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랭그리터의 작품을 통해 마주한 나의 ‘지금 여기’
햇살이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던 날이었다.
《엘리자베스 랭그리터: 매일이 휴가》 전시를 찾은 나는, 생각보다 깊고 다정한 감정의 물결 속에 잠겼다. 아크릴과 조형의 물성, 미니어처 인형의 리듬, 색감 위를 걷는 작지만 확고한 존재들.
그 모든 작품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너는 어디에 있니?”
봄이 머무는 순간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날
작품 《봄이 머무는 순간 II》는 봄날 꽃밭에 나란히 누워 햇살을 받는 연인의 모습을 중심에 둔다.
평면 위에 얹힌 입체의 질감과 한 송이 한 송이 살아 있는 듯한 꽃들의 배열.
그 중심에 두 인형이 있다. 작은 존재지만 강렬한 존재감.
설명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햇살을 느끼고 싶은 날.
그날은 어떤 할 일도, 갈 곳도 없이 꽃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날.”
나는 이 장면에서 ‘삶의 낙원’이란 거창한 장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항상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았다.
‘멈추면 안 돼’
‘계속 움직여야 돼’
‘남들보다 늦어지면 안 돼’
하지만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비로소 멈췄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또 한편으론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여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낙원을 만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일을 즐기는 자가 위너다. 과정을 즐겨라 라는 말을 많이 하고 많이 듣는다.
난 꼭 그렇진 않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지만,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려는 태도,
그 안에서 작지만 확실한 의미를 발견하고, 나만의 즐거움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결국 ‘오래가는 사람’이기에
좋아하려고 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중이다. 가끔은 멈추고 낙원을 찾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 – 리듬으로 존재하는 우리
《도시를 걷는 사람들 5, 6, 7, 8》은 도시의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인물들을 조형화한 작품이다.
모두 다른 방향으로 걷지만, 어떤 리듬과 음악처럼 조화를 이룬다.
“걸음은 리듬이 되고, 만남은 춤이 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의 삶이 떠올랐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출근길, 학교에서의 수업, 아이들과의 눈 맞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의 도시적인 ‘안무’는 아니었을까.
각자의 색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하루의 멜로디.
나도 그 안의 하나라는 것이 어쩐지 위로가 되었다.
비슷해 보이지만 전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나 역시, 내 속도로 걷고 있다는 것.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완전히 존재하는 두 사람
그리고 마지막 그림.
광활한 푸른 바다 한가운데, 단 두 명의 인형이 누워있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림은 고요하지만 압도적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의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
혹시 낙원은
사방이 둘러싸인 풍경 속이 아니라,
무엇도 방해하지 않는 광활함일지도 모른다.
관계로부터도, 사회적 역할로부터도,
잠시 떨어져
‘그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것이 어쩌면 내 삶의 진짜 낙원 아닐까.
삶의 낙원은 멀리 있지 않다
낙원을 꿈꾸며, 우리는 종종 멀리 떠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랭그리터의 그림은 말한다.
“낙원은 매일의 삶 속에도 있다.
햇살 아래 쉬는 한 시간,
도시의 리듬 속에 나만의 호흡을 찾는 순간,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공간.”
나는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삶의 낙원을 찾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그것은 ‘더 좋은 삶’을 찾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충분히 좋은 삶’ 임을 알아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당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
당신의 ‘삶의 낙원’은 어디에 있나요?
그곳은 어떤 색인가요?
누구와 함께 있고 싶나요, 혹은 혼자 있나요?
그 질문에 대한 당신만의 대답이,
오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