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o, ergo sum
지금까지 살면서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가? '살아간다'와 '존재한다'는 엄연히 다른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현재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사실 철학자들의 단골 주제였다. 그냥 단순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숨 쉬고 살아있으면 존재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오늘은 이에 더하여 좀 더 복잡한 생각을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문장을 살펴보면 위 질문에 대한 데카르트의 답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일단 논의의 시작으로 회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일단 의심해야 한다. 예컨대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 꿈 안에서 내가 짝사랑하던 상대와 연애를 시작하게 된 것으로 상상해보자. 너무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던 나머지, 심지어는 그 꿈이 진짜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되기 시작한다. 이 느낌은 우리 모두가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럼 그때부터 시작이다. 정말 말 그대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는 와중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의심하고, 존재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들은 꾸며냈어도 그게 꾸며냈다는 사실을, 혹은 그렇다고 그게 진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왜냐면 이는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받아들여진, 왜곡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 '나'는 내가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생각할수록 내 존재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겪게 된 일이나 감각은 실재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의심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실재하는 것이 확고해진다. 그게 바로 데카르트의 주된 논의로 우리가 의심, 즉 생각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와 다른 답변도 있는데, 바로 헬레니즘 시대를 향유한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소위 쾌락주의라고도 통칭되는데, 이들은 필수적인 자연적 욕구만을 충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적 욕구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존재 자체의 기쁨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배가 너무 고픈 상태에서 먹는 자그마한 빵 조각 하나, 혹은 잠을 며칠간 자지 못하다가 자는 10분의 낮잠은 우리에게 존재의 기쁨을 준다. 또한 화장실을 가고 싶은 데 가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가 겨우 찾은 화장실에서 일을 해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기쁨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이처럼 에피쿠로스 학파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충족시켜줘야 하고, 인간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안정되게 하고 존재의 기쁨을 깨닫게 한다고 가르친다. 금욕을 강조했던 다른 학파들과 다르게, 부수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절제가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 맞는 자연적인 욕구는 충족시켜야만 우리의 마음이 안정되고 존재의 기쁨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두 관점을 보았을 때, 가장 강렬하게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건 에피쿠로스 쪽인 것 같다. 화장실을 참다가 갔을 경우의 그 기쁨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고, 짧지만 크게 다가오니까 말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며 가치를 추구할 쪽은 물론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을 놓지 않는 삶이긴 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한 생각을 놓지 말아야 제대로 된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테니까. 다시 살펴봐도 참 어려운 얘기 같다. 그럼에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꼭 생각해봐야 할 주제임은 분명하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