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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27. 2024

기차 타고 콩나물 사러 간다.

SkyTrain _ 성북동


농담처럼 제목을 써놓고 보니 산간벽지에 사는 사람같다. 하긴 그랬으면 아마 집에서 콩나물을 키워 먹었을 것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소리, 어릴 때 외가에 가면 할머니가 기르시는 콩나물이 있었다. 다소 음험하게 생긴 검은 천이 푹 씌워져 있는 시루속에는 콩나물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고 할머니는 수시로 물을 주셨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할머니는 조심스레 물 한 사발을 콩나물에게 주었다. 그때 잠결에 듣던, 콩나물을 적시고 밑으로 떨어지던 연약하고 순수한 물소리는 아직도 내 유년의 기억 어딘가에 숨어있다 가끔 미소짓는다. 평소엔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는 이내 다시 잠이 든다. 외가에서 듣는 콩나물시루에 물 내려가는 소리는 평화로운 시간의 상징 같았다. 아마도 물소리보다는 할머니의 기척이 주는 안온함이었을 것이다.


2년쯤 전에 직장을 그만두고 주거지를 한국으로 옮길 작정으로 모든 걸 정리하면서 차도 팔았다. 결국은 6개월 만에 다시 밴쿠버로 돌아왔지만 이젠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에 자유로우니 딱히 차가 다시 필요하진 않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차 없이 지낸다. 사실 밴쿠버에서 사는 동안 대중교통을 이용한 건 두세 번밖에 없었다. 나처럼 생활한 사람들 대부분은 차 없는 불편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좋은 점이 훨씬 많았다. 아직 시내버스를 탄 적은 없고 주로 '스카이트레인'을 이용하지만 다행히 밴쿠버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꽤 좋은편이고 코비드 19 이후로 피자 이외엔 없던 배달문화도 생겨서 일상을 변함없이 유지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배달비에 팁도 줘야 하지만. 그리고 가끔 꼭 필요할 땐 '우버'도 이용한다. (한국 가면 놀라는 것 중 하나가 택시비다. 너무 싸다)


차는, 직장을 다니고 한창 아이들 키울 때는 거의 생필품이지만 시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생활에선 낭비에 가깝단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나처럼 기를 쓰고 집에만 있고 싶은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들은 거의 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데다 20년이 넘도록 날마다 운전을 했으니 그만하면 할 만큼 했다는 합리화를 시킬 만큼 나는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지막 차가 '혼다'의 '릿지라인'이었다. 도시형 트럭으로 불리는 큰 자를 몰았으니 운전을 못하는 건 아닌데 운전은 타인의 목숨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 운전하는 동안 집중하고 신경을 바짝 세워야 하는 게 너무 피곤했다.

2009년에 있었던 큰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다. 교차로에서 녹색 등을 확인하고 출발했는데 왼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미친 운전자 때문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차는 180도쯤  넓게 회전하다 겨우 멈추었고 폐차되었다. 딱 운전석 앞부분까지 엉망인 된 차에 비해 다행히 큰 외상은 없었지만 그 후로 몇 년 동안 운전을 못한 건 물론 옆자리에 앉아서도 지나가는 차 때문에 흠칫 놀랄 때도 많았다. 게다가 사고 당시에 뒷좌석엔 아이와 강아지가 타고 있었다. 둘 다 다치진 않았지만 정말 순간적인 시간차만으로도 불행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단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남편의 거의 맹목적인 신뢰(튼튼하다)에 밀려서 내 차인데도 남편이 골랐던 독일차에 대한 찬양이, 사고 이후론 기꺼이 내 몫이 될 만큼 파손된 정도에 비해 차 안의 충격은 약했다.


어쨌든 이러이러해서 콩나물 한 봉지를 사려면 기차를 타야 한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보통 '기차'라고 말하는 그런 기차는 아니고 이곳에서 '스카이트레인'이라고 부르는 도로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다리처럼 놓여있는 레일로 다니는 전철 같은 것이다. 그래서 스테이션은 늘 2층이다. 기관사는 없이 컴퓨터로 운행된다. 교통량의 유무에 따라서 배차시간이나 개수가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우리 동네엔 보통 2~4냥 정도가  5~10분에 한 번씩 온다. 우리 집에서 5분쯤 걸어가면 스테이션이 있다. 필요한 생활 반경이 그리 넓지 않아선지 걷는 시간까지 포함해도 자동차보다 빠르고 편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지난주 어느 날, 갑자기 콩나물 볶음이 너무 먹고 싶었다. 숙주는 대부분의 마켓에서 파는데 콩나물은 꼭 한국 마켓에 가야 한다. 입던 옷에 슬리퍼 끌고 나가 집 근처에서 바로 콩나물을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보니, 과연 내가 얼마큼이나 콩나물이 먹고 싶은 건지 그 욕구를 수치로 환산해서 결정을 하려는 듯 이틀을 망설였다. 콩을 사다 콩나물을 키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까짓것 그냥 갔다 오면 되는데 외출하는 게 너무 싫어서 쓸데없이 부침개 놀이를 했다. 삼 일째, 이 정도까지 먹고 싶으면 가는 게 마땅하지. 결국엔 백팩을 메고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네 정거장을 가서 내린 후, 오분쯤 걸어서 콩나물을 사러 갔다.



콩나물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 세일이었다. 그래서 두 봉지를 샀다. 원래는 8불 정도 하는데 6블에 샀다. 간 김에 파와 무도 사고, 냉동식품으로 나오는 치즈 든 핫도그와 참기름, 깨도 샀다. 백팩이 묵직했다. 저녁엔 흰쌀밥을 하고 한 봉지를 몽땅 콩나물 볶음을 해서 딱 이 한 가지만 놓고 먹었다. 마침 아이가 약속이 있어서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는 날이었다. 나머지 한 봉지는 혹시 상할까봐 찬물에 담궈서 냉장고에 넣었다. 누군가는 물에 빠진 고기는 안 먹는다는데 나는 콩나물을 좋아하면서도 무침이나 물에 빠진 건 좋아하지 않는다. 콩나물은 볶음이지! 아, 아귀찜 같은 데 들어간 콩나물은 좋아한다.(근데 나, 아귀찜 먹어 본 적 있나?)


어릴 때부터 콩나물을 좋아했다. 마르고 키가 큰 편이라 학교 다니는 내내 반에서 늘 맨 끝번이었는데 자주 듣는 말이 '콩나물을 좋아해서 키가 큰가?'였다. 하지만 이렇게 인정받던(?) 콩나물을 좋아하는 식성에 위기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나와 결혼한 남자가 콩나물을 싫어했다. 마음 약한 어린 새댁은 그날로 콩나물을 끊었다. 달랑 두 식구 중의 한 명이 싫다는데 나 좋자고 같은 식탁에 앉아서 그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옛날의 나여~ 쯧쯧.. ) 그러다 결혼 후 처음으로 사소한 말다툼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는 자기검열이 끝나자 화가 났다. 그래서 화풀이할 곳을 찾아서 바로 집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집 근처에 있는 슈퍼에 가서 콩나물을 잔뜩 사다가 볶음을 만들고 그와 마주 앉은 저녁 식탁에서 다른 반찬은 손도 안 대고  콩나물 한 가지로 밥을 먹었다. 나름 복수혈전이었다.(그래서, 누가 손해냐고요. 그날, 좋아하는 생선구이도 있었는데...) 웃음을 참는 그의 얼굴이 얄미워서 콩나물을 더욱 야무지게 씹으며 괜히 제 설움에 겨워 울컥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콩나물 사러 가는 기차 안에서 들었던 노래 _ 성북동 _ 김필


한국가요를 일부러 찾아서 들은 지는 무척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내 플레이리스트에 보관되어 있는 노래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곡이 저장되어 있는 가수가 김필이다. 특정 가수를 무조건 좋아한 적이 거의 없고 노래 따라 달라요, 스타일인데 별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좋아하는 한국 가수 세 사람은 김필, 윤도현 밴드, 잔나비. 그중 가장 편애하는 가수가 김필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무조건 다 좋아한다. 커버 곡까지도. 한 계절 내내 출퇴근길마다 그의 노래를 연달아 들으며 마음 아파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어느 날 문득, 이젠 그런 아픔을 견딜 내공이 닳아버렸다는 걸 인정하며 더는 듣지 않았다.


오랜만에, 달리는 기차의 창밖 풍경에 흔들리며 듣는 그의 '성북동'은 나름 평정심을 유지할만했다. 나에게  '성북동'은 어디일까. 시선은 기차가 그리는 곡선을 따라 먼 풍경 속으로 숨어들고 나는 옛 노래에 숨어들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원래 이 카테고리는 좋아하는 팝송의 가사를 제대로 확인하고 해석도 하려고 만들었는데 오늘은 번외편이 되었다. 뮤직비디오의 영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라이브가 소리가 더 좋아서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불렀던 영상으로 올린다. 김필, 음색도 내 취향이고, 노래도 참 잘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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