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에서 Oct 05. 2022

슬픔의 축소

울 만한 일이 아니야

초등학교 1학년은 아직 착해요.


아는 선생님이 요즘 초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 말을 했을 때 웃음이 났다.

말에 색깔을 넣을 수 있다면 '아직'을 빨간색으로 바꾸고 굵게 바꿔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구나. 언제부터 안 착해지는 거예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는데 아무튼 1학년은 착하던데요. 수업하면서 애들이 착하다는 생각 자주 해요."


필통을 안 가져온 아이가 있어서  "오늘 친구 **이가 연필이 없는데 누가 빌려줄 수 있을까?"하고 물으면 "저요, 저요"하면서 서로 빌려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게임을 하면 게임에 진 아이들은 다시 하기를 원하는데 이긴 아이들은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친구들이 다시 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할까?"라고 물으면 하겠다고 대답한다고 했다.


"착하네요. 근데 수업할 때 게임도 해요? 아이들이 좋아하겠어요."


아이들이 어려서 집중하는 시간이 짧아 게임을 자주 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울어요. 게임을 하고 나면 꼭 우는 애들이 있어서 그게 문제예요."


"어머, 우는구나. 어떻게 해요?당황스럽겠는데요."


우는 아이들 때문에 곤란해진 선생님은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동생에게 조언을 구했다. 게임에 져서 우는 아이에게 "괜찮아, 울지 마. 그냥 게임이야. 이건 울 만한 일이 아니야."라고 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더라고 하자 동생은 언니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언니, 그러면 안 돼. 왜 아이의 슬픔을 축소해? 그 아이가 슬프다는데 거기서 '울 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 안 되지. "


혹시 나도 그런 적이 있는 건 아닐까? 울 만한 일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기준에 따라 다를 텐데 울 만한 일이다 아니다를 내 마음대로 판단해 버린 적이 있지 않을까?


한국어 문법으로 '-(으)ㄹ 만하다'를 가르칠 때마다 교재에 나오는 '한국에서 가 볼 만한 장소'나 '외국인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 모두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미슐랭 가이드 별점 1점은 그 지역에 가면 방문해 볼 만한 식당, 별점 2점은 길을 돌아서라도 가 볼 만한 식당, 별점 3점은 그 식당에 가기 위한 목적만으로도 그 지역 여행을 갈 만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별점을 정한 사람과 기준이 비슷하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식사를 할 것이고 아니라면 앞으로 별점 따위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할 것이다.


어떤 일의 '가치'와 '충분함의 정도'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준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겪고 때로는 어떤 일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

오늘은 게임에 진 것이 눈물이 멈추지 않는 크나큰 슬픔이지만 내일은 별일 아닐 수 있고, 더 크고 강력한 슬픔이 밀려오면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안다는 사실이 슬프다. 한편으로는 이제 슬픈 일이 생겨도 스스로 축소하며 울 만한 일이 아니라고 나를 다독일 여유가 생겨 기쁘기도 하다.  


 


 


이전 04화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