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하고 아름다운 육지 속 섬마을.

강원도 화천 비수구미~파로호~평화의 댐 트레킹.

by 박상준


갑작스런 고백처럼 가을이 찾아왔다.

여름 내내 괴롭혔던 폭염은 우리 곁에서 슬며시 사라졌다.

적어도 강원도 화천의 척박하고 아름다운 땅, 비수구미(秘水九美/신비한 물이 만든 아홉 가지 아름다움)에선 그렇다.

비수구미의 들머리인 해산령을 찾아가는 길에서 '절기의 힘'을 새삼스레 절감했다.

말복도, 처서도 지난 8월 말은 가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시기다.

해발 700m인 해산령은 관광버스 차창 너머로 구름이 손에 잡힐 듯한 고지대다. 관광버스가 좁고 구불구불한 고개를 힘겹게 넘어 해오름 쉼터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여름의 열기가 아니라 서늘하고 신선한 바람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산뜻하고 상쾌하고 평온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기분 그대로 간직한 채 청정계곡을 따라 태고의 빽빽한 숲 터널 사이로 들어섰다. 비수구미라고 불리는 곳이다.



비수구미 계곡은 십리가 넘도록 파로호(破虜湖)를 향해 흐른다. 고요하면서도 시끌벅적한 계곡이다. 문명의 소음이 차단된 숲에는 물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등 자연의 소리가 화음(和音)처럼 들린다.

물을 그냥 떠 마셔도 될 만큼 맑은 청정계곡엔 1 급수에서만 산다는 열목어, 기름종개, 산 메기, 산천어등이 물속을 휘젓고 다닌다. 임도 주변엔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자작나무가 우거지고 깊은 산속엔 송이버섯과 약초, 더덕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생명력 있는 땅이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에겐 귀한 먹 거리를 언제든 아낌없이 내줄 수 있는 자연의 보물 창고다. 그리고 나그네에겐 이 길은 마음을 비우고 생명의 기운을 채우는 길이다.

임도를 따라 자갈길이 계곡과 어깨동무하고 고개 아래로 이어져 있다.

해발 700m의 고지대에서 호수를 향해 그저 묵묵히 걸어내려가면 된다.

사부작사부작 마을을 향해 걸어가다가 너른 바위가 있는 계곡에서 탁족(濯足)을 하며 잠시 자연에 취할 수도 있다.


<비수구미 마을 민박집에 마당에 핀 메리골드와 줄 점 팔랑나비>


길은 비수구미 마을부터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해산령에서 우렁차게 쏟아지며 내려온 계곡수는 마을 한가운데를 가르 지른 뒤 파로호에 수렴된다. 이후부터 임도는 끝나고 산허리 벼랑길로 이어진다.

나그네는 도시락을 싸오지 않는 한 주로 이 마을 이장네 민박집(이라고 하지만 거의 기업형 식당)에서 나물과 반찬이 풍성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게 된다.

'육지 속의 섬' 비수구미 마을에서 대처의 식당은 너무 멀다. 그래서 점심때의 민박집은 잔치집처럼 한적한 오지마을에서 가장 활기차고 이질적인 분위기다.

호수 쪽 마을 끝에 걸려있는 출렁다리를 건너면 산비탈 테크 길과 오솔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출렁다리 옆에는 마을 주민들이 자가용처럼 이용하는 모터보트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작은 유람선이 정박된 작은 나루터가 보인다.

비탈 아래엔 파로호가 넘실대는데 마치 누군가 실수로 잉크를 엎질러 놓은 듯 온통 파랗다. 이 길은 파로호를 내려다보며 걷는 벼랑길이다.

초록이 우거진 숲과 파란빛으로 출렁이는 호수, 그리고 조붓한 길은 파로호 정경을 농밀하게 보여준다.


<비수구미 마을 민박집 항아리 풍경>


파로호는 6.25 전쟁 때 국군이 중공군과 북한군을 섬멸한 격전지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역사는 오래전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신 '다크투어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화천의 소중한 관광자원으로 거듭났다. 호수 한가운데 하얀색 포말을 일으키며 쏜살 같이 달리는 모터보트와 유람선 풍경은 지극히 평화롭다.

이곳에서 휴전선은 불과 13km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그네는 물론이거니와 마을 주민들조차 긴장 대신 여유로운 표정이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막을 내린 지 고작 60여 년 밖에 안됐지만 전쟁의 상흔(傷痕)은 사람들의 뇌리에 사라진 듯하다.



(파로호 호반길은 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이 길의 마지막 테마길은 파로호 호반길이다. 숲 벼랑길에서 내려오면 막바로 호숫가 흙길이 평화의 댐까지 어어져 있다. 좌측에는 거대한 절벽이, 우측에는 호수가 펼쳐졌다.

아기자기한 경관을 가진 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호수 쪽으로 시야가 확트였다. 이 길은 2002년 평화의 댐 보강공사를 하면서 화천댐 물을 빼는 바람에 파로호가 바닥을 드러내자 비수구미 주민들을 위해 비상수단으로 만든 임시도로다.

목적지인 수하리 나루 입구에서 양구 방면으로 1.2km 정도 걸으면 평화의 댐으로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한명희가 지은 시에 장일남이 곡을 붙인 가곡 '비목(碑木)'의 사연을 담은 비목공원이 나온다. 우리는 트레킹을 마친 뒤 수하리에서 버스를 타고 평화의 댐으로 이동했다.

<평화의 댐 전경>


비수구미^파로호 트레킹은 옴니버스 영화를 한편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길이다. 옴니버스는 몇 개의 단편영화를 하나로 이어 붙인 작품이다. 이 길도 그러하다.

해산령에서 비수구미 마을로 내려오는 6km의 임도는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마을 이장댁에서 점심을 먹고 출렁다리를 건너면 나무가 울창한 비탈길을 파로호를 굽어보며 걷게 된다. 그리고 비탈길을 벗어나면 평탄한 호반길이 기다린다.

이처럼 전혀 다른 풍경을 가진 길을 걸으면 10km나 되는 거리가 짧게 느껴진다

옴니버스 영화처럼 다채롭고 수더분하며 소소한 매력을 가진 길,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걸은 비수구미^파로호길은 그런 길이다.



*코스 / 해오름 쉼터~해산령~비수구미 마을~출렁다리~숲길~ 파로호 호반길 종착지(10km)


*tip/ 이 길은 마지막 구간인 호반길에 그늘이 없어서 여름보다 늦봄이나 초가을에 걷기 좋은 길이다. 트레킹 끝나는 지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평화의 댐이 있다. 점심은 도시락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마을 이장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먹어야 한다. 산채정식(15000원)은 가성비가 낮아서 주로 산채비빔밥(개인 1만 원, 단체 8000원)을 먹는데 나물이 다양하고 풍성해 반응이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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