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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May 13. 2022

핏빛 며느라기의 서막


성인이 되기 전까지 결혼은 절대 해서는 안될 짓이라고 생각했다. 4 자매를 키우며 맏며느리 역할을 하던 엄마의 며느라기 생활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남자에 대한 삐뚤어진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이 바뀐 건 일찍 취업에 성공하며 연애 상대로서는 꽤 괜찮은 남자들을 만나면서, 세상 모든 남자가 아빠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였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과 연애를 하면서 남자에 대해 가지고 있던 극단적이고 삐뚤어진 가치관을 깨뜨리고 인간대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착하디 착한 지금의 남편은 당시에는 홧김에(?) 만남사람이었다. (후회된다는 말은 절대 아님)

깊은 연애가 끝나고 멘탈너무 힘들 때 우연히 소개받았는데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은 멋모를 때 하라고 했던가? 

사실 중간에 찾아온 구남친과 메리지블루, 여러가지 막연한 불안감에 결혼을 미루자며 얘기한 나와 설득하던 남편, 당시에는 내가 예민한가? 생각했지만 미묘한 감정소모로 계속해서 싸울거리를 던져주시던 예비시댁까지...


어느 한쪽이라도 적극적이어야 가능하지, 이것 저것 생각하고 고민하고 따졌다면 절대 못했을 같다.

생각해보면 20~30년을 따로 살아온 남녀가, 그것도 특히나 우리나라는 두 집안의 결합인 것을...


겨우 몇년만에 결정하는 이런 제도가 맞는건가? 아님 내가 결혼에 안맞는 인간인가?라는 회의감을 가장 많이 느낀건 신혼초기였다.






무튼 그렇게 결혼을 하기도 전에 느라기의 서막이 올랐다. 전라도 여자인 나와 경상도 남자인 남편이 만나 동서간의 화합을 이루었으나 그건 우리만의 착각이었다.


예단을 드리러 가는 날,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시기에 솔직히 결혼 전에 불편하지만 그러겠다 하고 찾아뵀다.

저녁을 먹고 준비한 선물과 예단을 드리니 아버님이 하시던 말씀


[시아버지] 이제 김 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으니, 이 씨 집안의 가풍은 잊어버리고 김 씨 집안의 가풍을 익히도록 해라~
[나]?? (순간 내가 재벌가에 시집을 온건가 싶었다....)


얘기를 하던 도중 어색함에 과장하여 크게 웃은 나를 보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시어머니] 우리 앞에서는 괜찮은데, 다른 어른들 앞에서는 그렇게 입 크게 벌리고 웃지 말고 입 가리고 웃도록 해라
[나] 아.. 네




그리고 다음날 의례적으로 예단의 일부와 과일 등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 일찍 결혼하는 편이니 예단, 예물 이런 것에 예산을 쓰지 않고 정말 필요한 신혼살림에 쓰고 싶었으나 역시나 시댁이 걸렸었다.


남편이 전세라고 했던 집이 사실은 자가였고, 시댁에서는 은근히 계속 뭔가를 원하는 눈치셨다. 그래서 나름 준비해서 다녀왔는데 돌아와서 엄마와 함께 펴본 봉투 안에는 보낸 금액의 20%의 현금과 아버님의 편지가 적혀있었다. 돌리고 돌려서 얘기하셨지만 결론은 '보낸 돈이 적어 적게 돌려보내니 그리 알라' 는내용이었다.





화가 났다.



2년만 미루 자고 했더니 2시간을 설득하고, 만난 지 100일도 안돼서 매번 결혼하자 얘기한 사람이 당신 아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의 선택이지만 억울했다. 결혼한 이유를 말하자면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건 경제적인 이유가 전혀 아닌데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비참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곱게 크진 않았지만 엄마에게는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었음에 더 화가 났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시부모님은 결혼식 전에 직장을 그만둔 내가 마음에 안 드신 것이다. 주변에 공무원 며느리라고 다 소개했는데 화환 하나 없으면 난처하다는 입장이라는 것.. 부모님께 말씀드렸다고 했을 때 한번 더 확인했어야 했나?


축의금 회수 못하는 건 내가 더 억울한데 그냥 전직 공무원 며느리는 안되나? 이 문제가 시작이었을까? 아니 예단이 시작이었을까? 연애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안 싸우던 남편과 나는 결혼 준비를 하며 시부모님 덕분에 처음으로 싸움이란 걸 해봤다. 그리고 남편에게서 그 말을 듣고야 말았다.




"우리 부모님은 그런 분들 아니셔"




그리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정말 성품이 좋은 사람이니까, 부모님도 기본적으로 좋은 분들일 텐데 뭔가 첫 단추가 잘못 맞춰진 걸 테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도 살얼음판을 딛듯 시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있었다.


남편은 1년에 한 번씩 제실에서 한복 입고 갓을 쓰고 제사 지내는 경상도에서도 보수적인 집안의 장손이었고

**

나는 4 자매를 키워내는 엄마의 삶을 보며 남아선호 사상에 치를 떨게 된 페미니스트 비스무리한 사람이었다






옛날 드라마에 나올법한 혼자 부엌에서 궂은일 하고 남은 반찬에 찬밥 먹는 그런 부엌데기 같은 시집살이라 서러운 게 아니다. 지금은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시대가 아니고, 남자는 집을 해오고 여자는 혼수를 해오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니 차별의 이유였던 바깥일과 집안일의 경계가 사라졌으니 이제 사위와 며느리의 위치도 동등해져야 한다는 게 요즘 젊은 세대의 입장이다.


나 같은 경우 직장을 그만뒀잖아!라고 한다면...

나는 합의를 하고 그만두었고 남편 돈으로 놀고먹을 생각은 없고 다시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내가 결혼생활 중에 쉰 건 몇 개월도 안된다)


그리고 시부모님께 직접적으로 얘기하진 않았지만 시부모님 집에서는 시부모님이 일하고, 우리 집에 오시면 우리가 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집에서는 손님 입장에서 돕는 위치이지 당연히 일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인데.... 너무 미쿡며느리같다고 생각할까 봐 차마 말은 못 했다.






예를 들면 나는 사과를 안 깎아먹는다.

사과는 껍질째 먹는 게 맛있고 건강에도 좋으니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먹었고, 채칼 외에는 과일칼을 잘 다루지 못한다. 반면 남편은 모든 껍질을 다 깎아먹는다. 정말 조금의 껍질도 같이 먹는 걸 싫어하고 나보다 껍질을 잘 깎는다.


과일이 나왔다. 집에서처럼 남편이 사과를 집어 드니 어머님이 기겁하며 만류한다. 위의 설명을 하니 그래도 나보고 깎으라 신다.


내가 깎는 걸 보시고서야 본인이 가져가신다.




"쓰-읍", "저리 가세요~"
"가서 아버지 제기 나르는 거나 도우세요~
부엌에는 오지 마세요~"


명절에 남편이 부엌에 들어오려고 하면 어머님이 싫은 소리를 하신다.





'제실'이라는 게 있다.

일가친척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토지를 사서 집을 지어놓고 1년에 한 번씩 모이는데,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날이 찾아왔다. 시어머니는 앞으로 너도 참석해야 할 집안의 중요한 행사니 이번에는 가볍게 참관하는 형식으로 오라고 하셨다.


남편에게 그동안 가본 적이 있냐 물으니,

위대한 장손은 한 번도 간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 흠...


당일날, 여기저기서 모여드는데 진풍경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양손 한가득 음식과 짐을 낑낑 짊어지고 일꾼 포스로 무장을 하고, 나이가 드신 여자 어르신들은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나들이를 오신듯 보였다.


남편을 포함한 젊은 남자들은 양복을 입었고, 아버님을 포함한 나이가 드신 남자 어르신들은 조선시대 학자들처럼 두루마리를 걸치고 갓을 쓰고 계셨다.


그리고 갓을 쓴 분들이 제실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 소리 내어 중얼중얼 읊고 절을 올리고, 양복을 쓴 무리들이 뒤에서 묵념을 하고 그 뒤로 여자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그릇을 씻는 풍경.






어머님은 집집마다 순번을 정해서 음식을 준비하며 우리 차례는 최근에 지나갔으니 걱정 말라며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순번?? 그냥 식당을 가지??


주방도 없어서 수도꼭지 앞에 쪼그려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 또래의 여자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얼이 빠져있는 나에게 누군지 모를 사람이 다가왔다. 사촌? 오촌? 결혼식에서 보고 처음 보는 먼 친척 숙모라고 했다.


[친척] "아~언니 며느리??"
[나] "안녕하세요~"
[친척] "응~ 어우~ 얘!! 근데 너는 일해야 되는 애가,,,ㅉㅉ 원피스에 구두에 이게 뭐니?
언니! 며느리 교육 좀 시켜야겠다! 호호호호홓"
[시어머니] "처음이니까 좀 봐줘~호호홓"


[나] "???"



어찌어찌 제실 행사라는 것이 성대하게 막을 내리고 돌아가는 길, 시댁에 들러 어머님이 나를 긴히 부르셨다.


올 것이 왔구나


[시어머니] 클로버, 이제부터는 너도 우리 집안의 며느리로서 제실에 참석해야 하니 다음부터는 옷차림에 신경 좀 쓰도록 해라.
[나] 결혼 전에 오빠는 참석한 적 없다고 들어서요
[시어머니] 남자가 결혼을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 오빠랑 한번 얘기해볼게요. 저도 처음이라.
[시어머니] 클로버! 결혼을 했으면 며느리는 당연히 제사를 챙겨야 하고...
[나] 어머니! 이 먼길을 저 혼자 올 수 없는 일이니 오빠랑 의논해볼게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우리 엄마는 결혼생활 40년 동안 친정을 10 번가셨다.

고모들이 친정을 와도 할머니는 고모. 고모부들 음식까지 차리고 가라고, 그리고 술상까지 봐주고 가라고, 그 뒤로는 아빠가 술 취해서 못(안) 가고 그 뒤로는 못 가는 게 당연해졌다.


그리고 복붙처럼...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시누랑 오빠 사이 떨어뜨릴 생각이냐고, 1년에 보면 몇 번이나 본다고 그러냐고, 애가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고,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냐고,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른다고..


이런 말 100번 듣는 것보다 무서운 ,

당연한 사람이 되는 것. 나는 며느리이기전에 그냥 나에요. 며느리라는 단어자체가 싫어지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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