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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Aug 16. 2022

요즘에도 '씨받이'가 있나요?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던 순간'을 다시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된 '며느리 해방운동'.

가족의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무작정 희생하기보다 불편한 부분은 불편한 상황을 거쳐서라도 관계 개선을 하기로 결심했다.


부모 자식 연을 끊었던 큰 사건을 계기로 시부모님은 나에게 조심하셨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원래 살아오신 방식이 있으시기에 내가 느끼는 은근한 불편감은 계속 있었다.






시댁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날.

저녁을 먹은 후 커피타임에 갑자기 2세 얘기가 나왔다.


[시어머니] 그래, 너희는 임신 계획이 어떻게 되니? 우리 XX(남편 이름)이가 장손이라 다들 관심이 많으시다.
[남편] 아직은 생각 없어요. 대학원도 남아있고.. 아직은 여유가 없네요
[시아버지] 아직 생각 없는 이유가 뭐냐? 어차피 애는 클로버가 볼 꺼고 너(남편)는 계속 공부하면 되는 거고, 경제적인 문제면 지원해주마. 아니면 클로버 몸이 약해서냐?
[남편] 아니에요. 아직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진지하게 의논을 하진 않아서요..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시아버지] 흠... 씨받이가 튼튼해야 하는데 ㅉㅉ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의례 인사말처럼 쓰는 게

 "애기 언제 가질 거냐?"이니 시부모님이 여쭤보시는 건 불편하지만 기분 나쁠 일은 전혀 아니었다.

나도 직장을 다니지만 남편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바쁘니 육아도 내가 주로 할 거라는 것도 맞는 얘기다.



그런데 씨받이?

처음에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가 내가 단어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 씨받이
부인이 출산하지 못하는 경우, 돈이나 재물을 주어 조건부로 동거하는 여자를 뜻한다.
조선시대에 있던 악습으로 배우 강수연 씨가 출연한 <씨받이>라는 동명의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씨받이인 옥녀(강수연)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양반집에 두고 떠나기 전에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내뱉은 명대사가 있다.


난 새끼 낳아주는 짐승이 아니란 말이야! 나도 꼬집으면 아프고!! 슬프면 울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이야!!!!




영화 <씨받이> 포스터



그 익숙하지만 생소한 '씨받이'라는 단어에 머릿속이 복잡해 표정관리가 안된 채로 티타임이 끝났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는지 검색해봤지만 다른 의미는 없었다. 감정이 주체가 안되고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 잠깐 산책을 나가자고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표정이 좋지 않다며 걱정하는 남편에게 아까 아버님이 내뱉으신 단어와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고, 남편은 본인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며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남편 말대로 아버님이 그 뜻을 정확히 모르고 쓰셨겠지?' 생각하고 30분을 바람 쐬며 걷다가 다시 시가집으로 들어갔다.


시부모님은 여전히 대화중이셨고 아무렇지 않은 두 분의 얼굴을 뵈니, 혼자 속상한 나만 바보 되는 기분에 화가 나면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눈치를 주고 식탁에 앉았다.



[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까 아버님이 하신 말씀 중에 씨받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신 거예요?
[시아버지] 뭐? 여자가 아기 낳는 몸이니 말 그대로 표현한 건데 또 뭐가?
[나] 그건 대리모를 상스럽게 표현한 거잖아요! 누가 며느리한테 그런 표현을 쓰나요?



그 뒤로도 시아버지는 괜한 걸로 또 예민하게 굴면서 "대체 집안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냐!"며 소리치셨고, 그 말에 제대로 화난(?) 나는 집에 가겠다며 짐을 챙기러 방으로 들어갔다.


사태가 심각해진 걸 느낀 시어머니가 시아버지를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고 짐을 챙겨 나온 나를 붙잡으셨다.

시아버지가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사용한 거라고. 미안하다고. 시아버지도 본인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기분 푸라고 하시고 남편은 울기 직전이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 아버님, 앞으로는 말씀 조심해주세요. 그리고 가정교육 어떻게 받아야 이런 식의 저희 부모님 욕하는 말씀 다시는 하지 마세요.
[시아버지]... 그래, 알았다.





그 뒤로는 씨받이 같은 극단적인 단어 사용은 없없지만, 묘하게 기분 상하는 말씀은 여전했고 나도 지지(?) 않았다. 특히 시부모님들은 왜 그렇게 며느리의 전화를 기다리는지 (어차피 전화해도 남편 얘기하실 거면서), 통화를 해도 불편하고 안 해도 불편한 이 상황을 종료시키기로 했다.





< EP 1 > 살아는 있는지 생사확인하시며 왜 전화가 없는지 타박하는 시어머니의 전화.

[나] 어머니, 저도 평일에는 오빠랑 똑같이 일하고 정신없어요
[시어머니] 남편이랑 며느리가 같니? 블라블라....
[나] 어머니, 저를 손님처럼 대해주세요.


[시어머니] 뭐?? 얘!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나]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오빠는 저희 집에서 대접받고 좋은 소리만 들으니, 저도 백년손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 손님 대접은 받고 싶어요.


버럭 소리 지르는 시어머니에게 이건 남의 자식을 들이신 부모님끼리 대화하실 문제인 것 같다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시어머니와 대신 싸워(?) 달라함... (엄마 미안) 나도 우리 엄마한테 소중한 딸이라는 걸 인식시켜드리고도 싶었다.




< EP 2 > 여러 사건들로 많이 누그러진 시어머니는 본인한테 전화하는 게 많이 힘드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우리 부모님 하고도 통화 잘 안 한다 불편하다 말씀드렸다.


[시어머니].... 그래.. 그럼 많이는 안 바라고 한 달에 1번 정도 안부인사만 하고 명절 2~3일 전에 엄마(시어머니)가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한다고 네가 전화 1통 해줘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나] 명절 전날 가기 전에 말고 3일 전에요?
[시어머니] 응.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하시네요~이런 며느리 말 한 번 듣고 싶다.
[나]... 네;


명절 D-3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어머니] 어머, 이게 누구야? 네가 웬일로 전화를 다했니?
[나] 어머니가 전화하라면서요^^
[시어머니]???? 아이고.... 며느님....




< EP3 > 남편 밥은 잘 먹이고 있냐는 시어머니의 전화


[시어머니] 아이고, 이러다가 우리 아들 영양실조 걸릴까 봐 걱정이다!
[나] 네? ㅋㅋㅋㅋ 어머니! 어머니 아들이 영양실조 걸릴 몸으로 보이세요? ㅋㅋㅋㅋㅋㅋ
[시어머니].... 아니... 그럴 수도 있잖니..
[나] 어머니 아들이 저랑 키는 비슷한데 몸무게는 20KG 넘게 더 나가요 ㅋㅋㅋㅋ 아주 잘 먹고 다니니 그런 걱정 마세요 ㅋㅋㅋㅋㅋㅋ 오빠 살 빼야 되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ㅋㅋㅋㅋ





그 뒤로 '얘가 제정신인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 반응을 몇 번 더 보여드리니 더 이상 나의 전화를 기대하지 않으시게 되었다. 그리고 몇 번의 불편한 상황(=시부모님과 나의 싸움?)을 겪은 후 드디어 시부모님의 나에 대한 기대는 바닥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시아버지는 '며느리는 보아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나에게 등기로 보내오셨다.


'... 우리는 너희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란다. 앞으로 너희 부부간에 다툼이 발생할 수 있는 언행은 부모로서 절대 하지 않겠다. 이제는 과거에 맺혀있던 응어리를 모두 풀고 새롭게 시작하자'



제실과 제사는 참석하지 않아도 되며 명절은 간소화되었다.

명절 당일 친척들은 오지 않고 우리 4 가족만(시누는 결혼함) 편하게 보내고 저녁은 사서 먹기로 했다.

이 부분은 명절에 혼자 고생하시는 시어머니를 위함도 있었지만, 더 이상 친척들에게 며느리에 대해 왈가왈부 들으며 기분이 상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으신듯했다.






3년 정도의 투쟁(?) 끝에 나는 며느라기에서 해방되었다.


시부모님은 살아오시는 동안 자연스럽게 박힌 며느리의 이미지가 있고, 장손 며느리이니 더욱 바라는 게 많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그렇게 살 수 없는 여자였다. 페미니스트까지는 아니지만 딸 부잣집에서 태어나 보통의 여자들보다 남녀차별에 더 예민한 편이고, 내 권리를 지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몇 년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았으니, 이제는 거의 남처럼 지내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다.


나는 결국은 아들 부부를 위해 한 발 물러나 주신 시부모님께 오히려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 진심으로 잘해드리고 싶어졌다. 자발적으로 전화도 드리고 예전에는 예민하게 반응했을 단어나 말씀에도 웃으며 "그건 아니죠~^^" 얘기하고 넘길 수 있는 심리적인 친밀감이 생겼다.


그리고 (기대치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있겠지만) 내 행동이 변하니 시부모님은 더 나를 배려해주시고 예뻐해 주셨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기 시작하니 말 한마디에 날 세우지 않아도 되고 남편을 사랑하는 만큼 더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자발적으로 생겼다.





유독 한국에서 심한 시댁과 며느리의 갈등이 어쩔 수 없는 관습이라거나, 개인의 인성문제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을 하는 이도 있지만 솔직히 결혼을 한 부부에게 물어봤을 때 최소한 가정 내에서 사위와 며느리가 받는 대우는 옛날 우리 엄마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사회에서 은연중에 보여주는 사위와 며느리의 이미지와 차별적인 호칭부터 변화가 필요하다. 옛날 구닥다리 아침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싹싹하고 순종적인 며느리 말고, <며느라기> 같은 콘텐츠(불편할 수도 있지만 변화가 필요한 상황을 드러낸)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무리 나이를 덜 먹은 며느리가 유연한 사고로 시부모님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 노력해도 개인 혼자 노력하기에 너무 오래되고 썩어빠진 가정 내 유교문화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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