나름 찐 친구라고 이래라 저래라ㅡ 간섭이 ㅡ이만저만이 아니다.
권유 또한 뒤끝이 길면 강요가 된다. 권유인 척 위장하는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가스라이팅의 경계에 서기도 한다.
이런 절묘한 형태들을 가지치기할 수 있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의 방식을 독립적으로 잘할 줄 알아야 한다. 동전의 양면의 중접이다.
선택은 나의 인생의 경로와 같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았는가가 그 흔적을 남기고, 수정을 하려할 때도 선택에 의해 나타난다. 그런 선택의 기술을 누군가의 간섭과 권유에 길들여진다면.
난, 나를 어찌 유용하게 활용하겠는가.
나를 어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최고의 설명서는 해리포터의 발자국 지도처럼 내가 선택하며 나아가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