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의 그레이스로부터
인사동의 여름은 여전히 붐비고 더워. 그 중심에 자리한 갤러리 은에서 나는 ‘아름다운여행전 10주년 특별전’에 참여하고 있어. 이 공간은 외관부터 인상적이지만, 내부에 들어서면 조용히 감정을 머물게 하는 구조가 있어. 갤러리의 층고, 조명, 벽면의 간격까지 전시에 최적화된 설계처럼 느껴져. 작품을 걸고 며칠이 지난 지금, 이 공간에 내 그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점차 실감으로 바뀌고 있어.
이번 전시는 ‘아름다운화실’에서 주최했고, 그동안 이 화실에서 활동해 온 수많은 작가들이 함께하고 있어. 참여 작가 중에는 배우 하희라, 이태란 씨를 포함해 전문작가, 전문직, 교육자, 기획자, 생활 예술가 등 다양한 이력이 교차하는 사람들이 많아. 각자의 작업과 색이 다르고, 시선도 다르지만 이 전시에서는 누구도 중심이거나 주변이 되지 않아. 전시장 전체가 하나의 흐름처럼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 나의 작품도 하나의 조각으로 놓여 있어.
나는 내 그림이 특별히 눈에 띄는 위치에 있다거나, 어떤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그림 자체가 이 공간에 어울리는지를 관찰하며 지내고 있어. 그림을 그릴 때보다 그림이 걸린 이후의 시간이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어. "이 작업은 지금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가." "함께 걸린 작품들과 어떤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 "이 전시는 나에게 어떤 장면으로 기억될 것인가."
‘아름다운 여행전’이라는 이름처럼, 이 전시는 단순한 그림 전시 이상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화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작가들이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며 만든 수년의 궤적이 한 공간에 펼쳐지고 있어. 나는 그 궤적의 한 자리에 그림을 걸고 있어.
이번 전시의 주제는 “모두 함께 다 같이(One & All)”야. 이 문장이 전시장을 관통하는 방식은 명확해. 참여 작가 누구도 지나치게 앞에 나서지 않고, 작품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리듬으로 공간에 머물고 있어. 나의 소중한 작품 한점이 갤러리의 창가에서 살짝 보이는 위치, 키오스크 방명록 뒤에 있는데 그 자리가 마음에 들어. 그냥 지나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느낌이 들어. 보랏빛이 그 장소에 딱 어울리기도 해.
방명록을 쓰는 분들 잠시 쉬는 분들의 뒷 배경으로 살짝 살짝 보이는 기분도 나쁘지 않아. 2층으로 올라가면 제주도 바닷가 풍경과 어두운 수면 위의 등대를 그린 두 작품을 걸었어. 모두 기억을 담은 이미지들이야. 그림은 감정을 말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보면 이 그림이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달하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느끼게 돼.
인사동이라는 장소도 이 전시의 성격을 강화하고 있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예술을 시작하거나 정리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동은 여전히 특별한 위치야. 그 장소의 한복판에서, 지금 내 그림이 하나의 문장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이후 작업의 기준점이 될지도 모르겠어. 이곳에서 처음으로 “내 작업이 누군가와 나란히 놓일 수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이 공간을 관찰하고 있어. 어떤 감정적 전율보다는 이 전시가 나의 작업과 태도에 어떤 반영을 남길지를 천천히 살피고 있어. 관람객들의 반응, 작가들 간의 거리감, 그림 옆에서 나누게 되는 대화들까지 모든 것이 작업 이후의 기록이 되고 있어.
지금의 나는 어떤 확신이나 선언 없이 이 전시의 흐름을 조용히 따라가고 있어. 예상과는 다르게, 축제와 파티로 시작했지만 축제보다는 구조적인 경험이야. 이 경험이 너에게 어떤 식으로 남아 있을까. 10년이 지난 너는, 이 전시를 단순한 이력으로 적고 있을까, 아니면 어떤 흐름의 기점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한 가지야. 이 전시가 너의 작업과 삶에 어떤 문장으로 남아 있는가. 혹은 아무런 문장이 되지 않았다고 해도 괜찮아. 다만 그 여름, 인사동 한복판에서, ‘두유진’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걸었던 그 시간은 지금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
그리고, 함께한 훌륭한 모든 분들께 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존경하는 마음이 한 분 한 분께 닿기를 바라고 있어. 그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이 공간에 그림을 걸 수 있었고, 지금 이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누군가는 오랜 시간 작품을 다듬어 온 분이고, 누군가는 자기만의 속도로 성실하게 예술을 이어온 분들이야.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영광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 작업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를 말없이 일러주는 기준이 되어주고 있어.
그 사실을 이렇게 적어두고 싶었어.
2025년 7월, 인사동에서 보내는 편지
그레이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