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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Jan 24. 2022

감동이라는 포장지를 벗기면

나는 어릴 때부터 장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중 유난히 불편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비록 장애가 있지만 육체적인 한계를 넘어 등산에 도전한다던가, 육상 종목을 뛴다든가 하는 무언가를 뛰어넘는 이야기.     


당연히 도전을 한 사람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그 이야기는 어딘가 내게 묘한 불편함을 안겼다.

장애가 있음에도 도전을 하고 그것을 극복해서 무언가를 이룬다는 건 감동적이지만 항상 장애는 그런 것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는 게 싫었다.


장애는 항상 극복해야 하는 대상인 걸까.

그렇다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인은?


한때 친한 언니랑 그런 얘기를 나눴다. 장애인 인터뷰 중 장애를 개성이라고 생각한다는 글을 봤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장애를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우리 두 사람은 이해되지 않아 구시렁거렸다.


장애가 무슨 개성이야, 없으면 좋은 거지.


어린 만큼 반항심도 가득해서 그랬던 면도 있었다. 

   

내가 티비에서 보는 장애인은 항상 감동적인 드라마가 있었다. 글도 그랬다. 장애를 극복하거나 장애를 내 삶의 장점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을까.


장애를 극복하는 게 감동이란 건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장애를 개성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깎이고 깎여 다듬어졌다는 뜻일 테다.

그래서 그 사람은 더욱 감동을 만들어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지만 그런 장애인만 기억에 남는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모두가 장애를 극복할 순 없다.

모두가 내 장애를 장점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부분들만이 미디어에 노출된다.


불편하고 힘든 점들, 장애인들의 일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지하철을 탈 수 없거나, 장애인 화장실이 청소도구로 차 있어 소변을 참아야 할 때,

가고 싶은 식당이 경사로가 없어 가지 못할 때, 키오스크에 손이 닿지 않아 주문할 수 없을 때,

이렇게 숱하게 부딪히는 일상은 세상에 노출되지 않는다.


아주아주 적은 소수의 감동적인 이야기만이 사람들 눈에 띌 수 있다.


사람들은 감동이라는 포장지를 벗긴 현실을, 날것의 모습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내가 대학을 다녔을 때 사람들은 나를 대단하게 봐줄 때가 있었다. 나를 잘 모르지만 전동휠체어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나보다. 아마 나도 모르는 드라마를 내게 부여한 게 아닐까.

나는 그냥 대학생이었다. 뭔가 더 대단하지 않은 그 또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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