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유리 17화

살아난 유리 조각 #17

by Cruel Ella

결국 아저씨는 시체로 발견됐다. 최근 통화목록을 확인한 경찰이 영진에게 부고 소식을 전해주었다. 무슨 용건으로 만났었냐는 질문에는 일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의 상황도 이유도 모르고 소식만 전달받은 터라 영진도 아저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자살입니다."


겸연쩍은 사인이다.


"알코올 섭취 후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약 복용에 있어서 강제성의 유무는 고려되지 않는다. 경찰은 여러 가지로 번거로움을 싫어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유리의 남편 사건도 종결된 거겠지. 복잡하고 번거롭게 일 처리하기 싫으니까 빠르게 마무리해달라는 의견은 즉각 수용됐을 것이다. 윗선에서의 힘이 작용했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수 있다. 일 년 전에도 유리 부모님의 요구는 그들에게 반가웠을 주문이었을 테니까.


오후 2시, 구로 경찰서 주차장.


영진은 유리와 함께 구로 경찰서를 찾았다. 신중함이 더해진 영진의 표정이 유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나가는 영진을 따라 나오긴 했으나 유리는 어디든 영진과 함께여야 했다. 야무지게 다문 입술과 책임감이 가득 찬 눈빛, 곱슬머리로 부드러움을 자아내는 듯 하나 신중함을 두른 말투에는 서른이 넘은 어른의 무게가 느껴진다. 영진은 보면 볼수록 다채롭다. 유리에겐 그저 그런 싱거운 사람처럼 치부해버렸던 영진이었다. 자신의 잘못된 선입견이 영진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든다.


"잠시 여기 있어. 오래 걸리진 않아."


영진은 유리를 차에 두고 경찰서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유리는 무슨 용건인지 묻지 못했다. 오늘 새벽, 녹음 메시지를 듣고 있던 영진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기타를 메고 하모니카를 불며 바닷가를 어슬렁 거리던 한량의 모습이 아닌, 서울에서 그리고 커다란 고급 빌라에서 본 그는 그동안 유리가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더구나 유리 자신을 바라보던 영진의 눈빛까지. 잊힐 수 없는, 선이 굵은 남자였다.


"나는?"


이 모든 사건은 유리가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제외시켜버린 영진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 거야."


"혼자 가려고? 무슨 일인데?"


"다녀와서 말해줄게."


"뭔가 잘못되는 건 아니지?"


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영진의 소맷자락을 잡는다. 조심스러운 동작이었으나 손가락에 힘을 너무 준 탓에 덜덜 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걱정 마."


"걱정돼."


"..."


영진은 그런 유리의 손을 힘주어 잡는다. 이내 유리의 눈을 바라보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이 기운다. 그러다 영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추스르고는 급하게 차에서 내려 경찰서로 들어간다. 하버 터면 유리에게 실수를 할 뻔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순간순간 이성이 무너질 때가 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영진은 차에서 멀어져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는 영진의 차에서 흔적을 감추었다.




"유리는?"


"아직이요."


"무리인가?"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예요. 우선 좀 쉬어야죠. 밖으로 너무 나돌았어서 힘들었을 거예요. 그날 생긴 상처는 제법 아물었더라고요, 살도 좀 찐 것 같고."


"그 청년이 잘 보살펴줬나 보군."


"가까이 두면 안 되겠어요. 이서방 때처럼 사달이 나면 또 수습하기 힘들어질 거예요."


"일부러 떨어뜨려 놓는다고 될 일이 안되진 않소. 순리를 거스르는 것은 생각한 것보다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요."


"속 편한 소리 하시네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애가 정신을 차려야 몸을 만들고, 몸을 만들어야 오디션을 볼 수 있어요. 유리도 내년엔 나이 서른이에요. 무대에 설 기회가 점점 없어진다고요!"


"아직도 포기를 못한 거요? 그만큼 하면 됐잖아. 무사히 돌아온 아이에게 또 무슨 혹독한 짓을 하려는 거요!"


"내겐 아직 이뤄진 게 없어요! 왜 이해를 못 해요? 유리에게 발레는 운명이었어요. 발레가 인생 전부였다 고요. 유리의 타고난 재능을 당신도 눈으로 확인했잖아요. 이대로 썩혀둘 순 없어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내보내야 해요. 하... 그동안 너무 많이 쉬었어요. 몸이 회복되면 식단 조절부터 하고 연습실을 알아볼 거예요."


"이미 발레로부터 멀어진 아이를 어쩌려는 거요? 제발 내버려 둡시다. 유리는 유리 인생을 살게 둬요!"


"그러라고 내버려 뒀더니 결국 이 서방하고 결혼한답시고 나가버렸죠. 그 비좁고 칙칙한 아파트에서 사는 꼴을 당신도 봤어야 해요. 얼마나 더럽고 역겨운 냄새가 났었는지 알아요? 난 그 꼴을 보고도 2년을 참은 거예요. 나도 참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2년 동안 참아줬으면 많이 기다려준 거라고요. 그때 당신이 말리지만 않았으면 진작 데려 올 수 있었어요. 내가 손을 쓰지 않았..."


"....!"


"아니, 내가.. 데려오지... 않았으... 면..."


"당신, 설마... "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여보, 내 말 좀 들어봐요. 지금 중요한 건..."


"제발, 좀!!"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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