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배우고 싶어서
우리 반 우영이는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는 아이이다. 친구의 어떤 행동을 아주 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나에게 와서 “선생님, 00이 전학 가라고 해주세요.”라고 말한다거나 특수 학생이 가까이 다가가면 “야! 저리 가! 왜 나를 괴롭혀!”라고 말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아이는 자신만의 판단 기준으로 친구가 아무 의미 없이 한 행동을 자신을 괴롭힌 것이라고 ‘판단’을 했고, 특수 학생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자신을 괴롭히러 왔다고 ‘판단’을 했다. 판단은 오류가 참 많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우영이에게 사실과 느낌을 구분해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우영이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아, 우영이는 친구가 너를 괴롭힌다고 느꼈구나?”, 혹은 “너를 놀이에 끼워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왜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생각과 느낌을 다시 한번 정돈해서 되묻는다. 판단은 항상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 상대에게 물어보지 않고는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우영이에게 지속적으로 알려주고 싶었다.
여기서 잠시, 우영이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다. 우영이는 학기 초 미술심리검사에서 자신의 가족이 동물이 되었을 때 어떤 동물일지 그림을 그리는 활동에서 아빠-엄마-우영이를 다 고양이로 그렸다. 각자 독립적인 공간이 있었고, 서로의 상호작용은 보이지 않았다. 또 htp(집-나무-사람 검사)에서 집을 그렸을 때 일반적인 집의 모습이 아닌 새장, 닭장, 고양이집을 그리고 새가 짹짹! 닭이 꼬끼오, 고양이가 야옹! 우는 소리를 적어서 냈다. 우영이가 생각하는 집. 가정의 모습이 소통이 없고 각자 자기 말만 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실제로 우영이의 어머님이 가정에서 아버님과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의사소통은 사람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역량이다. AI 시대에는 더더욱 중요한 가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외동인 우영이는 또래 친구들에게 다가갈 때도 몸싸움을 하듯이 다가가고 자신이 싫은 친구의 행동은 모두 자신을 괴롭히는 행동으로 쉽게 ‘오해’를 한다. 그리고 협동 학습을 할 때는 “공부는 혼자 하는 게 제맛인데요?”라고 말하며 혼자 앞서서 활동지를 풀기도 한다. 우영이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우영이만의 방법을 찾기를 바랐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는 학교라는 공간이 그래서 더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타인의 어떠함이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기 이전에 우리는 사실과 내가 느낀 느낌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내 느낌은 타인이 준 것이 아닌 내 과거 습관화 된 회로를 따라 판단을 내린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럼,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하냐? 답은 관찰에 있다. 타인의 말과 행동을 사실을 중심으로 관찰할 것. 언제까지? 궁금한 것이 생길 때까지. 관찰에는 나를 비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부모는 관객이다> 책을 쓴 박혜윤 작가님은 말한다. 오래 자세히 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 생각과 나만의 기준이 상대를 관찰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 생각이 흐려질 때까지 상대를 내 안에 담는 것이 관찰이라고 했다. 불편한 과정이다. 그래서 그 정도의 에너지를 쓰려면 상대를 그만큼 애정하고 사랑해야 함은 자명하다. 박혜윤 작가님은 그래서, 사랑하는 일은 관찰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우영이의 모습을 보며 나를 본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어디까지 관찰하고 있을까? 먼저 교실의 아이들에게, 이미 안 봐도 또 똑같은 걸로 싸우고 있겠지 생각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꾸하고 대답했던 때는 얼마나 많았나? 같은 싸움의 내용 같은 겉을 지나 깊숙이 들어갔을 때 조금 다른 진전이 보였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우영이처럼 자신만의 중심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만큼 타인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융화하는 태도 역시 필요하다. 나는 소신이 강하지만 나와 다른 타인을 보면 긴장하고 에너지를 많이 써서 타인과 융화되는 것을 매우 버거워한다. 중심을 지나치게 고집하면 남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완고한 사람이 되고, 지나치게 남의 말에 포용하면 정작 나를 놓치게 된다. 따로 또 같이. 함께 하는 법을 우리는 배워나간다. 그게 학교가 이 시대에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사람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