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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이호이 Aug 06. 2021

과학으로 세상 다시보기- 양자역학

비전공자가 마음대로 쓰는 과학으로 일상해석하기

-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이 나오지 않으니 너무 두려운 마음으로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 -


뛰어난 과학자가 대중을 이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하는 많은 책들은 과학의 언어를 열심히 풀어서 대중의 언어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훌륭한 과학대중서는 잘 만들어진 사전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마지막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영역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고 뛰어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언어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과학대중서의 마지막에는 보통 짤막하게 과학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는데 할애한다. 문제는 과학을 이야기할 때만큼의 세상을 이야기할 때 끈질김과 독특한 발상의 전환이 빛나는 책을 찾는 건 쉽지 않은 듯하다.


물론 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시도에는 과학자들이 과학을 발전시킬 때 나오는 습관들 - 어떤 영역에서의 과학이 다른 영역의 과학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 지독하리만큼 의심하고 검증하는 버릇 -을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고찰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늘 단편적으로 한 문단에 마무리되어버린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이왕 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게 과학에서 용인하기 어려운 많은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면 한계를 인정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번 글은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우선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경고문구를 넣어야 할 것 같다. 나의 물리 실력은 형편없고 지금의 나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조금이나마 구체적으로 이해해보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으며 미분방정식을 공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전공자나 양자역학을 잘 아시는 분들은 댓글로 무엇이 틀렸는지 가감 없이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비전공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양자역학은 믿음의 영역에 있다. 갈릴레이에서 뉴턴으로 시작하는 고전물리의 세계는 그나마 상상의 영역 내에 있다. 지구의 물리와 우주의 물리가 같은 수식으로 작성되어 있고 질량이 있는 것끼리 서로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은 늘 침대에 누워있고 싶은 나의 본능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자기에서 장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조금씩 헷갈리기 시작하는 감각은 아인슈타인에서 공간과 시간을 합쳐버림으로써 큰 도전을 받지만 스스로를 억지로 달래가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문제는 양자역학에서 출발한다. 눈에 볼 수 없는 이 미시적인 세계는 어떻게 된 건지 관찰하기 전에는 확률 구름 속으로 사라져 있다가 관찰할 때만 나타나는 물질들이 존재하는 믿을 수 없는 세계이다. 이 학문은 발견되는 현상들을 가장 잘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이론이지 인간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전혀 타협하지 않은 채 인간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세상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는 교훈까지 건네주는 학문이다. 그런 입장에서 양자역학은 현상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일부 물리학자를 제외하면 믿음의 영역이지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당연하게도 양자역학의 세계는 살면서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세상이다. 인간의 지각을 벗어나는데 것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두뇌는 뛰어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조금은 다른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에서는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이 있으실 수 있으니 얄팍한 지식으로라도 말씀드려야겠다. 전자와 같은 정말 작은 세상에서는 우리가 큰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일들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전자를 쏠 수 있는 총과 아래 위로 구멍이 뚫린 종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생각할 때 종이를 향해 총을 쏘면 종이 너머의 벽에 두 점이 찍힐 거라고 당연히 상상한다. 우리가 실제 총을 쏠 때 구멍이 두 개가 있다면 당연히 총알은 그 구멍을 통해서만 통과하여 뒤의 벽에 도달하기 때문에 두 점으로 찍힐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관찰하면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구멍을 통과하여 찍힐 수 없는 다양한 위치에서 전자가 관찰된다. 더 환장하는 것이 우리가 카메라를 찍는 것처럼 구멍을 지나갈 때 전자를 사진으로 찍게 되면 그 순간부터 전자는 구멍 너머의 두 점으로 벽에 찍히게 된다.

그 뒤로도 양자역학의 탄생에는 긴 이야기가 있지만 결론으로 넘어와서 이야기하면 전자처럼 작은 물질들은 관찰되기 전에는 사라진 상태로 있다가 관찰하는 순간 한 위치로 나타난다. 다만 어느 위치에 있을지 확률을 구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반박한 것이다. 위치가 확률로 존재한다. 인간의 지각을 아득히 뛰어넘은 해석이다.

거기에 더해서 중요한 해석이 하나 더 있다.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가 물질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물체를 볼 때 원리를 보면 빛의 입자인 광자가 물체와 부딪히고 부딪힌 광자가 우리 눈으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물체의 위치를 알게 되는데 전자는 정말 작고 가볍기 때문에 광자에 부딪히는 사건 자체로 위치가 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관찰하는 위치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본래 위치가 아니다. 이런 의미로 어떤 방식을 사용해도 물질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물리 값의 최솟값이 존재한다는 등등 흥미로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오늘 필요한 내용은 여기까지이다. 더 궁금하신 독자들은 양자역학에 관한 대중서를 찾아 읽어보시길 바란다.

 

이렇게 양자역학에 대해 얄팍한 지식을 쌓아 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물질의 본질이란 걸 알 수 없다면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오늘의 유사과학은 이 관점에서 출발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관찰을 통해 어떤 물질의 위치를 측정한다. 많이 관찰할수록 위치의 오차범위가 줄어들지만 우리는 어느 위치에 존재한다고 한 점을 찍을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측정한 값들을 나열하여 계산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관찰 값뿐이라면 인간의 인지 영역에서는 그 관찰값이 곧 본질이지 않을까. 더 나아가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적용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스스로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주위 사람들이 너를 평가하는 것에 휘둘리면 안 되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야 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관점으로 볼 때 상대방이 바라보는 나와 내가 바라보는 나는 모두 같은 힘을 가진 측정값이다. 다른 사람의 관점보다 내 관점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기에는 다른 사람이 나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줄 때 몰랐던 나의 모습을 찾기도 하지 않은가. 이처럼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나와 내가 바라보는 나는 모두 나를 설명해주는 관찰값이자 어쩌면 본질인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바라보는 내가 더 정확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증거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은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


먼저 타인에게 휘둘려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이렇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모습을 자주 그리고 최대한 영향을 적게 주는 방향으로 나를 바라봐주어야 한다. 상대방이 나를 평가하는 것처럼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내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를 많이 바라봐줘야 하는 것이다. 자주 관찰해야 오차도 줄고 많이 반영될 것이다. 더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은 잘못된 측정값을 준다.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부 사람들, 타인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바라보는 내가 중요한 측정값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 본인의 생각이 정답인 것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도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같은 측정값임을, 즉 본인임을 알 필요가 있다. 그걸 알게 되면 태도나 행동을 바꾸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일상을 보내다 보면 스스로가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순간 이런 관점은 내가 해야 할 방법을 알려준다. 내가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면 그 시선 자체가 곧 나이다. 그것은 나의 본질을 숨기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값인 측정값을 도출해내는 것뿐이다. 긍정적인 값으로 도출해낸다면 그것이 곧 나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스스로가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나면 그다음 수순은 주위 소중한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는 독자분들은 따뜻한 사람이다. 난잡하고 엉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졌음이 확실하다. 내가 독자들을 따뜻하게 바라보았고 독자들의 관찰값을 도출해냈다. 내가 관찰하기 전의 독자분들은 내가 관찰한 덕분에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주위에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길 바란다. 어쩌면 그런 시선이 그 사람을 정말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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