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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Jan 13. 2022

내 마음의 고향, 큰고모네 '뽀르스'

그 시큼하고 달콤하며 떫떠름한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며

  내 마음 속 고향은 어렸을 적 살았던 우리 집이 아니다. 우리 집 바로 옆 동네에 있는 큰고모네 집이다. 주말이 되면 늘 고모네 집으로 갔다. 내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고 떡볶이를 만들어주는 언니들도 있고, 푸근한 고모의 내음이 곳곳에 묻어있는 고모네 집은 지극히 편안했고, 그 곳에서 나는 정서적인 안정을 느꼈다.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마당을 들어서면, 소박하지만 깔끔하게 새로 지은 집이 포근한 방석처럼 사람들을 맞이해 준다. 미닫이로 된 문은 도어락도 없어 지나가던 동네사람들이 언제라도 들어와서 거실마루에 앉아있게 하여 고모네 집은 늘 사람들이 북적이는 열린 사랑방이었다.


  고모네집 장독대 옆에서부터 뒤뜰까지 철마다 탐스럽게 열리는 다양한 아름드리 과실수가 부드럽게 집을 감싸안고 있었다. 많은 과실나무 중에 특별히 그리워했던 이 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우리는 그 나무의 열매를 '뽀르스'라고 불렀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는 뽀르스 나무 가지마다 선홍빛의 열매가 탐스럽게 열렸다.  


  깨금발로 손에 닿을 수 있는 나뭇가지까지 힘껏 팔을 뻗쳐 주황색 바가지에 열매를 가득 땄다. 앵두보다 약간 길다란 타원형의 붉은 열매를 입안에 넣으면 새콤달콤한 맛이 톡톡 튀어 상큼하면서도 떫은 뒷맛이 혀를 아리게 했다. 한 자리에 앉아 순식간에 바가지에 씻어 놓은 열매를 다 먹어치우는 나를 보며 고모는 "어이구, 그 시큼한 것을 참말로 잘도 먹네."라고 말하며 신기하게 쳐다보곤 하셨다.


  성인이 되고 나서 고모네 집에서 따 먹었던 앵두, 자두, 살구, 감 등은 모두 마트에서 사 먹을 수 있었는데, '뽀르스'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충청도에서만 사용한 사투리였는지 인터넷에 찾아봐도 '뽀르스'라는 과일 자체가 없었다. 마트에서 팔지도 않는 그 과일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임산부가 제철이 아닌 귀한 과일을 열망하는 심정같다고나 할까.


  한참 뒤에야 그 열매가 '보리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리수'가 어쩌다가 프랑스어 느낌의 '뽀르스'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원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보리수를 파는 마트가 없어서 쉽게 사 먹을 수도 없었다. 몇 년 전에는 그 맛이 너무 그리워서 아주 오랜만에 고모에게 전화를 해서 뽀르스의 안부를 물었다.

  

  "그 나무 몇 년 전에 베어버렸는디..."

  "아니, 왜요? 그거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이구, 네가 고모네 집에 왔던 게 언제적 일인지 알고나 그런 소리를 허냐?"

  "아니, 그래두... 내가 꼭 가서 먹으려고 했는데..."  

  "그거 시큼해서 누가 먹간디... 나무가 하도 커서 가지가 지붕을 덮을 것 같아서 베어버린 겨. 언제 한 번 댕겨 가. 와서 김치나 갖구 가."


  몇달 전 혼자 떠난 통영 여행에서 묵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보리수 나무를 발견했다. 사장님이 마음 껏 따 먹어도 좋다고 한 보리수 나무엔 열매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깨금발을 하고 어린 시절보다 더 간절한 손길을 뻗어 겨우 보리수 열매 몇 개를 손에 넣었다.


  그토록 애타게 먹고 싶었던 고향의 맛을 드디어 맛볼 수 있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보리수 열매를 입 안에 넣고 음미했다. 새콤달콤 떫떠름한 맛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내 혀가 기억하는 상큼달콤하고 마법처럼 변화무쌍한 맛을 선사했던 어린 시절에 먹었던 그 추억의 맛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그 맛을 결국 어디에서도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 같아 헛헛했다.


  아주 가끔씩 꿈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처럼 고모네 집에서 해맑게 놀곤 한다. 얼마 전에도 꿈에서 나는 큰 고모네 집에 있었다. 그날, 아주 오랜만에 고모네 둘째딸인 MH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시골에 언제 가는지 물으니, 마침 그 주말에 김장하러 서울에 사는 고모네 오남매가 모두 시골에 내려간다고 했다. 다른 일들로 인해 함께 내려가지는 못하고, 대신 고모네 집으로 그 주말 쯤에 도착하도록 사과 한 상자를 택배로 보냈다. 택배를 받은 후 MH 언니가 전화를 해서 고모를 바꿔 주었다.


  "이런 건 뭐더러 보냈다냐?"

  "그냥 고모 생각나서요. 언니 오빠들이랑 맛있게 드세요."

  "김장 김치 보내줄테니 MH한테 주소 불러줘라."

  "고모, 택배는 됐구요. 고모네 집에 제가 한 번 들를게요. 그때 주세요."

  "바쁜데 언제 온다고 그랴. 택배로 부칠게."

  "진짜 갈게요. 안 그래도 자꾸 고모네 집이 생각나서요. 조만간에 꼭 갈게요."

  "그럼 꼭 와라, 잉! 김치 다 쉬어 버리기 전에."    


  봄이 오기 전에 고모네 집에 가야겠다. 김치통 하나와 제철 과일 한 상자를 들고서. 고모네 집에 가면, 뽀르스는 먹지 못해도, 내 마음 속 서늘한 허기가 푸근한 고모표 열매들로 가득 채워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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