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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버 Oct 08. 2022

빨간 립스틱의 며느리


우리 시부모님은 경상도에서도 아주 보수적인 집안의 장남, 장녀로 태어나 나이 드셔서도 본인의 늙은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특히 할머니를 먼저 떠나보내고 갑자기 실명한 시할아버지의 온갖 수발을 10년 가까이 들며 불만 한마디 없으신 게 우리 시어머니셨다.


멀쩡하던 사람이 퇴직 후 노년을 즐길 시기에 갑자기 실명이 되었으니, 원래도 가부장적이고 까탈스럽던 성격이라던 시할아버지는 더욱 예민해져 시어머니가 많이 힘드셨다고 들었다.


눈을 감으면 작은 소리도 더 잘 들리듯, 시력을 잃은 시할아버지는 미각이 더 예민해지면서 시어머니는 매일 새벽 수산시장에서 신선한 생선을 구해다가 갓 지은 밥을 해 드려야 했다.







이런 분들에게 나 같은(?) 며느리가 들어온 것이다.


시어머니는 몸은 힘들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안하다고 하셨다. 아프신 부모님을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장남이라 한들 여러 자식들 중 혼자 책임을 떠안는 게 형제간에, 그리고 내 부모에게 전혀 서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물며 시어머니는 며느리인데 아무 대가 없는 희생이 있을 수 있을까? 


부모를 모시는 것에 대가라는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시어머니가 한 번씩 얘기하는 시월드(?)의 서운함에 대한 에피소드는, 남편 어린 시절 집 장만에 부족한 금액을 도움 요청했을 때 딱 잘라 거절했다던 금전적인 부분이었다(당시에 할머니는 집에 일꾼도 있고 금전적으로 꽤 넉넉하셨고, 막내 삼촌에게는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런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결혼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결혼식 피로연 때 딱 한 번 뵀던 남편의 할아버지. 눈이 안 보이지만 '네가 우리 손주며느리구나' 하며 손을 잡아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급하게 휴가를 내고 남편과 도착한 장례식장은 언제 가도 참 적응이 안 되는 느낌..


장손인 남편은 손님맞이를 해야 하니 나는 약간은 뻘쭘한 상황이 되었다. 시어머니 말대로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마음이 편한 상황이랄까?



까만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고 열심히 육개장을 날랐다. 가끔씩 시어머니가 결혼식 때 뵜다며 낯선 친척분들을 소개해주시면 잠시 앉았다가도 금세 일어나 정말 열심히 날랐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어색한 상황에 몸을 움직인 것도 있지만 약간은 죄책감 비슷한 게 있었던듯하다.



'장손이라고 남편 초등학생 시절부터 본인과 함께 묻힐 묫자리까지 봐 두었다는 분을 나 때문에 자주 못 뵌 건 아닐까?

내가 초반에 시부모님과 자주 불화가 있어 남편이 차마 할아버지 뵈러 가자는 말을 하지 못한 건 아닐까?'







툭툭-

"클로버, 잠깐 이리 오렴.."

시어머니가 갑자기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들고 다니던 쟁반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따라 짐을 보관해 놓은 방으로 들어가니 어머님이 어색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시어머니] 고생이 많지? 좀 쉬엄쉬엄해~ 허리 아프면 방에서 쉬기도 하고~
[나] 아~네 감사합니다. 어머니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시어머니] 그게.. 너 입술이 좀 빨갛다고.... 숙모들이 자꾸 얘기를 하네... 엄마는 괜찮은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큰집이고 손님이 많이 오시다 보니.. 이해하지?
[나] 아..


이틀 정도는 세안 못할 걸 예상하고 선크림도 안 바르고 갔다. 원체 입술색이 없던 나는 립스틱을 바르긴 했지만 장례식장에서 쌩얼에 빨갛게 립스틱을 바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결국 누디하다 못해 병약해 보이는(?) 입술색을 만들고 나서야 다시 쟁반을 잡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바라는 며느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 걸까?



결혼식장에서는 너무 밝은 신부보다 적당히 눈물을 흘리며 슬퍼 보이는 신부가 예뻐 보이고, 장례식장에서는 곧 쓰러질 것처럼 병약해 보이지만 열심히 음식을 나르는 모습이 예뻐 보이는 걸까?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남자들은 앉아서 술을 마시고, 시어머니를 포함한 숙모와 고모들도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계신다. 아이가 있는 집은 부부가 아이를 돌보고, 손녀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대화하기 바쁘다. 일하느라 바쁜 건 도우미 직원분과 나 그리고 남편의 사촌 여동생뿐이었다.


젊고 손님이 없는 사람이 일을 하는 게 맞지만...


왜 대화 주제가 내 립스틱 색깔이 되었을까?

얼굴 한번 본 여자가 무보수로 대신 일해주면 고마운 걸 넘어 땡잡은 거 아닌가??


일하는 직원 아주머니 립스틱 색깔보다 내 입술색이 더 거슬렸나? 돈 주고 고용한 직원한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을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다 같이 고생했다며 근처 유명한 식당으로 밥을 먹고 헤어지자고 하셨다.

하필 그 집은 내가 못 먹는 음식 전문점이었고 나는 조용히 시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사이드 메뉴를 주문했다.



왜 그거 먹어? 왜 이 맛있는 걸 못 먹어?


계속 묻던 친척분들 중 한 분은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까지 그놈의 왜 못 먹어 타령을 시전 했다.



[친척분] 나도 시집오기 전까지 그거 못 먹었잖아~그거 뭐지? 아 탕국! 근데 이제 먹어~ 너 그거 아직도 안 먹지?
[나] 네
[친척분] 이제 너도 먹어 버릇해봐~ 몇 년 되면 적응되더라~
[나] 저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인지 입맛은 안 바뀌더라고요


못 참은 건지 안 참은 건지 말이 나와버렸다. 잠깐 분위기가 싸해졌던 것 같은데 시아버지의 얼른얼른 집에들 가자~라는 소리에 다들 흩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말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는다.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데 말 한마디로 빚을 지기도 하고 갚기도 하니 이 얼마나 유용하면서 위험한 혓바닥인지.


나도 말을 예쁘게 하는 편이 못되지만 나를 편하게 생각했기에 시가 식구들이 나에게 했었을 말들을 통해 느낀 점도 참 많다. 남편과 시부모님은 이틀 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며 결혼하고 처음으로 나에게 진심으로 칭찬해주셨는데 숙모에게 했던 말을 들으셨으면 칭찬도 반감되었겠지?



나를 위해 날 선 말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의 이익을 위해 빚을 지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하니 말이라는 게 참 어렵다.


물고기는 언제나 입으로 낚인다.
인간도 역시 입으로 걸린다.
-탈무드-



ps. 말을 아끼기 위해 그림 연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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