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남과 동시에 나를 반기는 사람들이 있다. 멤버를 선택할 수도, 교체할 수도 없는 관계. 불완전한 누군가가 또 다른 불완전한 누군가를 창조하고 양육하는 곳. 그럼으로써 조금은 완전해지는 게 가족이 아닌가. 이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공동체가 나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고 있다.
어렸을 때는 많은 집에 가훈이 있었다. 초등학교에서 가훈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주면, 많은 아이들이 ‘가화만사성’이라는 거창한 고사성어를 가져왔다. 가족이 형통하면 만사가 형통하다. 분명히 뭉쳐야 산다고 믿었던 시기였다. 지금은 혼자가 최고라고 믿지만.
우리 집은 가훈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숙제를 받으면 뭐라도 써서 내긴 했지만, 그만큼 통일된 신념은 없었다. 엄마가 있었던 그때도, 엄마가 없는 지금도. 가훈은 없었지만 수개월 간 가족에 대해 쓰며 느낀 건, 가족이 주는 안정감이 건강한 정신의 토대를 만든다는 거다. 가족이라는 1차 집단에서 건강한 관계를 맺을수록 사회에서도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게 바로 가화만사성의 정신인가.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가족 관계는 무작정 화목하기만 한 게 아니라, 솔직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고 느끼는 걸 말한다. 가족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가족 밖으로 문제를 들고나갈 테니까. 나의 경우엔 남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갈등을 잘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더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왜 나를 미워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비단 나의 문제만으로 타인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저 우리가 맞지 않는 관계일 수도 있고, 상대의 마음이 못 돼먹은 걸 수도 있다. 또는 나를 질투할 만한 이유가 있거나. 이 문제는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많이 해결되었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쉽게 인정하고, 타인의 불공평함을 참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나는 끈질기게 참아보는 사람이다. 뭐든 솔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의 가족은 상상하는 평화로운 가족의 딱 그 모습이다. 장난기 많은 아들들과 마음이 넓은 엄마, 아빠. 모두가 함께 교회에 가고, 식사하며 웃고 장난치고 떠드는 모습. 물론 모든 가족에는 그들만의 이슈가 있겠지만, 오빠네 가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건 ‘가화만사성’의 교회 버전 아닌가.
나는 가족만큼 복잡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평생을 함께한 만큼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데다, 굳어진 관습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의 경우엔 식사 시간이 오면 모두가 주저한다. 오늘은 무얼 먹냐는 알맹이 없는 질문만 맴돈다. 나는 그런 질문을 듣기 싫어서 미리 일어나는 것이고... 이 모든 관행을 갈아엎으려면 새로운 관계를 열 번 시작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들여야 할 거다.
지금까지 가족들을 바꾸는 게, 또 가족 안에서의 나를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나인 동시에 가족이려면, 그것도 문제 많은 우리 가족 같은 경우라면 참지 말아야 하니까. 연인과의 관계처럼 문제가 쌓이지 않도록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나는 스물한 살부터 우리 가족의 문제에 대해 곱씹어 왔는데, 지금 보니 발전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불만은 있는데 표현은 못 하니까 투덜댔고, 그 후로는 가족 외부인들에게 힘듦을 호소했고, 결국은 글을 쓰게 됐다.
쓰기로 시작한 이후 원래는 없던 결단력이 생겼다.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싶다는 혁명적인 마음,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전에 원가족의 고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는. 그런 건강한 쪽으로 불끈대게 되었다. 새로운 가족에게는 같은 문제를 대물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에게 근본적인 불만을 말하고, 아빠는 요즘 나의 태도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둘 다 울어버렸다. 최초로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문제를 입 밖에 꺼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있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도 하고, 사실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가족을 포기해 버릴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제 해결의 열쇠가 내게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단하고 부딪힐 사람이 나밖에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직은 역부족이지만 부족한 나의 표현력으로 꿈틀대보는 것이다. 이 작은 움직임이 언젠가는 큰 파도를 일으킬 거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