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다정한 대답이 되는 시대를 바란다
“지금 놀아도 괜찮아”라는 말이, 다정한 대답이 되는 시대를 바란다
오늘 아침, 말차 라떼 한 잔과 함께 하루를 열었다.
코리아헤럴드 신지혜 기자님과의 전화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제는 ‘놀이 시간이 부족한 초등학생들’.
미리 준비해둔 자료와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요즘 교실에서 마주하는 풍경과 부모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었다.
기자님은 대화의 초입에서 이렇게 물었다.
“예전의 학교와 비교한다면, 그 시점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는 잠시 20여 년 전, 내가 교실에서 처음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아이들은 하굣길에도 동네에서 삼삼오오 모여 공을 차고, 술래잡기를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특히 코로나19 전후로 변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아이들은 비대면 생활에 익숙해졌고, 동시에 ‘안전한 놀이 공간’의 부재로 인해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기회 자체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학교 안팎에서 ‘함께 놀기’는 점점 사라졌고,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배워야 할 사회적 기술들도 결핍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협력, 양보, 경쟁, 타협, 갈등 해결 같은 사회적 기술을 몸으로 배웁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아이들은 또래 관계에서 쉽게 상처를 받고, 자기표현이 서툴며, 감정을 안에만 쌓아두게 되죠. 결국 놀이의 부재는 아이에게서 ‘관계의 언어’를 빼앗는 일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교실 현장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해 사소한 오해가 폭력으로 번지기도 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는 능동적으로 마주하기보다는 회피하고 주저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요즘 부모들은 놀이 시간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결국엔 성적 때문에 아이를 놀게 두기가 어렵다고 해요. 그리고 실제 사례 중에서 한 어머니의 고민을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기자님은 고민사연을 들려주셨다.
<고민사연>
그 학부모님은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아이의 수학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교육과 공부 시간을 오롯이 수학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결과, 아이는 다른 과목에서 점점 흥미를 잃고 성적이 떨어졌고, 결국 모든 과목이 평준화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선생님, 모든 과목을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오히려 모든 과목을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학교는 왜 특정 과목을 콕 집어 강조하나요? 뒤쳐지는 과목의 성적을 올리다 보니 잘했던 과목의 성적이 떨어지는데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요?”라고 그 어머니는 질문한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학교에서 수학 성적을 강조할 정도라면, 아마도 기초가 부족한 경우일 겁니다. 그런 경우엔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어느 정도 인풋을 통해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초를 다진 후, 잘하는 과목을 강화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죠.”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맥락을 덧붙였다.
“문제의 본질은 학교 교육이 아니라, 입시 제도에 있습니다.”
지금의 입시 구조는 수학과 영어 점수가 모든 기회의 문을 열고 닫게 만든다.
그 구조 안에서 부모가 불안을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묻고 싶다. AI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갈고 닦게 하는 이 시험 문제들이 정말 인생을 걸 만큼 중요한가? 안타까운점은 이 답을 알면서도 불안과 강박으로 시험문제를 잘 푸는 시험인재로 키워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창의력, 공감력, 정서 안정, 관계 형성 능력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데, 문제풀이만으로 아이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놀이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다.
자율성과 사회성, 감정 조절 능력과 창의성은 모두 자유 놀이 안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진다.
방과 후 시간은 사교육에 쫓겨버린 지금, 아이들은 점점 ‘살아 있는 관계’와 ‘자기 감정’을 잃어가고 있다.
기자님의 마지막 질문은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학교에서의 시간이 오히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것이 아이러니 할 정도이다.
“‘지금 놀아도 괜찮아’그 말은 단순한 허용이 아닙니다. ‘나는 너의 삶을 믿는다’는 존재 승인이고, 감정에 대한 공감이며, 자기 시간을 지켜주는 선언입니다. 놀이는 아이가 자신의 감정, 몸, 관계, 세상을 안전하게 탐색하는 시간이에요. 그 시간을 앗아가는 건 아이의 성장 기반을 빼앗는 일입니다.”
통화를 마친 뒤에도 마음은 한동안 그 여운 속에 머물렀다.
‘아이들은 왜 더 이상 놀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이 시대는 왜 아이의 시간을 믿어주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바란다.
“지금 놀아도 괜찮아”라는 말이, 불안과 부담 없이 건넬 수 있는 다정한 대답이 되는 시대가 오기를.
그리고 그 시작은, 오늘도 아이 옆에서 그 시간을 믿어주는 어른 한 사람의 말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