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열음 Sep 23. 2024

열두 번째 재주넘기

- 새 집과 새 마음

<허무는 마음>



고개를 돌릴 때마다 달달거리는 뻣뻣한 선풍기를 켜고 여름을 시작한다. 혹시라도 외출할 때 저걸 켜고 그냥 나갔다가는 집의 생사가 위태로울 것이다. 아직 날이 채 더워지기도 전에 각 방마다 하나씩, 거실에 하나를 턱- 하고 꺼내 준 사람은 역시 아빠다. 벌써 선풍기를 꺼낸다고? 생각한 지 단 며칠 만에 나도 모르게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영락없는 태양인의 기질을 지닌 가족의 숙명이다.


앞으로 약 한 달, 새 집에 마음을 붙이기까지 아주 느릿한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나의 모든 삶을 싸 들고 4평짜리 방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직접 땅을 밟아 본 적도 없는 집에 들어가고자 수많은 서류를 보내고 몇 달을 기다려 마침내 합격 통보를 받았다. 재택 근무와 5시간 통근의 날들을 보낸 지 5개월 만에 새 집을 얻은 것이다.


아직 계약서를 쓰지도 않았지만 들이고 싶은 가구를 손가락으로 모두 추려냈다. 침대와 의자, 책장만을 마음에 두고 있다. 한쪽 면은 하늘색 줄무늬, 다른 면은 갈색에 가까운 와인색의 이불을 먼저 골랐다. 그 이불에 맞춰서 책장과 의자를 고를 요량이다. 처음 집에 들어갈 때 진짜 챙겨가야 할 것들은 컵과 그릇, 수건과 쓰레기통 정도겠지만 그것들은 낭만과 가장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아직 새 집을 기대하는 낭만을 포기하지 못했다.


수월한 이사라는 게 존재할까. 몸과 마음을 모두 들여다 새 곳에 안착시키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겠다. 작은 방에서 두려움과 설렘에 녹아내릴 얼굴을 상상한다. 모든 움직임을 혼자, 주체도 상대도 오직 나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멍하니 앉아있을 것도 같다. 더 이상 가족을 위한 닭볶음탕도, 결말이 궁금하지 않은 식사용 예능도 없다. 개운한 샤워 후에도 맨몸으로 술렁 나와버릴 수 있다. 쓰레기를 버려 줄 누군가도, 철마다 선풍기를 꺼냈다 넣어줄 사람도 없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너무 처음이라 어질어질하다.


언제쯤 처음이라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질문과 조금의 슬픔이 남는다. 어쩐지 이제는 밤마다 가구를 쇼핑하느라 눈이 아프지도, 집 근처 맛집이나 로드뷰를 살펴 보지도 않는다. 그저 매일 앉아 있는 이 소파에서, 침대에서 더는 시간을 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날들만이 남았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며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기도를 하는 날들. 영혼을 되찾아오는 순간들만.


어쩌면 슬픈가, 유일했던 집이 더는 유일하지 않아지는 순간이. 몇 주에 한 번 집을 찾아오거나 들르며 잠시 머물다 갈 손님 같은 미래가. 새 집에 가야만 새 마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지겹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더는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자각이 나를 새롭게 한다. 집을 옮기기 위해 필요한 건 낡은 선풍기도, 새 책장도, 깨끗한 쓰레기통도 아니다. 삶의 뿌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한 건 새 마음뿐이다.


내가 나를 지탱해야 한다는,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잔뜩 초대했다가도 결국은 그들이 돌아가 마침내 혼자가 되기를 바라는 치사함. 아무런 빛도 소리도 없이 혼자 자는 밤이 무섭지 않은 견고함. 누구에게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을 자유. 위시리스트에 아무리 넣어놔도 당장은 살 수 없는 그것들이 마침내 새 집을 헌 집으로 허무는 순간을 바라고 있다.



2024.05.2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