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 봄을 위한 다짐
아끼던 꽃무늬 원피스를 버리던 날, 나도 이제 '발랄함'과는 거리가 멀어졌구나 싶었다. 사소한 거에 까르르 대던 '나'는 사라지고, 사소한 것에 짜증이 밀려오는 '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나의 청춘이 흘러가버리고 있음으로 귀결시켜버리는 내가 보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우울해질 무렵, 버릴 옷을 정리하던 엄마가 내 원피스를 입어보곤 괜찮냐며 내게 묻는다.
순간 멍해졌다. 어쩌면 우리는 '청춘'이라는 단어에 우리의 청춘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가. '벌써 00살이야!' 하는 얘기들이 우리에게 오히려 족쇄가 되어 버린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사전에서 청춘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나는 오늘 여기에 반기를 들고 싶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청춘조차 주입식 교육으로 배웠다. 이는 사회적 통념상으로 지칭하는 청춘이며, 주위를 돌아보면 청춘을 보내고 계시는 수많은 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청춘은 사전적 의미처럼 어느 시기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도는 어떠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파릇파릇한 청(靑)과, 봄 춘(春)은 공통적으로 매년 봄마다 돌아온다. 따라서 그 시기는 어느 한 시점이 아니다. 오히려 연장선 속에서 내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순간들, 그게 바로 청춘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나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데 있다.
만학도로서 새로운 공부에 도전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열심히 노력하시는 어르신들을 생각해보면, 그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청춘을 보내고 계신다. 입버릇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그게 참말이다. 엄마가 딸의 화려한 옷을 물려받아 멋을 내어보듯, 이제 더 이상 나이나 시기에 내 행동을 국한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지 할 수 있다! 그게 언제든 나를 내가 믿고 도전할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인 것이다.
요 근래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서 '이렇게 나의 젊음이 흘러가는가'라는 생각에 우울하곤 했다. 그런데 그러지 말아야겠다. 매년 봄이 돌아올 때마다 새싹들이 다시 피어나기 위해 노력하듯, 내 청춘을 나 스스로 만들어줘야겠다. 나는 내가 좋으니까, 나 스스로를 사랑하니까 그런 기회와 믿음을 충분히 보장해준다면 내 청춘은 봄이 돌아오듯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테니까 말이다. 오늘 하루 우리의 청춘을 위해 나 스스로를 더 사랑해주자. 뭘 하고 싶은지 그리고 뭘 좋아하는지 더 알아봐 주고, 더 해줄 수 있는 하루를 보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