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와 공부.

책임의 무게에 대하여

by 글쓰는 외과의사

의대 시절을 돌이켜보면 공부를 정말 많이도 했다. 특히나 본과 1, 2 학년 때는 한 주마다 시험을 봤다. 시험이 끝나고 한숨 한번 쉬고, 돌아보면 또 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대한 공부량에 이해는커녕 외우기에만 급급했다.

잠깐 의대 시절 공부 얘기를 언급하자면, 그 당시에는 수업을 프린트물로 했다. 지금 후배들에게서 들리는 소식으로는 태블릿 PC가 없는 의대생이 없다고 한다. 수업 자료를 태블릿 PC로 다운받고 필기를 태블릿에 한다고 한다. 불과 4~5년 전의 얘기지만 그 당시 아침은 그날의 수업 프린트물을 챙기기 바빴다. 인쇄 담당이 있었고, 아침마다 복삿집에서 수업 자료를 복사해왔다. 하루치 수업 자료를 챙기면 대충 책 한 권 두께가 나온다. 한 장당 네 개의 PPT 슬라이드를 넣어놓고 인쇄를 하면 대충 20장 정도 된다. 20장의 양면 프린트물이라면 160개의 PPT 슬라이드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20장의 프린트물이 한 시험당 1-2개가 아니란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간, 프린트물에 필기하며 한 주 동안 수업을 듣고 토요일 오전에 시험을 봤다. (그나마 본인이 다녔던 대학교는 자비로운 편이라 토요일 시험이다. 월요일 시험 보는 타 의과대학교는 주말도 없다.) 금요일 밤 모든 프린트물을 모아놓고 그때부터 종이를 씹어먹을 듯이 외웠다. 학생 때 운이 좋게도 과 1등과 공부 메이트였다. 하지만 정작 난 1등과 거리는 멀었다. 둘이서 꼬박 밤을 새우면서 쌓아둔 프린트물을 하나씩 외웠다. 몽롱한 상태로 프린트를 넘기고 서로 헛소리를 하면서 시험 전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정말 너무 많은 양에 둘 다 너무 화가 나면 그 새벽에 맥주를 사러 나갔다. 그렇게 숨 막히는 의대 공부가 꾸역꾸역 지나갔다.

지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추억으로 미화되긴 한다. 매주 찾아오는 시험이 그렇게나 싫었지만, 시험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에피소드도 많았고, 그때 생긴 정으로 지금도 동기들은 끈끈하다.

학생이 끝나면 공부도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막상 병원에서 일해보니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했다. 인턴 때는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시키는 일만 하면 되었다. 부담감에서 조금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1년 차가 되고 주치의가 되니 부담감이 어마어마하였다. 환자들 처방부터 제증명서 내 서명이 필요한 일들이 곳곳에 있었다. 서명을 한다는 건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그 서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하루하루가 불편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는 것은 똑똑할수록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내 결정에 확신이 있으면 책임이라는 무게도 기꺼이 짊어질 수 있었다. 타 직업과는 조금 다르게 의료 분야는 나의 무지가 곧, 환자에게는 위해이다. 잘 알지 못한 채로 내린 결정에 죄책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수도 있다. 환자를 만나는 한, 공부는 평생 공부이다.

사실 이렇게 느끼지만 바쁜 병원 일상에서 공부를 따로 시간 내서 하진 못한다. 퇴근 후에는? 물론 피곤하다는 이유로 책을 펼치지 못한다. 환자를 보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매번 나의 무지에 자책하면서 공부를 하고 환자를 본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그래도 이전보다는 많이 알고 있는 나를 알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조금씩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축적되나 보다. 환자 앞에서 제시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의사가 되길 희망하며, 오늘도 옆에 책은 놔뒀지만 펼치지 않은 오후.☕☕


보통 스프링 책과 책 사이의 한 뼘 분량이 한 시험당 공부해야 하는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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