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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Oct 24. 2024

스무 번째 재주넘기

- 습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3년 만에 병원을 찾았다. 아픈 곳은 없다. 다만 신중한 염려가 있었을 뿐이다. 얼마 전 운명적으로 이 병원을 스쳤기 때문이다. 코로나 검사를 하러 왔다가 약을 받는 길에 핑크색 간판을 발견했다. 너무나 당당하고 사랑스럽게 내건 “유방 초음파 검진” 표지를.


아... 이제 검진 받을 때가 됐는데.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다. 병원의 이름도 몰라서 대충 지도를 살펴 예약했다. 최지우 의사님이 운영하는 여성 병원이라 안심이 되었다. 지난번 초음파 검진에서는 어떤 남의사가 가슴에 젤을 바르고 한참을 쓰다듬었던 지라 솔직히 편치 않았다. 그분은 정말 프로셨지만 나는 이토록 아마추어였다. 유방 초음파가 처음이라 임신한 아기를 보듯 초음파를 해야 하는 줄도 몰랐다. 기계를 끌어안고 엑스레이나 찍는 줄 알았는데 틀려도 한참 틀렸던 것이다.


다행히 이번 병원은 여자분이다. 역시 옷을 주섬주섬 벗고 벌써부터 우울해지는 가운을 입는다. 어째서인지 빳빳한 동시에 몹시 해진 가운이다. 최지우 씨는 한결 관성적으로 내 가슴을 문질렀다. 저번 의사와는 다르게 세팅은 모두 간호사에게 맡기고 그분은 들어오셔서 문지르기만 하셨다. 이렇게 체계적인 병원이라면 가슴을 맡길 수도 있겠다.


그런데... 믿었던 지우 씨가 내 가슴 곳곳에서 자꾸 멈춰서 화면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특정 부위에 문제가 있다는 건 그때부터 사뭇 알았다. 지난번 의사님은 본인이 멈춰도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의심을 잠재우셨는데 이분은 묵묵하다. 확언할 수 없는 자의 얼굴을 하고선.


“이전 병원에서 물혹이라고 했다고요? 물혹 아닙니다. 조직 검사 해야 돼요.”


조직 검사라... 해본 적은 없지만 국소 마취도 한다고 하니 그냥 안심했다. 아직은 걱정할 때가 아니다. 왼쪽 가슴에서 뭔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피인 것 같다. 이어지는 간호사님의 선량한 목소리, “총소리가 나는데 놀라지 마세요.” 아마도 그 말을 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실제로 총소리가 세 번 정도 났고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병원을 나섰다. 검사 결과는 3일이나 지나야 나올 것이고, 일단은 출근부터. 사무실을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점심 시간마다 걷던 길이다. 남자친구에게 검진 사실을 알리고 실비를 확인해보라는 걱정과 괜찮을 거라는 위로를 받고는 웃음이 났다. 걱정은 위로와 함께일 때 빛을 발한다. 아직은 미래가 걱정되지 않는데도 걷다 보니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지난번에도 내가 유방 검진을 받는다고 할 때 사색이 되었던 그 사람이. 나를 잃을까 모든 순간 걱정하는 그의 약한 얼굴이.


순식간에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걸으면서 우는 건 또 오랜만인데. 이번 건 순전히 아빠 때문이었다. 내 얼굴이나 엄마의 얼굴은 없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역시 남은 자들일 테니까. 정확히는 남은 남자들. 아빠와 승우와 주호... 그건 애먼 희생 뭐시기도 아니고 그냥 사랑이었다. 내 잘못도 아닌데 죽도록 미안해서 흐르는 눈물을 대충 닦은 후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토록 마음이 차분할 수가 없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 태어난 아기마냥 삶과 바닥을 느낀다. 삶은 어쩌면 바닥에 달린 것일지도 몰랐다. 가슴에 달린 붕대와 지혈 패드가 넘실거린다. 팔을 세차게 움직이면 지혈 포인트가 어긋날 수도 있다는데 그럼 피멍이 들고... 피멍은 잘 빠지지 않을 거랬다. 무지하게 부드러운 협박이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검진 사실을 잊을 줄 알았는데 가슴에 붕대가 달려 있으니 잊을래도 잊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두 번째 눈물이 흘러나왔다. 오빠와 계획한 가까운 미래가 생각보다 가깝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먼 미래의 내가 없을까 봐 무서웠다. 가슴에 있는 붕대를 의식할 때마다 15년 전으로 회귀했다.


똑같이 가슴에 붕대를 하고 아빠 손에 기대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던 사람. 엄마가 검사를 했는지 수술을 했는지 의사의 확언을 들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힘겹게 걸어왔다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새로 태어난 아기마냥 두렵고 무지한 얼굴로 걸었다. 매일 엄마를 생각하던 날들도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버릇이며 자기 연민이었다. 이제는 가슴에 붕대 정도는 달아야 엄마를 깊이 생각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삶과 바닥을 느끼는 엄마의 눈에 내가 걸려 있다. 엄마가 엄마이고부터 단 한 순간도 나는 그 눈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나의 파도, 나의 바다. 내가 놓아 버린 그 일을 엄마는 아직까지도 버리지 못했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확언할 수 있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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