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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Jan 06. 2022

먹고 산다는 것과 음식이 주는 위로

나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

  배우 최불암은 한국인의 밥상을 10년 넘게 진행하면서 전국의 온갖 음식을 맛보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어머니가 궁핍한 식재료를 갖고 지혜를 짜내 만든 가난한 밥상이라고 밝혔다. 또한 밥은 생명이자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나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다. 어느 날은 대충 끼니를 때우기도 했고, 어느 날은 좋은 사람들과 풍성한 요리를 즐기기도 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음식에 대한 태도와 마음이 달랐던 것 같다. 


  미식가도 아니고, 위도 작고 음식 먹는 속도도 현저히 느려서 음식에 그다지 관심도 없는 편이었다. 특히 바쁠 때는 한 끼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뛰기 일쑤였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먹는 것보다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좋아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렀을 때, 볼거리가 많으면 기꺼이 먹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남이 먹는 먹방을 보고, 미식가들이 오로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여행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때로는 먹는 것이 더없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자 생명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지 않다고 여긴 적도 있다. 특히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할 때에는 밥 대신 간단하게 복용할 수 있는 알약이 빨리 개발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혼밥을 먹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이 삶의 소소한 행복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 약속을 잡은 날에는 출근 때부터 저녁 시간을 기다리며 팍팍한 하루를 견디기도 했다. 농담처럼 흔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일단 맛있게 먹자."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하게 가슴으로 느껴졌다. 


  요즘에는 먹는다는 것이 생명의 젖줄을 부여잡는 숭고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힘든 날에는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먹는 것도 다 싫고 귀찮았다. 피폐한 내면의 상태도 모른 채 야속하게 배 속에서 보내는 신호는, 네가 어떻든 나는 내 할 일을 한다는 신념을 가진 무뚝뚝한 상관의 지시처럼 느껴졌다.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나면 신기하게도 식욕이 다시 올라온다. 식욕은 탐욕스럽고 추한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다. 머리를 질끈 묶고 깨끗하게 손을 씻는다. 채소를 다듬고 가지런히 칼로 썬다. 후라이팬에 순서대로 재료를 볶고 양념을 한다. 이토록 번거로운 요리 과정만큼이나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솟아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긴 시간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위해 뚝딱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삶에 대한 의욕이 더욱 굳건해지도록 나를 위한 한 끼를 정성껏 만든다. 먹고 산다는 것은 숭고한 일상을 영위하는 일이다.


  이제 음식은 나에게 가장 따뜻한 위로이다. 내가 나를 위해 만든 소중한 한끼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건넨 모든 음식이 위안이고, 나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일부러 불러내서 밥을 먹자고 하고 가끔 집으로 불러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집밥을 주는 H언니, 한 시간도 넘는 거리를 달려와 맛있는 밥을 사 주고 간 DK,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싶다며 집으로 초대해 오삼불고기를 해 준 YS, 정성껏 만든 호두 파이와 과일을 예쁘게 포장해서 건네 준 K 등등...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건네 준 음식을 통해 빈 속을 채워주는 위로가 얼마나 따스하고 큰 힘을 주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음식이 주는 위로는 그동안 음악을 통해 얻었던 위로와는 다른 결의 위로로 다가왔다. 음악이 주는 위로가 평안함이라면, 음식이 주는 위로는 든든함이다. 오늘 저녁은 나를 위해 온갖 채소와 어묵을 넣은 잡채를 정성껏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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