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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12. 2024

수선화도 꽃 피려고 고개 숙인다.

Seven Daffodils _ The Brothers Four



네가 오면 봄.


올 겨울은 별로 겨울답지 않았다. - 아니 어쩌면 가장 밴쿠버의 겨울다웠는데 지난 몇 년 동안 꽤 춥고 눈도 많이 오는 겨울을 지내면서 어느새 익숙해져서 이렇게 말하고 있네.- 그러더니 삼월 들어 기온이 뚝 떨어지고 눈이 얇게 쌓이는 날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눈에 신난 헌터는 이른 아침, 눈 쌓인 잔디밭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몇 번 따라가다 금세 숨이 차올라 멈춘다. 그대로 가만히 서서 아침해를 숨긴 은회색 풍경속으로 잠긴다. 들숨마다 청량하던 공기도 잠시, 코끝, 손끝, 발끝, 끝이란 끝은 다 시려서 거의 잊었던 '꽃샘추위'란 말을 기억해내고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수선화는 아직 꽃 없이 단단하고 곧은 잎만 조용히 밀어 올리는 중이지만. 한 해의 첫 꽃인 '스노우 드랍'과 '크로커스'는 편애해서 헤퍼지는 내 감탄만큼 흔하게 산책길 여기저기에 주저 앉아있다. 꽃이 피면 곧 봄이라는 등식에 동의하지 않는 꽃들이다. 겨울과 봄의 보더라인을 지키면서도 겨울로 살짝 기울어 있다.


이제 곧 수선화가 피고, 나도 모르게 '황금빛 수선화 일곱 송이를.. ' 흥얼거리면 비로소 봄이다. 사실 수선화는 그리 좋아하는 꽃은 아니다. 그래선지 이 노래도 가사를 몰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소절만큼은 마치 봄이 되면 수선화가 피듯 매년 내게 돌아온다. 처음으로 노래를 찾아 제대로 가사를 짚어보고, 낡은 글창고에서 예전의 글과 사진도 발굴한다. 아직 수선화는 못 만났지만 이만하면 이젠 봄이다.





# '봄'은 명사가 아니다. (20110221)


수퍼마켓에 가면 일 년 내내 진열되어 있는 채소나 과일의 종류가 거의 비슷하다.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든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제 계절에 더 맛있고 풍성하게 나는 과일은 있지만 이젠 제 철이 아니라고 해서 아예 구경도 못하는 세상은 아니다. 그러니 수퍼마켓에서 계절을, 특히 봄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한국처럼 흔하게 나는 산나물, 들나물이 야무지게 먹거리가 되는 곳도 아니니 봄이 왔다는 신호는, 입구에 진열해 놓은 구근류 봄꽃에서부터 시작된다.

겨울 동안 실내에는 늘 화사한 꽃다발이 가득해서 가끔은 아무런 구실도 없이 꽃을 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쩐지 겨울잠을 자는 공주 같아서 망설이다 그만둘 때가 더 많다. 하지만 겨울 지나고 이렇게 바깥에 진열된 수선화나 튤립 모종을 보면 비로소, 모든 '꽃'을 볼 때의 온순해지는 마음과는 조금 다른, 스타카토처럼 튀어 오르는 신선한 감탄이 앞선다.


아! 이제 봄이구나


아랫동네의 빵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차창밖으로 수퍼마켓 앞에 진열해 둔 수선화가 눈에 띄었다. 아직 피지 못한 정원이나 들판의 봄꽃들이 미리 보낸 초대장 같은 노란 수선화가 발랄한 빛깔로 '봄!'이라며 인사를 하길래, 나도 '봄!'이라고 화답한다.


'봄'은 명사가 아니라 감탄사다.



           


# 수선화도 꽃 피려고 고개 숙인다. (20140408)


동부 쪽의 혹한에 비하면 겨울이라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꽤 추워서 겨울이 길다.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체감온도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면 새순을 올리고 꽃 피우는 게 봄꽃이다. 가장 거친 계절을 지나온 뿌리가 내놓는 새싹들은 어지간한 날씨의 변덕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젠 봄인가 싶었는데 진눈깨비가 날리고 비바람이 몰려와서 큰 나무의 잔가지들이 부러질 정도였는데도 꽃대가 휘면서 바닥으로 엎어졌던 수선화들은 반나절 순한 햇살에 다시 일어나 빛을 모은다. 그렇게 열리는 꽃잎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게도 상처 한 줄 없다.


재작년 여름,

내가 보기엔 말짱하다 못해 너무 예쁜 정원인데 그걸 다 엎어버리는 정원공사를 하는 이웃이 여름 감자처럼 줄줄 딸려 나오는 자잘한 알뿌리들을 모두 버린다길래, 몽땅 얻어다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늦가을에 뒷마당의 가문비나무 곁, 외진 빈 땅에 심었다. 다음 해 봄, 부추처럼 빼꼭하게 맨 먼저 올라오던 어린싹들은 보랏빛 무스카리 군락을 이루고, 꽤 많은 수선화도 제법 우아하게 자리를 잡았다.


버려진 알뿌리들을 주워다 심고

길고 긴 겨울 우기 동안 잊고 있다가 문득,

새순을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이란

아무리 되풀이해도 식상하지 않다.



봄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새삼스러워진다. 특히 뒷마당의 수선화는 자라는 모습을 마치 리알리티 쇼처럼 보여주었다. 나는 날마다 부엌창으로 내려다보면서 밥을 하거나 차를 마셨다. 그리곤 새삼 알게 되었다. 한 번 심어두면 언제 심었는지 잊어버릴 만큼 오랫동안, 해마다 '어느 날 갑자기' 피어나 봄결을 불러오는 수선화도 결코 쉽게, 짧은 시간 안에 피는 것이 아님을.


가끔 뒷마당에 다녀가는 작은 짐승들이 파헤치는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굴러다니던 알뿌리가 땅에 닿은 미세한 잔뿌리 몇 올만으로도 새 순을 피우는 강한 생명력에 대한 예찬은 잠시 덮어두자.


졸지에 살던 땅을 떠나 낯설고 구석진 좁은 땅에 묻혔던 알뿌리에서 파릇한 새순이 돋고 꽃대가 쑤욱 자라 올랐다. 그리고 꼿꼿하게 고개 들며 꽃망울을 품기 시작했다. 연한 연둣빛 껍질에 싸여 노르스름하게 말려있는 꽃잎을 볼 때마다 설렜다. 거만해 보일 정도로 곧고 싱그런 자태였다. 자, 이제 그만 뻐기고 꽃잎을 열라고!


하지만 꽃은, 대답하지 않고 여전히 입을 꼭 다문채 오히려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마치 시드는 것처럼. 혹은 체념한 것처럼. 그러다 어느 아침 주방에서 물을 끓이다 나는 보았네, 활짝 핀 꽃을.

갑자기 찾아온 귀한 손님을 맞듯 잰걸음으로 뒷마당으로 나갔다. 꽃 앞에서 나는 새삼스레 아득했다.


그랬었나?

그랬구나.

그렇구나


수선화도 꽃 피려고 고개 숙이는구나.


세상의 모든 어여쁜 것들,

다 저렇게 참고 기다리다 피었겠구나.

상처 투성이 기억이 서럽다고

고개 숙이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고

일부러 등 돌리거나

고개 든 채 뒷걸음질 치던 내가

많이 하찮았다.

아무리 고개 숙여도 꽃도 되지 못할 하찮음을

하찮음인 줄도 모르고

정말 하찮게 살았구나.


올해도 수선화는 꽃 피려고 고개 숙인다.





가사 해석


I may not have a mansion, I haven't any land

Not even a paper dollar to crinkle in my hand

But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나는 땅도 저택도 없고

구겨진 지폐 한 장도 없는 빈손이에요.

하지만 나는 수천 개의 언덕을 지나온

아름다운 아침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리고 키스와 함께 일곱 송이의 수선화도 드릴게요.


I do not have a fortune

to buy you pretty things

But I can weave you moonbeams

for necklaces and rings

And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나는 당신에게 예쁜 것을 사줄 재산도 없어요.

하지만 달빛으로 목걸이와 반지를 엮어줄 수 있어요.

그리고 수천 개의 언덕을 지나온

아름다운 아침을 보여주면서

키스와 함께 일곱 송이의 수선화도 드릴게요.


Oh, seven golden daffodils

all shining in the sun

To light our way to evening

when our day is done

And I will give music and a crust of bread

And a pillow of piney boughs

to rest your head


오, 황금빛 일곱 송이 수선화가 햇볕 아래 반짝이며

우리의 하루를 밝혀주고 있어요.

날이 저물고 저녁이 되면

나는 당신을 위해 음악과 소박한 빵을 준비하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소나무 가지를 베고 누워 쉬게 해 줄게요.


A pillow of piney boughs to rest your head

당신을 쉴 수 있게 해 줄게요.





Music Video _ seven daffodils _ The brothers four


Lee Hays 작곡, Fran Moseley 작사로 처음으로 발표된 게 1960년이니까 무척 오래된 노래입니다. 헨리 소로우 풍(?)이라고 해야 하나..ㅎ 충만한 사랑과 그걸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같은 멘트도 서슴치 않습니다. 진심이니까요. 가진 건 없지만 뭐든 다 주고싶습니다. 그래서 햇살도 달빛도 아침까지도 내것인양 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주겠다는 수선화 일곱 송이' 덕분에 마음뿐이던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현실이 됩니다. 수선화는 앞날에 대한 희망과 행운을 의미하니까요. 언약은 이렇게 하는거죠.^^ 수선화에는 '새로운 시작, 재탄생, 희망, 기쁨, 행운'등의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The brothers four의 노래 중엔 Try to remember와 Greenfields도 많이 알려졌지만 특히 이 노래는 양희은 씨가 부른 번안곡 덕분에 더욱 익숙해진 것 같아요. 사실 그녀의 노래는 개사한 가사도 좋고 워낙 청아하고 곧은 목소리라 얼핏 다른 노래 같기도 합니다. 예전엔 그녀의 노래를 더 좋아했지만 오랜만에 다시 듣는 The brothers four의 노래는 마음을 나른하고 따스하게 해 줍니다. 마치 유순한 봄밤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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