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보니 '쓰기라는 행위'는 매우 주관적이며 지극히 독단적인 장르라는 생각이다. 나의 생각을 기록하고 '생각의 생각'이 집을 지어 건축물이 완성된다.
그러니 누구의 손길도 미칠리없다.
내가 선택한 단어들, 내가 이어붙인 문장들,
그리고 맞침표를 찍어 마침내 정리해낸 나의 마음들.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앨리스는 집안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집안의 모습이 야릇하게 이상함을 느끼고는 서서히 다가가 거울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거울 속의 모험은 모든 것이 현실과 반대로 오른쪽이 왼쪽이고 맞는 것은 틀린 것이며 오르는 것이 내려가는 것이다.
나의 쓰기는 현실에서 출발해 나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앨리스다. 현실의 내가 글을 쓰게 만들고 그 '쓰기의 모험'은 현실의 아이덴티티를 벗은 갓난아기의 원형을 만나게 된다.
1편이라 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추락을 경험한다. 느리게도 빠르게도 추락해 도달한 곳에서 작아지고 커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혼란을 겪은 후 열쇠를 획득한다. 열쇠를 얻어 다음으로 이동하기 전 앨리스는'내가 누구인가!'자신을 자신이라 말할 수 없음을 토로한다. 이 장면에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나는 '앨리스가 자신을 버리고 시작해야 할 모험이다'라는 암시라고 생각한다.
'나를 나'라고 박박 우기며 말을 하고 글을 쓰고 모험을 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겠는가.
내가 즐기는 쓰기도 계속 내 안으로의 추락을 경험하고 그 곳에서 비틀고 늘리고 조이고 별의별 무드질을 하는 것이다. 앨리스처럼 '내가 누구인가'의 현실적 자극에서 출발해 갖난아기의 원형을 만나는 것으로 끝나는 글쓰기 행위는 삶의 모험이며 살아가면서 만나는 다양한 불협화음에 마음과 정신의 회복을 위한 치유와 성장의 행위이다.
이런 쓰기와 꼭 함께 해야 할 것이 읽기다.
읽기도 나를 버리고 출발해야하는 공통점이 있다. 작가가 쓴 글은 작가의 주관으로 선택된 단어이며 문장이다. 그런 글들을 오해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읽기이기에 나의 독단적 언어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독이 일어나고 독자 개인의 단어로 오해가 쌓이게 된다. 그런 상황이 계속 되는 읽기는 분명 문제가 된다. 나를 우물 밖으로 꺼내기는 커녕 심해로 잠수함을 타는 격이다.
좋아하는 장르만 읽지 않는다. 어린이 책부터 심오한 철학책까지, 또는 소설부터 역사, 사회, 과학 도서까지 연관성 없는 장르를 넘나든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책들이 결코 단절된 장르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책이든 그 작가의 생각을 순수하게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그 후 나의 현타(현실 타격)를 만끽해야 한다. +극,-극이 만나 자기장을 만들 듯 작가의 단어와 나의 단어가 만나 자기장을 만들어야 나의 새로운 장이 형성되고 나이값으로 사는 내가 아니라 새로운 나의 등장으로 신물질로 살게 된다. 어제가 오늘과 다르고 오늘이 내일과 다를 것이므로 내가 늘 고여있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나를 쓰고 타인을 읽고 그 타인과 나를 혼합하여 신물질을 만들며 새로운 시간을 앨리스가 맞닿은 거울의 경계와 같이 나의 내면과 현실을 오갈 줄 알아야 내가 중년으로 사는 것이 맛있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