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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y 06. 2024

세월의 경계를 지우는 곳

여기는 꼭 가세요 _ 국립김해박물관(1)


같은 도시를 여행한다 해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여행 계획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어떤 종류의 여행계획을 짰든, 김해에 오면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은 장소가 바로 '국립김해박물관'이다. 한마디로 '국립'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곳이다. 일단 전시 공간이 넓고 쾌적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전시 방식으로 관람의 즐거움을 더해주기도 한다. 역사를 '배운다'기 보다는 '느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국립 김해 박물관 바로 건너편의 널찍한 인도는 '가야의 거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가야의 거리 또한 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많고 산책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길이 넓어서 단지 산책로라기보다는 쉼터의 역할까지 한다.  



1998년 7월 29일에 개관한 '국립 김해 박물관'은 구지봉 언덕의 아래쪽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 전시하기 위한 고고학 중심의 박물관으로 우리나라의 대표 가야사 특화 박물관이다. 상설 전시실은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층은 9월 29일(2022년)까지 개편 공사를 위한 휴관이라 아쉽게 볼 수가 없었고, 1층 전시실만 관람이 가능했다. 바로 옆 건물은 어린이 박물관인데 미리 예약을 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사실은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쓰는 여행기라 혹시 어떤 변화라도 있을까 싶어서 국립김해박물관의 홈페이지를 확인했더니 내가 보지 못한 전시품도 있고, 꽤 여러 군데의 디스플레이가 바뀐 것을 알았다. 안 그래도 이층을 보지 못해서 여행기를 쓰기엔 좀 찜찜했던 터라 더 망설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꽤 인상적이었던 장소라서 박물관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가 턱없이 부족할 것을 알면서도 올린다, 어쩌면 유난히 감정이입이 되었던 특별한 공간과 오래된 토기에 관한 것에 방점을 찍기 위한 구실일수도 있겠다.



1층 전시실은 낙동강 하류역의 선사문화, 가야의 여명, 가야의 성립과 발전으로 나누어서 상설전시되고 있다. 전시장은 시기별로 잘 나뉘어 있어서 역사의 흐름에 따라 토기나 장신구, 농기구 같은 것들이 어떻게 변화되었고 또 그것을 어떻게 생활에 이용하고 권력을 상징하는데 썼는지 알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유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후기 석기시대의 유적이며, 신석기시대에는 초보적인 농사와 먼바다로 가서 고래사냥을 했고, 청동기 시대에는 본격적인 논농사를 시작하고 마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높이기 위해 거대한 고인돌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적들이 출토되었다.


수렵채집 생활에 필요한 돌로 만든 도구들
농경생활과 더불어 발달된 도구들


아는 게 병이라고, 예전 같았으면 수렵 채집생활 이후에 농경문화로 변한 것을 '발달'이라고만 생각했을 텐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난 후부터 농경문화로의 변화가 인간 스스로 자처해서 고생문을 연 것이라던 내용이 꼭 함께 떠오른다. 하지만 전시된 유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기계도 없이 순전한 인간의 손 만으로 이런 도구들을 만들고 집을 짓고, 작물을 키우고 거둬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게, 어쩐지 뭉클하다. 인류의 발전에는 과학적인 진화나 환경의 변화를 넘어서 인간애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농경은 신석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주로 잡곡을 재배하는 밭농사였다가 청동기 때부터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된다. 이로 인해 마을이 생기게 되고 마을 내에는 생산과 저장, 의례, 무덤등의 공간이 세워졌고 이런 것들을 위해 나무를 가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발달했다. 그리고 도구의 발달과 더불어 나무 가공 기술도 발달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생산력도 증가해서 를 만들기도 했다.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통나무 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200년 된 소나무를 U자 형으로 판 형태이다. 연대 측정 결과 약 8,000년 전의 배라고 한다. 상태가 너무 좋아서 재현품인가 싶으면서도 얼마나 긴 세월인지 가늠하기 조차 어려운 숫자 앞에서 터무니없이 감정이입이 된다.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배로 완성될 때까지 수없이 반복되었을 사람들의 손길을 상상하면 박물관이란 장소는, 잠시나마 세월의 경계를 지우는 묘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첫 전시실과 두 번째 전시실 사이에 코발트 블루와 따뜻한 베이지의 색채 대비로 눈에 띄는 전시물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경남 밀양 살내 신안유적, 의령 마쌍리 유적, 사천 본촌리 유적에서 발견된 암각화 세 개다. 선사시대의 암각화는 주로 풍요를 비는 동물 혹은 사냥이나 고기잡이 같은 그림이 대부분인데 이 세 개의 암각화에는 동심원이나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야와 신라가 건국되기 전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진한과 변한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야는 낙동강 서쪽에 있던 변한 지역의 여러 작은 세력들로 출발한 나라다. 고조선 멸망 이후 철을 다루는 기술이 영남으로 전파됨에 따라 풍부한 철과 철제품으로 주변국과의 교류도 활발해서 지속적인 성장을 이룬다. 이때 만들어진 철제도구로는 쇠칼, 덩이쇠, 대도, 고리 달린 칼, 미늘쇠 등이 있다.



3세기 후반부터는 지배계층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무덤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생기는데 큰 무덤을 만들고 재물을 장례에 소비해서 부장을 하고 순장의 풍습도 생기면서 무덤의 형태도 고인돌에서 널무덤과 덧널무덤 양식으로 변한다. 사진속의 관은 350년쯤 된 참나무를 파서 만든 것이다. 관을 내리기 전에 미리 파 둔 무덤 자리에 칼이나 장신구 등의 부장품을 넣은 바구니를 먼저 내렸다고 한다.



장신구 또한 아름다움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기도 해서 주로 옥으로 만들던 장신구에 호박, 마노, 수정, 유리, 금속등이 첨가되면서 한층 화려하고 다양해졌다. 크기때문이기도 했지만 특히 김해 양동리에서 발굴된 수정 목걸이가 돋보였다. 일찍부터 이미 발굴된 왕들의 무덤에서는 초록색과 푸른색등 다채로운 유리구슬 목걸이가 나온 적이 있다. 그러다가 4세기 이후부터는 금과 은으로 된 귀걸이나 팔찌 같은 장식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금동관과 허리띠는 대표적으로 꼽을만한 그 시대의 장신구다.



가야시대의 지배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금동관은 신라의 화려한 금동관과는 달리 나뭇가지 모양이다. 순간, 로마시대의 면류관이 떠오르기도 했다. 금못으로 관태와 입식 가지를 고정한 제작기법은 신라 초기의 금관 장식과 비슷하지만 신라처럼 금관은 없고 금동관만 존재한다. 동래 복천동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이 금동관은 얇은 관테의 가장자리에 물결무늬와 점무늬를 결합해 장식하고, 가지 장식에는 세 줄기의 곁가지가 뻗어 있으며 날개를 달아 장식성을 더했다.

 

하지만 6세기 이후 신라의 본격적인 팽창 정책으로 창녕 지역이 먼저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고, 그 뒤로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차례로 멸망한다. 이와 더불어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토기나 장신구도 신라의 지방 문화의 하나로 바뀌어간다.


청동합 & 금동뿔잔


전시실 맨 끝방에 있는 '제 4회 김해 국립박물관 웹툰 공모전(웹툰으로 그린 가야 이야기)'에서 수상한 작품들까지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 이제 더는 볼 게 없겠다고 생각한 순간, 마치 갑자기 벽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곳에 멈춘다. 전시장이 넓고 워낙 마음에 드는 전시물들이 많아서, 정해진 동선을 따라가며 눈앞의 것들만 들여다보느라 반대쪽 벽은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단 생각이 들만큼 내겐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 박물관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될 공간이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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