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 작업이 시작된다. 원래 영진은 작사를 하지 않는다. 리듬을 전문적으로 만지는 사람이라 작곡과 편곡으로 유명하다. 그들 세계에서는 얼굴 없는 음악가인 셈인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음악으로만 승부를 보는 요즘 같아선 흔한 캐릭터다. 작사와 작곡 모두를 마친 곡 하나를 어떤 가수에게 전송한다. 제발 곡 하나만 달라고 2년간 졸라대던 가수다. 아무 하고나 작업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난 가수지만 그는 영진에게 매달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한 듯 집요하게 연락을 해왔었다. 영진이 덧붙여 제시한 액수는 어마어마하다. 영진 입장에서는 안 받으면 그만인 셈이다. 유리 덕분에 탄생한 곡을 헐값에 넘길 순 없다. 나름 개인적인 갑질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사랑을 담보 삼은 건방진 남자일지도.
전송을 마친 영진은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댄다.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이제야 자신의 서울 집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위층에 있을 유리의 존재를 잊으려 집중했던 5시간이 훌쩍 넘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 3시. 유리는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부엌으로 나와 맥주를 찾는다. 냉장고에는 캔맥주가 늘 구비되어 있다. 영진은 작업이 끝나면 어김없이 시원한 맥주를 생명수처럼 들이켠다.
"나도!"
하마 타면 입에 있던 맥주를 뿜을 뻔했다. 불 꺼진 거실 소파에 유리가 앉아있다. 인기척도 없이, 위층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유리가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생각해보니 갈아입을 편한 옷도 주지 못했다. 씻으라고만 했지 칫솔도 건네주지 못한 것이 생각난다.
"아, 칫솔은 새거 아무거나 꺼내 쓰고, 옷은 입을만한 거 찾아볼게, 잠시만."
"맥주 달라고."
허둥대던 영진이 민망할 만큼 유리는 단호했다.
"언제부터 거기 앉아 있었어?"
"작업 끝나길 기다렸지. 깜빡하면 잠들 뻔했어."
"위층 가서 자라니까. 왜 여기 앉아있어, 무섭게."
영진은 유리에게 맥주를 건넨다. 받아 든 맥주가 입을 열며 미리 시원한 소리를 낸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청량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어두운 거실 너머 창문으로 은은한 서울 가로등 불빛이 간접적으로 비친다. 노란 간접 조명이 거실 천장에 매달렸다. 그 아래로 남녀는 아무 말 없이 맥주를 마신다.
"내 전공은 발레야. 안 믿어지겠지만."
유리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얘기를 다시 꺼내 놓는다. 해야 할 말인 것 같아 벼르고 있었다. 유리는 타이밍을 보고 있었던 것이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던 게 아니다. 영진이 일궈놓은 현실을 보니 유리도 놀고먹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태생적으로 백수는 아니라고 구구절절 핑계라도 대야 했던 것처럼.
"엄마가 원하던 발레단에 들어가지 못했어. 내가 좋아서 시작한 발레가 아니었거든. 절실함 없이 하려니 티가 났던 가봐. 아마 다른 극단 오디션을 봤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발레리나는 엄마의 꿈이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엄마는 나를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했다. 그게 정도를 넘어서 무섭기까지 했다. 식단을 관리하고, 스케줄에 맞춰 사람을 붙였다. 혹독하기 그지없었지만 유리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해야 했다. 거절할 수 없는 압박과 카리스마가 있던 엄마를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행복하지 않았어. 발톱이 빠질 때마다 고통스럽고, 어떨 땐 억울하기까지 했다니까. 친구들은 어느 정도 실력에 맞춰 발레단에 입단하고 공연도 하는데 우리 엄마는 굳이 본인이 원하는 발레단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어.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안 되는 걸 어떡해. 그땐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는 방법을 몰랐을 때니까."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결혼이었을까. 졸업과 동시에 유리는 남편과 도망쳐 살았다. 서울 구로의 한 동네로 이사한 지 일주일 만에 엄마는 어떻게 알았는지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두둑한 현금 봉투를 식탁에 내려놓고는 집안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이서방." 이라며 우아한 말투로 남편을 불러 세웠다.
"고생하게."
그게 전부였다. 인정인 듯 아닌 듯. 애매한 말만 남겨놓고 떠난 엄마는 그 후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 연락두절이 우리 사이를 인정한 것이라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이 맥주 엄청 맛있네. 난 이런 행복도 못 누리고 살았지 뭐야."
애써 분위기를 띄운다. 무겁고 어두운 얘기를 가볍고 밝게 하려니 에너지가 많이 쓰인다. 유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영진은 이미 그녀에게 빠져있다. 안쓰러움으로 포장된 동정일 거란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 이건 분명 사랑이다. 영진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어두워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지금 본인이 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을 들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밤, 위험하다. 영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들었다.
그때 영진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새벽 3시를 훌쩍 넘은 시각. 금방 끊긴 전화는 음성 녹음으로 넘어갔는지 메시지 하나가 떴다. 영진은 곧장 확인을 한다.
"영진아, 아저씨다."
"...!"
"처리됐나요?"
"방금 연락받았소. 깨끗하게 정리됐다고 하니 안심해도 되겠소."
"미리 손을 써놨으면 됐을걸. 내가 확인하지 않으면 일처리도 제대로 못하다니, 원."
"들어간 돈만 2억이 넘어, 당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소?"
"당신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 아닌데 별 걱정을 다하시네요. 예전에 했던 약속 잊으셨어요? 당신이 그 애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을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잖아요. 그 애를 받아준 건 오로지 나밖에 없었다고요. 그 애를 당신 손으로 넘겨준 거예요. 아무 간섭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 애 인생을 나에게 넘겨주면서 도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이었던 거예요? 건강하게 잘 먹이고 입히고, 힘들게 가르쳐서 남부럽지 않게 키웠잖아요. 단 하나! 겨우 단 하나 바랬던 건데! 그 애가 그걸 이뤄내지 못한 거라고요!"
"그건 당신의 꿈이었지, 유리의 꿈이 아니었소!"
"그 애의 꿈같은 건 궁금하지도, 상관하지도 않아요. 타고나길 재능 있게 타고난 거잖아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그 년이 낳았으니 오죽 유능할까. 내 라이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년이랑 놀아난 당신을 용서한 건 아니에요. 그년 때문에 내가 무대에 오르지 못한 한을 유리가 해주길 바랬던 것뿐이라고요. 내 인생을 그 애한테 바쳤어요. 내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그 애를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려고 했던 게 잘못이에요? 아니잖아! 당신과 그 년이 망쳐놓은 내 인생에 대한 대가였잖아, 유리는!"
"처음 당신이 유리를 받아준다고 했을 때에는 나도 놀랬소, 그리고 고마웠소. 그래서 아무 말 않고 당신 하자는 대로 했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야!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이제 그만해요!"
"갖다 바친 돈이 아까워지기 전에 그 입 다물어요. 우리 아버지 한마디면 당신 목숨도 위험한 거 아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