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유리 19화

살아난 유리 조각 #19

by Cruel Ella

몇 달 후, 강원 북부 교소도.


이른 아침부터 유리는 교도소에 와 있다. 하늘 끝에 닿을 것 같은 높다란 벽을 올려다본 후 한 숨을 내쉰다. 요즘 유리의 모든 일상은 도전의 연속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새롭게 변화되는 모습에 적응해야 한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곳을 찾은 유리는 면회를 신청한다. 그동안 두세 번의 면회 신청을 했었는데 거절당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면회가 받아들여졌나 보다. 그 어렵고 무거운 철문이 열린다. 마음먹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긴장된 얼굴을 감출 길이 없다. 시멘트 벽 사이로 한기가 내뿜어지는 복도를 걷다 보면 보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은 문이 나온다. 유리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두리번거린다. 어둑한 조명 아래로 몸을 내어가니 창살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오랜 정적. 그리고 그들만의 무언의 원망. 견딜 수 없어서가 아니라 견뎌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 분위기를 깬 건 유리였다.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세요?"


"..."


"아빠 장례는 잘 치렀어요. 집도 정리됐고요."


"..."


각오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대면하고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목소리는 내고 있는데 무얼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유리는 불안한 자신의 자세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더욱 큰 소리를 내어본다. 바닥으로 치닫는 목소리는 그저 허공에 메아리처럼 울리겠지만 그 메아리라도 희미하게 들린다면 꼭 의미가 없는 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리는 머릿속으로 정리해 놓았던 보따리를 하나씩 풀어내 본다. 분명 순서가 엉망이었을 테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그저 표현됐다는 것만으로 스스로를 기특하다 여길 거니까.


"그 사람이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여러 가지로. 그래서 외롭지 않게 잘 지내요. 저... 이제 발레는 안 할 거예요. 엄마가 원하는 만큼은 애써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발레에 미련이 없어요. 그래서 요즘 새로운 걸 해보려고 해요. 다른 걸 배워보려고요."


"... 넌 계속 발레를 했어야 했어. 네가 갖고 태어난 재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거였다."


"음... 꽃을 공부해볼까 해요. 그래서 플로리스트 교육 과정을 알아보고 있어요. 남들보다 늦었고, 시간은 좀 더 걸릴 수도 있지만... 도전한다는 게 중요하니까."


"..."


"엄마를 용서한 건 아니에요, 그래도... 친자식도 아닌 절...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용서. 누가 누굴 용서하며 어떤 짓을 했길래 용서가 필요한 일이 되어버린 걸까.


아직 눈을 마주 보며 말할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유리 스스로 다독이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 잘한 일이다 싶다. 아직은 엄마의 눈빛과 자신을 대하는 말투까지 집어삼킬 소화력을 장착하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애를 쓴다. 노력한 만큼 표현되었으면 된 거라고, 영진이 그랬었다. 이런 건 속도전이 아니라고.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갔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 그게 하루가 걸리든, 한 달이 걸리든 그저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거라면 그 진실만 가지고 살면 되는 거라고 했다.


"뻔뻔하구나,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진심이에요, 감사한 마음은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보기 싫다, 가거라."


"다.. 다음에 또 올게요. 자꾸 보다 보면 언젠가 엄마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지도 몰라요. 전 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애써 볼 거예요.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남편과 아빠를 허무하게 떠나보냈어요. 엄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엄마도 절 위해 할 수 있는 걸 해주세요."


"건방지긴!"


유리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차오르는 눈물을 닦을 용기도 없다.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유리를 두고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 유리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은 면회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 진심인 말들을 뱉어놓고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속에 묵혀두고 끙끙 앓는 예전의 자신과 비교해보면 전보다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내 것을 토해내고 보면 그다지 위험할 것도 없었다. 아직 눈을 마주치진 못해도 앞으로는 점점 고개를 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잘했어, 유리.'


마음에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나니 유리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에 맞춰 해야 할 일들이 생겼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자신을 세워놓으면 그렇게 어른이 되는 듯하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기대로 차오르는 지금, 유리는 혼자 이곳에 서 있다. 잠시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유리 편이었던 아빠는 자신을 돌봐주는 듯하다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다가와 품에 안으면서도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생명이 유리였다. 자식이었지만 자식처럼 품을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았고 이해하려 애써봤지만 유리는 혼자였던 그동안의 삶을 사과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유리는 늘 혼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유리의 편은 진작부터 없던 것이다.


유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차분히 스스로를 다독이고 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잠시 엄마보다 늦게 일어나도 괜찮다. 그런 기싸움은 의미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교도소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내리쬔다. 유리는 오른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눈부심을 마주한다. 결코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그 햇살의 따스함을 내 몸에 흡수시키고 나면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다. 그 눈부심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유리는 앞으로 더욱 힘을 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유리는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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