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마지막 5단 짚단 앞에서 대통령은 검집을 허리에서 풀어 앞에 세우더니 그대로 검을 집어넣는다. 나는 저런 식의 납도술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것은 무사의 납도가 아니라 전쟁을 끝낸 장군에게나 어울리는 동작이다.
전쟁이 끝나면 장군은 연설을 한다. 승리했다면 마지막 함성을 위해, 패배했다면 실의에 빠진 패잔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통령도 마이크를 든다.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서 짚단 다섯 개는 무립니다. 이십 년 전에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멋지게 성공했을 텐데 아쉽습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아직 젊습니다. 하지만, 늙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 나라도 저처럼, 할 수 있던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반드시 지금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정부가 당면한 과제 앞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대통령이 말한다. 관중이 함성을 지른다. 경기장을 돔 형태로 짓는 이유 중에는 함성을 증폭시키기 위한 측면도 있다. 귀가 아니라 온몸으로 진동이 전해진다.
나는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짚단 베기를 할 수 있도록 검술을 가르쳤는데, 대통령은 짚단을 베지 않으려고 검술을 배운 셈이었다.
-선생. 기분이 상하셨나요?
청와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대통령이 그렇게 물었다.
-별로요. 다만, 그건 검술이라기보다는 정치 같던데요.
내가 말했다.
-저는 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제가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대통령이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악수는 서로 빈손을 내밀어 무기가 없음을 확인하는 행위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한 달 정도 더 근무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바로 짐을 챙겨서 청와대를 나왔다. 마지막 월급과 수당을 수령하면서 3개월 동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나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도장을 다시 열 생각이었다. 어쩌면 내 뒤를 이어 멸종을 지연시켜줄 제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 총을 겨눴던 경호원이 문 앞까지 나를 배웅했다. 뭔가를 지키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파괴하는 사람을 동경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게 청첩장을 줬다.
아내 없이 도장을 운영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나름 복안이 있었다. 청와대에 있으면서 나도 배운 것들이 많았다.
전단지를 뿌렸다. 유럽 순방 때와 검도왕전 때,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전단지에 넣었다. 매일 수십 명의 입문희망자들이 도장을 방문했다. 몇 명은 검도왕전 때 관객으로 있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중학생과 고등학생이었고, 중년의 남성과 여성들도 열에 한 둘씩 있었다. 나는 우선 연령별로 오전과 오후, 평일반과 주말 반으로 수업을 분류했다.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 협회장 영감에게 전화를 걸어 사범으로 일할 사람을 두 명만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검도왕전 때 마주쳐서 잠시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십 년 만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부탁을 하려니 조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협회장 영감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말 하지 않았다. 우리는 원래 그런 사이였다. 며칠 후에 대학교 검도부 졸업생 두 명이 찾아왔다. 둘 다 체격이 좋고 기초가 튼튼해서 바로 채용했다.
몇 달 정도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도장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도장 용품과 재무를 관리할 직원을 한 명 더 뽑았고, 주말 반을 맡을 사범도 따로 구했다. 내가 없어도 도장은 잘 운영되었다. 아직 제자로 키울만한 재목은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가끔씩만 직접 수업을 하고 남은 시간은 온전히 내 수련에 쓸 수 있었다.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카피가 아닌 진짜 명품 가방을 마음껏 사줄 수 있을 정도로 통장 잔고가 계속 늘어났다.
-나쁘지 않아.
협회장 영감은 내 ‘단칼에 베기’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사부도 그랬고, 옛날 어른들은 칭찬에 인색하다. 한 번 더 해보라고 해서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너와 같은 길을 가는 상대를 만나면 동귀어진하기 딱 좋은 기술이구나.
협회장 영감이 말했다. 조언인지 질책인지 모를 말이었다. 대충 의미는 알아들었다. 상대를 죽이고 나도 죽으면, 그것은 무승부가 아니다. 둘 다 패배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결과가 동귀어진이라 해도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을 만나면 기쁠 것 같다.
대통령을 가르친 뒤로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술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아내가 주선해 놓은 시합이 기대된다. 개인적으로는 검선의 제자라는 백동수와 겨뤄보고 싶다.
여보. 듣고 있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